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99년에 쓰여 진 ‘줄리어스 시저’는 피 비린내가 물씬 풍기면서도 읽으면 읽을수록 우리들의 가슴에 와 닿는 그 무엇이 있다.
셰익스피어의 생애를 4기로 나눈다면 제 2기의 끝 무렵에 해당되는 이 작품은 소위 사극에서 비극으로 옮겨지는 건널목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즉 『헨리 5세』이후 『줄리어스 시저』를 분수령으로 하여 셰익스피어는 소위 비극시대의 문턱으로 들어섰다는 것이 학자들의 일치된 견해이다. 따라서 사극과 희극으로부터 비극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위치 한 작품이 바로「줄리어스 시저』라고 말할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줄리어스 시저』의 소재의 태반은 토마스 노드 번역에 의한 플루타크의 영웅전에 근거하고 있다. 사극으로서의 처녀작인 「헨리 6세』이래 작품 중의 사극 대부분은 소재를 영국사에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셰익스피어는『헨리 5세』로써 영국 사극에서 손을 떼고 처음으로 고대 로마사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하여 『헨리 5세』에 이어 탄생된 작품 이「줄리어스 시저』이다. 그 후 8년이 지나 셰익스피어는 플루타크의 영웅전에 소재원천을 둔 작품을 두 편 썼다. 즉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와 『코리올레이너스』가 바로 그 것이다.

이 극의 제목은 줄리어스 시저로 되어 있다. 그러나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시저보다도 브루터스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요 컨데 이 극의 주인공은 제목 그대로 시저냐 아니면 브루터스냐 하는 데 쟁점이 두어져 있다. 보기에 따라서는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 소지를 가진 제명이지만 브루터스가 이 작품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사실 만으로서도 그를 주인공으로 생각해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제명을 줄리어스 시저로 삼았을 까? 그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서 두 가지 설이 있다. 그 하나는 엘리자베스 시대 사람들이 친근감과 매력 있는 제목을 전면으로 내세워 흥행을 꾀했다는 설이고 다른 하나는 등장인물 중에서 가장 지체가 높고 의연한 인물을 제명으로 삼는 것이 그 시대에 흔히 있어왔다는 설이다.
개선한 시저를 황제의 야심에 불타고 있는 것으로 오인하고 그를 타도하려는 캐시어스와 그들의 음모에 정의감에서 가담한 브루터스가 3월 15일 원로원 의사당에서 그 거사에 성공한다. 그러나 민심을 잃고 도주한 그는 캐시어스와 더불어 거병, 필리파이의 전투를 벌이나 안토니, 옥테비어스, 레피더스 등에 의해 패하여 처절한 최후를 맞게 되는 이 비극은 역사적 진실을 구심점으로 하여 밀도 있게 묘사됨으로써 극적 효과를 더욱 증가시키고 있다.

흔히 줄리어스 시저가 코리올레이너스나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보다 재미와 박력이 뒤진다고 하지만, 작품의 성격이 다른 어느 작품보다 더 투철하게 짜여 있고 극중 인물들의 본성을 섬뜩할 정도로 정확하게 표출해낸 점에서 평가할 때 다른 작품에 전혀 손색이 없다. 오히려 그런 점에서 셰익스피어가 성격묘사에 탁원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그는 어디까지나 한 인물에 동화되어 버리지 않는다. 항상 먼 발치에서 객관적으로 묘사한다. 다시 말해서 그는 극중 인물을 오직 단 하나의 시각이 아니라 복수의 시각에서 묘사하고 있다. 이를테면 등장인물들을 한 면에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측면에서 관찰하여 생의 빛깔과 생명력이 리듬을 빚어내고 정감을 조성한다. 그리고 우리는 줄리어스 시저에서 우뚝 솟은 세 개의 봉우리와 같은 국면을 만나게 된다. 그 첫 번째는 시저의 암살 장면이고, 두 번째는 브루터스와 안토니의 연설 장면이며, 세 번째는 브루터스와 캐시어스와의 논쟁 장면이다. 그 뿐 아니라 극 전개는 마치 흐르는 강물과도 같다. 어떤 때는 거세게 소용돌이치며 흐르는가 하면 또 어떤 때는 잔잔한 물결을 일으키며 숨죽은 듯 조용히 흐르기도 한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한 가지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셰익스피어 비극에 있어서 으레 선을 보이는 어릿광대의 희극적이고 해학적인 장면을 볼 수 없다는 점이다. 그리고 여자라고는 귀부인인 시저의 아내 캘퍼니어와 브루터스의 아내 포오셔 등 불과 두 명밖에 등장하지 않는다. 극중 인물로서 여성의 수도 유달리 적거니와 우리를 더욱 놀라게 하는 것은 이성간의 묘사는 메마를 정도로 없다는 점이라 하겠다.
특히 브루터스와 포오셔와의 관계도 그렇다. 단순히 남자와 여자, 금실 좋은 부부지간이라기보다는 어딘지 모르게 동지적인 느낌이 든다. 그러므로 이 작품에서 사랑이란 말의 개념은 이성간의 애정이 아니라 남성간의 우정, 친애, 존경 등의 뜻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저속한 성적 묘사도 볼 수 없다. 브루터스는 정치가라기보다는 윤리학자에 가깝다. 그는 이상주의자이며 남달리 애국심에 불타는 선비 형이다. 매사에 정중한 그는 강직하며 엄격할 뿐 아니라 민권 자유사상이 강인하고 명예를 위해서는 사랑까지도 거부하는 사람이다.

제1막 제2장에서 캐시어스가 브루터스에게 시저가 황제가 되려는 것을 바라지 않는 것이 아니냐고 묻자,''원치 않고말고... 캐시어스. 시저를 대단히 흠모하기는 하지만... …(중략) ……하늘은 내가 죽음을 두려워하기보다는 영예로 운 이름올 존중하는 인간인 것을 알 것인즉.” 하고 대답하는 데 이 대사야말로 브루터스의 명예의식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시사를 던지고 있다.
줄리어스 시저의 참담한 결말은 어느 의미에서는 시저의 의지와 브루터스 의지와의 상극적인 충돌이라고 볼 수 있다. 로마는 시저와 그 외의 용맹스런 장군들의 혁혁한 공적으로 방대한 영토를 그들의 손아귀에 거머쥐었다. 그 광활한 영토를 평화롭고 질서 있게 통치하려면 오직 총명함과 영단 력으로 다스리는 전제정치가 절대로 필요하다는 것이 시이저의 주장이며 사상이었다.
한편 브루터스는 어디까지나 민권 자유사상의 신봉자 이다. 브루터스는 윤리적 측면에 최고의 이상을 두고 있었다. 이 인본주의적 윤리사상은 그의 생명이며 종교와도 같이 절대의 경지였다. 이것이 시저와 브루터스를 정신적으로 떼어놓게 한 원인이었다.
브루터스의 비극적인 종말은 그의 단순한 성격에서 빚어 졌다. 그는 불행하게도 인생과 앞날을 내다보는 눈이 밝고 깊지 못한 것이 홈이었다. 그의 치명적인 오판은 안토니를 과소평가한 나머지 그에게 추도 연설을 허락한 점이다. 브루터스는 한사코 자기의 언행을 정당시했다. 끝까지 시민들이 자기를 신뢰해 주리라고 믿었다. 즉 그는 자기를 지나칠 정도로 믿었다. 딱딱하고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자기의 연설보다도 봄기운이 감도는 듯한, 부드럽고 정감이 넘치면서도 애절한 호소력이 있는 안토니의 연설이 극적으로 치달아 폭 발하는 그 무서운 힘을 그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브루터스는 자기 과신 속에서 갈기갈기 찢기고 허물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이 작품의 마지막 대목에서. 안토니의 아래와 같은 대사는 우리의 심금을 올리고도 남는다.
엔토니 : 이분은 그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고결한 로마인이었다. 브루터스를 제외한 역모 자들은 모두 위대한 시저를 증오하여 시해했소. 그러나 이분만은 공명정대한 정의감과 만인의 행복을 위하여 한패가 된 것이었소. 이분의 생애는 고결하였소. 그의 인품은 원만하여 그 때문에 자연도 고개 들어 ''이분이야말로 인간이었다...!” 고 전 세계를 향해 숙연히 외칠 수 있을 정도였소.
비록 처절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브루터스이긴 하지만 그 고결한 품성은 우리를 신비스럽게 매혹하며 우리의 마음을 적셔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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