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김지연 '살모사'

clint 2025. 4. 9. 06:34

 

 

뜨거운 땡볕
그 한가운데 고목처럼 앉아있는 그림자 
이빨로 끊은 파란 탯줄
노란 하늘! 노란 고름!
썩어 뭉그러진 자궁!
질긴 내 뿌리로 짠 거미줄
넌 엄마가 되어야 해!

가문 땅
자궁 무덤가에 핀 꽃 그늘
어미 거미줄에 걸린 개구리 나비,
퍼덕퍼덕 날개가 녹아 뱀이 되어 어미를 먹고
거울속 제 모습에 먹혀 버리다.
어미가 된 딸...부러진 날개짓...
엄마... 살려 줘....

축축하고 음습한 자궁속에 뱀 한마리
움틀.. 움틀...
차거운 눈으로 번뜩-
어미의 껍질을 열다.
붉은 허물이 겹겹이 쌓인다. 
차갑게 미끄러운 뱀 한마리 
스르룻 머리를 곧추 세운다.

 


할머니 - 엄마 - 딸을 이어내려오며
살모(殺母)하고 또 딸을 나으려는 딸.
나의 어미가 나에게 준 숱한 억압과 굴레와 관습들.
결코 뿌리칠 수 없었던 것은 아마도 그녀 역시 자기 삶을 
어미로 살아야했던 어찌 할 수 없는 희생물이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엄마처럼 살기는 싫어!
숱하게 거부하고 살아왔지만 
어느 순간 딸은 그 어미의 자리에 와 있고
이제 나의 딸은 맑은 눈을 들어 나를 본다.
왜 나는 엄마가 아냐? 엄마가 되고 싶어...
모든 걸 탯속에서 듣고 깨우쳤나...
어미와 나와 딸을 잇는 이 자기 동일시와 
자기부정의 끝없는 순환...
마치 뱀 같은 연극 살모사의 처절한 숙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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