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어느 벽촌 마을, 이씨 문중의 종가.
집주인이자 13대 종손인 이 노인과 그의 부인 심씨, 두 아들 상만, 상석 내외,
그리고 죽은 형의 아이들까지 3대가 함께 지내고 있다.
양반 가문이라는 허울 좋은 껍데기만 남은 채 집안의 빚은 쌓여만 가고,
가문은 점점 더 쇠락해 간다. 상석은 아내인 정숙의 반대를 뒤로 한 채
의기양양하게 축산조합장 선거에 나서지만 낙선하게 되고,
설상가상 이 노인마저 세상을 떠나게 된다.
해결되지 않는 절망적인 상황만 계속되던 어느 날,
이 노인의 49재에서 정숙이 모두의 앞에 나선다.
“저한테 맡겨 주시겠습니까?”라는 한 마디를 시작으로,
그녀는 이제 모든 것을 바꾸기 시작하는데...
실존하는 여성인물을 새마을운동의 주체로 설정한 작품이며, 여성은 공동체 의식을 적극적으로 체현한 소통적 몸으로 재현되었다. 인텔리 여성이 농촌으로 시집 와서 집안을 일으키는 이야기가 주된 내용이다. 정숙은 소문과 달리 빚더미에 앉은 시댁의 상황과 남편의 재취자리로 온 사실을 알게 된 후 사기결혼을 당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양반 댁 며느리로 시집간 이상 죽으러 가는 길이니 다시 돌아오지 말라”는 부모의 명령을 거역하지 못한다. 현재 시댁의 남성구성원들은 육체적 결함이 있거나 사망했거나 타지에 나가 있어서 집안을 세울 건강한 남성이 부재중인 상황이다. 그 역할을 억척스럽게 해나가는 정숙의 관계 지향적인 몸이 작품에서 긍정적으로 부각되었다. 시부모는 체면을 따지느라 그간 빚을 내서 제사를 지내왔다. 사고로 시부가 죽은 후에도 49재로 탈상하자는 정숙과 3년 상을 지내자는 시어머니 심씨 사이에 갈등이 발생한다. 집안 형편을 봐서 번거로운 구습을 고치는 게 현명하다는 정숙에게 심씨는 분노를 표출하지만, 정숙은 집안일을 자신에게 맡겨달라고 부탁한다.
그 4개월 후 늦가을. 집안에 돼지우리가 들어섰고 마당 한 구석에는 가마니 짜는 연장과 짚단이 널려 있다. 전보다 훨씬 생기가 돈다는 작가의 지문에서 알 수 있듯 4개월 사이에 정숙으로 인해 변화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곧이어 정숙이 남자 작업복 차림에 작업 모자를 쓰고 돼지 밥통을 들고 무대에 등장한다. 그녀는 혼자만 잘 사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공동체의 화합이 중요하다며 마을 주민들에게 공동사육을 제안한다. 결국 이들은 정숙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마을에도 긍정적인 변화가 찾아오는 것이다. 정숙은 마을 사람들의 현실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집안 남성들의 의식을 변화시키는 역할까지 담당하고 있다. 정숙이 마을회의에서 공동체 의식을 강조하고 마을 주민의 힘으로만 다리를 놓자는 의견을 내놓은 후 남편에게 제지당한다. 이에 정숙은 흥분해 죄송하다며 그에게 용서를 구하는 반응을 보인다. 하지만 마을 주민들이 정숙의 의견에 동조하자 남편은 급작스럽게 태도를 전환해 정숙을 칭찬하고, 이에 정숙이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막이 내린다. 집안의 재산을 탕진한 원인은 남편의 선거 욕심에서 비롯된 일이고 가부장적 제도인 제사를 지키려는 남성들의 욕망에서 빚을 낸 상황임에도 여성에게는 그들이 벌인 일을 수습하는 역할이 주어졌다. 그럼에도 남편의 인정을 받고서야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정숙은 결국 남성 중심의 권력과 공동체를 재건하는 임무를 완수한 것으로 이해된다. 집안을 이어갈 위치에 종손인 환을 세우는 것도 정숙의 일이었다. 이렇게 정숙은 권력관계의 작동에 의한 강요된 희생으로 공동체를 이끄는 주역으로 존재한다.
작가 차범석이 경상북도 월성군 안강읍 옥산마을에서 직접 만난 현존인물이다.
이 여인은 이른바 새마을운동의 기수로서 각광을 받은 인물이지만
작가는 여인의 전기에 집착하지 않고 농촌과 한국 여성의 아픔을 되새기며 미래로 향하는 세계를 그렸다.
1985년 제3회 전국지방연극제에서 경북 포항 극단 은하극장의「대지의 딸」(김삼일연출)이 최우수상을 받았다.
작가의 글 - 차범석
희곡 「대지의 딸」은 나의 구작「활화산」을 부분 개작한 작품이다. 「활화산」은 1975년 국립극단에 의해 상연되었고 그 후 전국 16개도시를 순회공 연되었던 작품이고 보면 꼭 10년만에 개작하여 선을 보이게 된 셈이며, 10년전의 상황과 오늘의 우리 주변사이에 얼마만의 변화가 일어났던 가하고 막연한 감회에 젖기도 한다. 지난 겨울 銀河劇場의 대표이자 연출가인 김삼일씨로부터 다음 지방연극제에 「활화산」으로 참가하고 싶다는 얘기를 듣고 나는 우선 여러가지로 어려운 점이 있지 않겠는가라고 말했다. 첫째는 작품의 외적규모가 큰 데다가 등장인물 수효만도 4, 50명이나 되고, 작품내용이 그 당시의 새마을 여성지도자로서 각광받았던 실존인물이라서 관객의 공감대가 형성이 될지 의문이라는게 나의 의견이었다. 그러나 그는 의견이 달랐다. 즉 「銀河劇場」은 “우리 지역사회와 관련있는 작품을 가지고 오늘의 관객과 만나고 싶습니다. 고도의 문학성이나 예술성도 중요하겠지만 우리의 현실을 관객과 함께 생각해보며 내일을 위하여 살아가는 슬기와 용기를 심어주고 싶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바로 포항 근교에 있는 안강마을이 무대이고, 경상도 사투리이고, 극의 내용이 오늘의 농촌실정과 꼭 들어맞는다고 생각했기에 힘은 모자라지만 한번 도전하자고 모두 합의를 보았습니다."라고 역설했다. 그래서 나는 이 작품의 부분 개작을 구상했고 그 작품을 극단측에 넘겨준 셈이다.
나는 지방연극이 꼭 계몽주의 연극이라야 한다는 고집은 안한다. 어떤 사람은 연극이면 연극이지 중앙연극이다, 지방연극이다 하고 분리시키는 자체가 넌센스라고 주장한다. 백번 옳은 말이다. (....) 지방연극이 중앙연극과 대립하거나 경쟁하는게 아니라 연극 수준이 언젠가는 그렇게 평준화 되기를 바라는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그런 점에서 포항의 「은하극장」이 오래전부터 그런 겸손한 자세로 연극운동을 전개해나왔던 사실을 알고 있 기 때문에 「대지의 딸」을 공연토록 협조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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