
1917년 프랑크푸르트에서 초연된 『깔레의 시민들』로 카이저는 세계적인 극작가의 위치에 오르게 된다. 이 작품은 독일 표현주의의 고전적 작품으로 평가된다. 이 작품 이후 카이저는 1920년대 게오르그 하우프트만과 더불어 독일에서 가장 많이 상연된 드라마 작가가 되었다.
이 작품은 카이저가 프랑스의 조각가 오거스트 로뎅의 기념동상 〈깔레의 시민들〉 (1884~ 1886)에 자극을 받아 쓰여 졌다. 그는 이 작품의 소재를 로뎅과 마찬가지로 프르와싸르의 백년전쟁에 관한 연대기에서 얻었다. 이 연대기는 영국 왕이 1346년 프랑스로 쉽게 드나들기 위해 프랑스 항구 깔레 시를 포위하는 과정과 영국군의 포위망 속에서 약 일 년 동안 버터 온 깔레 시 시민들의 저항과정을 상세히 서술하고 있다. 연대기에 따르면 깔레 시장인 장 드 뷔엔느는 영국군에 포위되어 식량이 고갈되자 시민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도시를 넘겨줄 것을 결정한다. 영국 왕은 여섯 명의 깔레 시민들이 벌거벗은 채 속옷만 걸치고 모자도 쓰지 않은 채 목에 오랏줄을 감고 깔레 시의 열쇠를 들고 성 밖으로 나와 항복하면 주민들의 목숨을 살려주겠다고 동의한다. 시장은 시민들을 공회당에 불러모아 영국왕의 요구조건을 받아들이기로 결정짓는다. 시장은 깔레 시민들의 통곡소리를 들으며 여섯 명의 인질들을 성문 밖의 영국군 진영으로 인도한다. 영국 왕이 그들에게 처형을 명하자 임신 중이었던 영국왕비가 장차 태어날 아기를 위해 그들을 사면해 줄 것을 간청한다. 이에 왕은 여섯 명의 깔레 시민들을 살려주고 그들에게 각각 동전 여섯 닢을 나누어주며 풀어주었다 한다.

(로뎅의 조각작품)
『깔레의 시민들』은 3막으로 구성된 희곡이며 극적 사건은 깔레 시의 공회당과 교회 앞의 넓은 시장 터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카이저는 역사적 사실을 단순히 재구성한 것이 아니라 영국왕의 요구조건을 놓고 벌이는 깔레 시민들 간의 첨예한 의견대립을 갈등 축으로 삼는다. 간략한 플롯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막에서는 영국군에 의해 포위된 깔레시는 전운이 감돈다. 영국왕은 사신을 보내 도시를 구할 수 있는 조건을 제시한다. 항복의 조건은 깔레시를 대표하는 선발 시민 여섯 명이 모자도 없이, 맨 발로 셔츠만 걸친 채, 목에는 오랏줄을 감고 깔레시의 성문 밖으로 걸어 나와 도시의 열쇠를 영국왕에게 전해주는 것이다. 프랑스의 대장 뒤게스끌랭은 희생을 치르더라도 군사적 투쟁을 계속할 것을 요구한다. 그와 반대로 유스땃슈 드 쌩삐에르는 도시를 보전하기 위해 영국왕의 요구조건을 들어줄 것을 주장한다. 깔레시민들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일어난다. 유스 땃슈 드 쌩삐에르가 도시를 구하기 위해 맨 먼저 인질로 나서자 그를 이어 여섯 명의 시민들이 지원한다. 극적 사건의 중심은 영국왕이 요구한 여섯명의 인질이 누가 되느냐 라는 문제에서 자원한 일곱 명의 선발시민들 가운데 누가 생존자로 남게 되느냐는 문제로 옮겨진다. 회생 정신을 보여주려던 선발시민들의 의지는 생존의 욕구로 뒤바뀐다.
2막에서는 선발된 일곱 명의 희생자들이 공회당에서 그들의 가족, 친지들과 작별한다. 여섯 명을 뽑는 제비뽑기에서 유스땃슈 드 쌩삐에르는 일곱 명이 모두 다 똑같은 색깔의 공을 뽑게 함으로써 결정의 순간은 다음날로 연기된다. 다음날아침 동이 틀 무렵 시청 앞 광장에 먼저 도착하는 여섯 명을 선발하기로 결정한다. 회생의 행위가 순간적인 흥분의 감정상태가 아니라 확고한 윤리적 실천에 근거한 내면의 정신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확인하고자 한 유스땃슈 드 쌩삐에르는 결정을 각 개인의 자율적 판단에 맡긴다.
“첫 종이 울리면 각자 모두 집에서 출발하시오. 그리고 제일 마지막에 장터에 도착하는 사람이 희생에서 제외될 것이오.”
미래를 향한 출발을 시도하는 인간은 인간개혁의 비전을 나타내며 자유의지에 의한 행동을 실천하는 새로운 행동가이다.
3막에서 약속된 시간에 선발 시민들 여섯 명이 도착한다. 그러나 유스땃슈 드 쌩삐에르는 오지 않는다. 분노한 군중들 앞에 유스땃슈 드 쌩삐에르의 아버지가 그의 아들의 시신을 담은 관을 들고 나타난다. 유 스땃슈 드 쟁삐에르는 행동의 필연성을 보이기 위해 전날 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걸어 나가라, 빛 속으로!” 라는 그의 마지막 말은 선발된 시민들에게 새로운 행동가가 되어 빛의 세계를 향해 출발할 것을 명령한다. 유스땃슈 드 쟁삐에르의 아버지는 유스땃슈 드 쌩삐에르의 죽음을 통해 '새로운 인간의 탄생'을 알린다.
여섯 명의 인질들이 출발하려는 순간, 영국 왕의 사신이 도착한다. 사신은 간밤에 왕자를 얻은 영국 왕이 왕자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깔레시와 깔레 시민들을 희생하지 않을 것을 명령했다고 알린다. 영국왕이 감사 예배를 드리기 위해 교회로 온다는 말을 듣고 장 드 뷔엔느는 교회의 가장 높은 제단 위에 유스땃슈 드 쌩삐에르의 시신을 올려놓도록 한다. 이 제단 앞에서 그 누구도 무릎 꿇지 않고는 기도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깔레의 시민들은 영국왕의 은총 때문이 아니라 유스땃슈 드 쌩삐에르의 죽음으로 내적으로 변화한다. 그의 죽음은 파괴와 약탈이 지배하는 현재를 극복하고 새 시대를 향한 출발을 약속하는 것이다.
인간개혁의 이념을 구체화시키며 새로운 인간의 모습을 형상화하는 『깔레의 시민들』에서 카이저는 옛 인간과 새로운 인간이라는 두 유형 의 인물을 대비시키고 있다. 옛 인간의 전형을 보여주는 뒤게스끌랭은 공동체의 안녕과 보존을 위해 스스로를 회생하기보다는 차라리 무력으로 저항하다가 파멸하는 것이 더 명예로운 일이라고 주장하며 폭력적인 항거를 선동한다. 그는 여섯 사람의 희생으로 항구와 시민들의 안전이 보장됨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의 명예를 위해 패배가 확실한 싸움에 함께 할 것을 부추긴다. 그가 얻으려는 조국의 명예는 깔레시의 파멸을 전제로 해서만 획득 될 수 있는 것이다. 뒤게스끌렝의 반대자로 등장한 유스땃슈 드 쌩삐에르는 개인적 명예보다는 공동체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인물이다. 유스땃슈 드 쌩삐에르의 새로운 인간으로의 변화과정은 그를 따르는 여섯 명의 선발 시민들에게로확산 된다. 그러나 곧이어 이들은 우연히 생겨난 삶의 가능성 앞에서 생명에 대한 애착으로 갈등한다. 유스땃슈 드 쌩삐에르는 흔들리는 지원자들을 위해 그들이 선택한 희생의 길에 아무런 동요 없이 나아가도록 이끌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다. 그는 새로운 행동이 제비뽑기와 같은 우연이나 도취된 흥분에 의해서가 아니라 새로운 행동가의 실천적 의지와 확고한 윤리적 확신에 근거한 내면의 정신에서 비롯되어야 함을 역설한다. 순간적인 용기에서 비롯된 명예심이라든가 혹은 운명 앞에서 두려워하며 그로부터 벗어나려고 애쓰는 모습들은 진정한 행동가의 모습이 아닌 것이다. 유스땃슈 드 쌩삐에르는 이들에게 진정한 행동가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다.
카이저는 유스땃슈 드 쌩삐에르를 통해 새로운 인간에 대한 비전을 제시한다. 개인적 영웅심에서 벗어나 공동체를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행동만이 새로운 인간의 전제가 되며 새로운 인간으로의 변화만 이 새로운 사회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카이저는 단순히 역사적 사실을 극화하는 것이 아니라 일곱 명 중 한명을 처형에서 면하게 하는 제비뽑기라는 극적 장치를 동원하여 진정한 희생의 의미에 대한 현대적인 문제를 제기하면서 새로운 인간 이념을 고지하고 있다. 드라마는 깔레시의 보존이 문제가 아니라 희생의 의미 자체에 대해 성찰한다. 카이저는 도시의 운명보다는 희생이라는 행위를 통해 어떻게 새로운 인간으로 변화하고 개혁되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여섯 명의 선발 시민들은 자신들에 앞서 죽음을 통해 모범을 보인 유스땃슈 드 쌩삐에르의 사명을 숭고하게 받아들이고 도시와 시민들에 대한 자신들의 사랑과 책임감을 실천하려 한다. 그의 희생의 의미는 시민들로 하여금 지향해야 할 가치가 어떤 것인가를 확실하게 깨닫게 하고 그들이 새로운 인간으로 변화되는 계기를 제공한다. 새로운 인간의 탄생은 부활이라는 기독교적 상징을 통해 메시아적 의미를 갖는다.
카이저는 암울하고 혼란했던 시대상황에서 새로운 인간을 통해 새로운 세계로의 변화에 대한 희망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다. 그의 새로운 인간에 대한 비전은 〈개인〉 에서 〈우리〉로 나아가 〈희생 공동체〉로 표현된다. 공동체 사랑에서 진정한 희생을 실천하는 〈새로 운 인간〉을 통해 종교적인 희망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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