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홍석진 '환장지경'

clint 2015. 11. 13. 08:46

 

 

 

극중 인물의 성격은 작가의 상상력에 기반해 허구로 설정됐다. 태종은 겁쟁이 소심남으로, 세종은 치정 홍보에 목숨 거는 처세가로 등장한다. 동생인 세종에게 세자 자리를 내주고 한량으로 지냈던 양녕대군은 이번 연극에서는 평범한 인간으로 새롭게 풀이된다. 이들이 권력을 향해 아귀다툼하는 모습을 풍자함으로써 역사책 속 이야기를 파격적이면서도 발칙하게 패러디한다. 세자 양녕대군의 패륜은 전(前) 중추부사 곽선 대감의 첩인 어리를 납치하기에 이른다. 이로 인해 그간 세자의 만행을 참아왔던 태종은 세자를 폐위하고 그를 측근들과 함께 경기도 광주로 귀양을 보낸다. 양녕대군과 함께 귀양지로 보내진 어리는 그에게 복수하기 위해 역모를 꾀하도록 측근을 부추기기 시작하고 이오방으로 하여금 가짜 양녕 행세를 하며 전국을 유랑하도록 한다. 한편 갑갑함에 유배지로부터 탈출을 꾀하던 양녕은 자신의 행세를 하고 있는 이오방과 만나게 되는데...

 

 

 

 

 

 <환장지경>은 양녕대군의 이야기이다. 우리 역사 속 무척 매력적인 인물임에 틀림없지만 그는 이미 연극, 영화, 드라마, 소설, 야담에 이르기까지 너무 많은 기회를 통해 소개되어 왔다. 너무 식상한 소재 아닐까? 그러나 이러한 단점에도 불구, 제9회 옥랑희곡상 심사위원단은 '이 작품으로 주목받을 극작가임을 증명한 셈'이라는 찬사와 함께 이 작품을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예심, 본심의 심사위원들은 이 작품에서 어떤 가치를 발견했을까. 양녕대군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든 전혀 모르든, 모두가 숨죽이고 지켜볼 전혀 새로운 양녕대군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연극<환장지경>은 사극이다. 하지만 우리들이 생각하는 그런 사극은 아니다. 우리가 그 동안 역사책을 읽으며 상상해 왔던 거침없는 마초남 태종, 건강을 해칠 정도로 책을 좋아하던 성군 세종, 주색을 일삼던 양녕대군은<환장지경>에 없다. 남들 앞에 서지도 못하는 겁쟁이 태종, 자신의 업적을 쌓기에 눈이 멀어 역사에 기록될 모습만 고민하는 세종, 앙녕의 귀양길에 따라간 구종수와 이오방, 동성애로 양녕에게 받은 무관심을 위로 받던 세자빈, 앙녕의 신분으로 위장하고 주색을 일삼으며 흥청망청 사는 이오방 등 홍석진 작가의 발칙한 상상력을 통해 우리들은 우리의 상상보다 더 흥미로운 인물들이 살고 있는 조선시대로 떠나게 된다. 권력을 향한 그들의 욕망과 그에 따른 사건들 속에서 시종일관 무거운 사극이 아니라, 작가의 상상력으로 만들어 낸 재미있는 사건들을 통해 곳곳에 숨어있는 웃음 포인트를 발견하면서 관객들은 퓨전사극의 재미를 만끽하게 될 것이다.

 

 

 

 

 

 

태종이 왕자의 난으로 왕권을 강탈한 폭군이 아니라 남들 앞에 나서지도 못하는 겁쟁이에 불과했다? 세종이 백성의 삶을 나아지게 하기위해 고민한 성군이 아니라 자신의 업적을 쌓는 일에만 집착하고 역사에 기록되는 모습만 고민했다? 구종수와 이오방이 처형당하지 않고 귀양길을 따라갔다면 어땠을까? 양녕의 무관심을 참다못한 세자빈이 동성애를? 주색잡기를 일삼았던 양녕이 사실은 양녕이 아니라면? 심지어 그 가짜 양녕이 전라도에 가서 춘향이를 만났다면! 끝없는 상상의 즐거움으로 전혀 새로운 인물과 이야기를 만나본다. 무대는 단지 한쪽면을 가득 메운 벽면 하나. 이 무대는 과거와 현재를, 현실과 환상을, 삶과 죽음을 거침없이 넘나든다.

 

 

 

 

  

 

작가의 글 - 홍석진
시작은 일종의 무모한 도전 같은 것이었습니다. 사극이라는 장르적 한계, '양녕대군' 이라는 식상한 소재 등에 대해 많은 분들이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하셨습니다. 하지만 안 된다고 하면 더 하고 싶어지는 괴이한 성격인지라 더욱 기를 쓰고 매달렸던 것 같습니다. 구상에서 완성까지 근 2년의 시간이 소요되었습니다. 매순간 <환장지경>에만 매달렸던 것은 아니지만 '양녕대군'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기 위해 꽤 많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던 중 양녕대군의 모습 속에서 희미하게나마 나의 모습을, 우리의 모습을 발견한 것이 큰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주어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교만해지기 쉽고, 실수를 연발하고는 후회하고 또 후회하며,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집착하는 우리의 모습을 말입니다. 어쩌면 인간은 실수의 동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실수를 하고 그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치 운명처럼 같은 실수를 반복하곤 합니다. 이것이 인간이란 존재를 규정하는 하나의 틀이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역사 속의 양녕대군은 자연스럽게 희석되어 갔고, 혼란한 정치적 상황 속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한 인간의 모습만이 오롯이 남았습니다. 어떤 작품이라고 사연이 없겠습니까마는 <환장지경>은 참으로 많은 사연을 간직한 작품입니다. 탈고하기까지도 긴 시간이 필요했지만 이후 공연에 이르기까지도 참 많은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제 미숙한 역량과 부덕함의 탓이었겠지만 한편으로는 혹시나 제목을 잘못 지은 탓은 아닐까 하는 허황된 생각을 품기도 했습니다. 크게 의식하진 못했지만 그만큼 공연화 되지 못한 '환장지경' 은 묵직한 추가 되어 가슴 속에 도사리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희곡은 독자적으로 완성된 가치를 지닌다는 신념을 갖고 있지만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했던 이번 공연을 맞이하는 심정은 장성한 아이를 뒤늦게 장가보내는 부모의 그것이 아닐까 감히 상상해 봅니다.


동국대학교 출강
제5회 신작희곡 페스티벌 당선/ 제9회 옥랑희곡상 당선
작 <두더지들> <뒤꼍에도 봄은 가고 여름은 오고> <환장지경>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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