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오래된 연인이 습관처럼 만난다.
남자는 이별을 꿈꾸며, 여자는 둘만의 아기를 꿈꾸며.
오늘, 둘의 만남은 처음부터 삐걱거린다.
남자는 사랑을 광기라 하는데 여자는 사랑을 축복이라 한다.
남자는 아기를 갖는 것은 죄악이라 말하지만 여자는 아기를 낳고 키우면서
우리의 삶이 다시 부활하는 거라 말한다.
둘의 대화가 계속될수록 모든 것이 어긋난다. 그래서 둘은 결국 헤어진다.
아니, 남자가 여자를 차버린다. 여자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지만
자신이 차였던 방식 그대로 그 사람을 차버린다.
그녀에게 차인 사람 역시 또 다른 이를 같은 방식으로 밀쳐낸다.
차고, 차이고, 차고, 차이고. 링링링링 - 돌고, 돌고, 돌아 다시 제자리.
반복되는 이별의 끝에서 그들은, 또 다른 ‘너’가 아닌 ‘나’ 자신을 만나게 된다.
암전 된 무대에 불이 켜지면 연인이 무대 중앙 의자에 앉는다. “우리가 언제 처음 만났더라?” 묻는 남자의 말에 대답하는 여자는 무표정이다. 절대 한 때 사랑 했던 두 사람 같지 않다. 추억을 이야기 하면서도 어긋나고 기억의 아귀가 맞지 않는다. 좋아한다는 고백을 하고 사귀자는 중대한 말을 한 때의 기억조차 엇갈린다. 언젠가는 그 두 사람을 이루었을 소중한 추억들은 얼굴을 화끈 거리게 하는 유치한 짓 취급을 받는다. 청문회 분위기로 ‘그런 기억 없습니다.’ 라고 뱉는 대사에 객석에서 웃음이 터진다. 심각한 대사, 진지한 얼굴 표정인데도 웃음이 터지는 것은 공감에서 비롯된 것일 게다. 무대 속 모습이 지난 날 나, 혹은 나에게 이별을 고하던 누군가와 겹쳐지는 그 순간, 씁쓸함이 밀려온다. “넌 아직도 내가 설레? 가슴이 뛰어? 내가 너에게 기쁨이 돼?" 그렇게 남자는 여자에게 묻는다. 심장을 찌르는 잔인한 말을 전하는 순간, 여자는 아파한다. 가슴 깊이 묻어 뒀던 아련한 아픔이 솟아오른다. 이별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누구나 겪었을 법한 이별을 담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이 무대만의 독특함은 진행 방식에 있다. 일반적으로 연극은 기승전결의 형태를 띤다. 시작이 있고, 전개가 있다. 진행 중 서서히 절정으로 치달아 결론을 맺는다. 그러나 연극 [링링링링]은 그렇지 않다. 똑같은 구조가 극 내에서 4번 반복된다. 네 명의 주인공들은 각각 2명씩 네 쌍의 연인이 되어 네 번의 이별을 겪는다. 모두 같은 대사와 상황 속에서다. 첫 무대에서 이별을 통보 받았던 여자는 다음 무대에서 연인에게 똑같은 순서와 대사로 또 이별을 전한다. 첫 번째 연인의 모든 대사가 두 번째에 겹쳐진다. 그 반복도 역시 일반적인 상식을 배신한다. 여자의 연인은 또 다른 여자다. 그 여자는 다른 남자에게, 마지막으로 그 남자는 처음 이별을 선언했던 남자와 연인이다. 결국 첫 번째 질문은 다시 그에게로 돌아왔다.. “넌 아직도 내가 설레?” 여성과 여성, 남성과 남성이 연인이 되면서 성적인 면은 잊혀간다. 다만, 살아가면서 생성했던 수많은 관계가 시작되고 깨지는 삶의 순환이 각인 된다. 네 번쯤 똑같은 대사가 반복되면 지루할 법도 하지만 결코 같지만은 않다. 일률적인 상황 속에서도 배우의 톤과, 억양과 중간 단어 하나하나의 변화에 따라 느낌이 다르다. 이 미묘함을 즐기는 것도 이 연극 속의 또 하나의 재미다. 이별을 전하는 대사를 들었던 이가, 똑같은 말을 다른 이에게 하면서 천연덕스럽게 “어디서 들어본 말 같은데”라고 한 마디 더하는 순간의 웃음이 나오는 식이다. “아이 갖고 싶어” 라는 대사도 커플의 구성이 남남이냐, 여여 커플이냐에 따라 달라진다. 여성이 혹은 남성이 뱉느냐에 따라 확연히 느껴지는 차이가 네 번의 반복을 견디게 한다. 배우의 조합이 달라짐에 따라 네 커플은 모두 다른 이별을 겪는 듯 보이기도 한다. 결국 만나고 열렬함에 불탈 듯하다 이내 식어버리는 것이 사랑의 과정이고, 이별의 시나리오도 동일하다 해도 그 과정 속에 있는 사람마다 제각각의 이별인 것처럼 말이다.
제목에서 네 번이나 반복되는 ‘링’이라는 단어는 이중의 의미를 갖고 있다.
하나는 연인의 손 위에서 똑같은 모습으로 빛나면서 서로를 묶어주는
연결 고리 역할의 ‘반지’다. 이 작품은 네 번의 이별을 통해 언제 끼워졌다가
이내 버려지는 커플링처럼 반복 되는 이별을 담았다.
또 하나의 ‘링’의 의미는 ‘울리다’라는 뜻이다.
상처를 준 사람은 또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고, 이별의 끝이 다시 만남이 된다.
돌고 도는 연극의 구성은 삶의 한 자락이 다시 어딘가에 이어지는
삶의 순환 고리를 보이며 관객의 마음을 울린다.
이 작품은 똑같은 방식으로 만나고 헤어지는 연인 네 쌍의 이야기를 반복하면서
‘모든 것이 돌고 도는 순환구조 속에 있다’는 주제를 풀어낸 독특한 작품.
장면 1에서 A가 애인 B를 차고, 장면 2에서 B가 그 방식 그대로 C를 차버린다.
이렇게 같은 이야기가 반복되다 결국 장면 4에서는 첫 장면에 등장했던
A가 자신이 찼던 방식 그대로 버림받는다.
작가는 “‘80년 전에는 그것이 나였는데, 80년 후에는 내가 그것이네’라는 한시 한 구절을 접하고 이 작품을 쓰게 됐다”며 “극중 인물들은 만남과 헤어짐의 연쇄고리를 더듬어 올라가다가 결국 끄트머리에서 자기 자신과 조우하게 된다.”고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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