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록 뮤지컬 '장보고, 열리는 바다'

clint 2024. 3. 4. 08:00

 

 


막이 오르면 청해진에서 끌려온 백성들이 장보고 장군의 제례를 지내고 있다. 

「제례」 역사의 현장을 찾아 나선 여교수와 학생들은 이곳에서부터 

묻힌 역사를 찾아내기 시작한다.「역사란 무엇일까」 바람과 함께 

여교수팀과 교감하는 백제유민들의 한맺힌 소리들이 들린다. 

유민들은 청해진 이 폐허가 된 후 이곳 김제땅에 끌려와 노역에 시달리며 

살아가고 있다. 「바다가 그리운 사람들」 교수팀은 장보고 장군을 추적하여 

산동성 신라방으로 출발한다.
당나라 무령군 소장직에 오른 장보고와 정년은 신라방 적산에 법화원을 세우고 

무역으로 해양왕이 된다. 당나라 조정에 갔던 신라의 김양과 염장은 귀국길에 

장보고를 만나 신라를 위해 일해줄 것을 권한다. 

임금의 친서가 내린다면 장보고는 귀국할 것을 결심한다.
귀국에 앞서 장보고는 예불을 올리고 부처님의 은덕으로 꿈에 그리던

조국으로 돌아가 바다를 열겠다는 다짐을 한다.

 

 

이내 장보고는 쫓기듯 도망쳐온 청년시절의 회상으로 빠진다.
탐진 천태사 경내에서 장보고와 정년은 스승에게 꾸지람을 듣는다.

그들은 백제유민의 설움을 토로한다. 스승은 그들에게 넓은 세상을 배우게

하기 위해 당나라로 보낸다. 장보고는 버들아기와의 이별을 아쉬워하며

탐진나루를 떠난다. 이때 정년이 들어오며 장보고의 회상을 깬다. 

정년은 신라는 우리의 조국이 아니니 산동에 남으려하고 장보고는 

신라, 백제가 아니라 민족의 땅으로 돌아가자고 정년을 설득한다. 

 


신라 홍덕왕은 장보고의 귀국을 환영한다. 홍덕왕은 장보고에게 병부를 맡기려 하나 

장보고는 바다로 보내주면 그곳에서 바다를 지키겠다고 한다. 조정 중신들은

장보고를 조정에 두지 않기 위해 장보고의 뜻대로 해줄 것을 임금께 고한다. 
청해진의 역사가 한창이다. 장보고는 바다가 열리는 감회에 젖는다.

이때 버들아기가 찾아오고 그들은 상봉한다.

청해진 사람들의 축복 속에 그들은 혼례를 올린다. 
세월은 흘러 장보고의 영향력은 일본, 당나라는 물론 서역에까지 미치고

그야말로 해양의 왕자가 되는데 산동성에 남아있던 정년은 무령군이 해체되면서

걸인이 되어 장보고의 곁으로 돌아온다.

 

 

한편 신라 조정은 홍덕왕이 죽고 권력암투가 시작된다. 

청해진으로 피신 온 김우징, 김양, 염장은 장보고에게 도적의 무리를 쳐부수어 

줄 것을 부탁하고 장보고는 정년에게 군사를 주어 서라벌을 공격케 한다. 
염장은 장보고 대사가 직접 나서야 일등공신이 될 것이라며 부추키나

장보고는 불의를 정의가 물리침이 자신의 보람이라며 진군케 한다. 
김우징은 신무왕이 되나 병으로 죽고 경응태자가 문성왕에 오른다.

문성왕은 장보고대사의 딸과의 혼사를 추진하나 중신들의 반대에 부딪힌다. 
조정 대신들은 장보고 대사의 세력이 확장될 것을 두려워한다. 
교수팀은 자신들이 파헤친 장보고의 삶이 여지껏 전해져 내려온 것과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 그의 마지막을 지켜보기로 한다. 

 



염장은 장보고를 찾아와 이 궁벽한 바다에 있지 말고 조정으로 나가 천하를 잡으면 

자신이 돕겠다고 하나 장보고는 이를 거절한다. 장보고는 나의 천하는 용상이 아니라 

바다임을 얘기할 때 염장은 뒤에서 장보고를 칼로 찌른다. 
장보고는 죽고 청해진은 불길에 싸인다. 
제례를 지내는 백성들 앞에 장보고의 환영이 나타난다.

"억울하게 죽음이, 역사에서 지워짐이 서러운 것이 아니라 비다를 지키지 못함이니

후손들이여 바다를 열고 오대양 육대주로 나가야 한다"

이를 본 백성들은 장보고 장군의 뜻을 받들어,

닫힌 바다를 열고 보다 큰 세계를 향하여 나갈 것을 다짐한다. 

 


"이 지구상에 수없이 많은 국가와 민족이 일어섰다. 사라져갔으나 지금까지 가장 오랫동안 한 언어와 문화권, 국민, 그리고 비슷한 규모의 국경을 보존해온 나라는 아마도 중국과 한국뿐일 것이다. 신라 이후 한국은 오늘날에도 민족과 국가의 동질성을 유지하고 있는데 오늘날 유럽계 국가에서는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이는 주일대사를 지낸 바 있는 미국 하버드대학의 에드윈 오라이샤워(Edwin O. Reishauer)교수가 쓴 '엔닌의 당 중국여행기(1995))라는 책 가운데의 ‘중국에서의 한국인' 편에 나오는 머리글이다. 엔이라는 일본 승려가 중국을 불교 수 업차 여행하였던 9세기의 신라인들은 동양 3국중 가장 조선술이 뛰어났고 항해술이 발달하여 황해와 동지나 그리고 대한해협의 해상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것 은 실로 장보고(AD-841)라는 걸출한 인물이 신라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장보고는 한국의 남단 완도 청해진에 근거를 두고 황하와 중국해 및 동해의 해상경영권을 장악하여 라이샤의 교수의 표현 그대로 명실공히 '해양상업제국의 무역 왕 (The Trade Prince of Maritirne Commercial Empire) 으로 군림하였다. 중국과 한국, 일본의 바다를 자기집 안마당처럼 신라인들의 일터로 가꾸고 나아가 서 중국 산동반도 일부와 대운하 일대 및 한반도 남부지방을 마치 오늘날의 자치 지역처럼 독자적으로 다스렸다. 지금으로 보면 최초로 동양세계의 해상권을 지배한 막강한 해군력을 과시하였고, 최근 세계적으로 눈부시게 뻗어 나가는 우리나라 의 해운사업과 국제무역을 맨처음 개척한 것이다.
불세출의 영웅 장보고 대사의 행적은 대한민국 해양경영사의 시작이며 대륙경영사의 축소판이다. 그가 다스린 중국 산동반도 하남성, 강소성, 절강성 인내의 신라방과 신라인촌은 고대로부터 고구려, 백제, 신라에 이르기까지 우리 선조들이 웅거, 활약하였던 생활영역이었다.

 

 


장보고 장군의 생애와 당시 신라인들의 중국대륙에서의 활약상은 우리나라의 기록보다 오히려 중국 및 일본 역사서와 외국인들의 연구에 의해 더 잘 보존되고 있다. 중국측 기록으로는 정사의 하나인 <신당서 제220권 동이전'과 '신라전'>에 관련 기사가 실려있는데 이는 당나라 시인 두목(AD803-852)이 지은 <번천문집 제6권>의 '장보고 정년전'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중국에서는 시인 '두보'에 비견된다고 하여 '소두' 라고 불리던 '두목' 시인이 장보고의 전기를 지어 후세에 전할만큼 위대한 인물이었다. 일본측 기록으로는 어렵사리 중국에 건너가 장보고 장군과 중국내 신하들의 절대적인 도움을 받아 불교수업을 마치고 9년만에 귀국한 승려 엔닌의 기행문인 <입당구법순례행기(唐求法巡使行記)>와 일본 정사인 <일본후기>, <속 일본후기>에 장보고에 관한 기사가 자세히 실려있다. 한국측 기록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비교적 간략하게 소개되고 있는데 상당 부분이 앞서 소개한 중국의 기록을 재인용한 것이다. 이렇듯 그 이름이 동양세계사에 널리 떨치고 동양 3국의 정사에 두루 기록된 국제적 인물은 장보고 대사 말고는 전무후무하다. 당시 세계는 동양세계와 서양세계로 양분되다시피 상호간에 교통이 불편했고, 서양세계는 해적 바이킹족의 출몰로 전전긍긍했던 사실에 비추어볼 때, 장보고 대사는 세계사에 가장 자랑스럽게 내세울 수 있는 현대적 의미의 국제 해양인이라 말할 수 있다. 

 

 

 

 

아무튼 장보고 대사는 어렸을 적부터 활을 잘 쏘고 창을 대단히 잘 썼는데 그 때문인지 주로 궁복 또는 궁파라 불리었 다. 고향이 현재의 전남 완도로 추정되는 심사람이다보니 수 영과 자백질도 아주 잘했고 소년시절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장사였다. 의리와 정의감이 깊고 도량이 한없이 넓어 국내외에서 존경하며 따르는 이가 많았다. 궁복은 소년시실 당나라에 건너가 마침내 지금의 강소성 땅에서 당나라의 군관 벼슬인 무령군 군중소장의 직에까지 올라갔다. 서주는 산동성과 인접해있는 지형으로서 그 일대에 이정기가 이끄는 고구려 유방민들이 많이 살았었다. 그 당시 신라는 왕조 쇠퇴기의 말기적 현상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로 인해 신라 본국은 정작 왕권의 통제 질서가 문란하여 신라 근처에 해적이 횡행하였고 언해안 백성들은 자주 약탈당하고 있었다. 심지어 중국 일부지방에서는 신라인을 납치해와 당인의 노예로 거래하는 안타까운 현상이 공공연히 벌어지고 있었다. 이같이 잦은 해적의 출몰과 인신의 약탈매매는 인도적으로 도저히 방치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당시 신라정부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적들의 노략질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이에 분격한 장보고는 828년 무령군중 소장 직을 그만두고 귀국하여 청해진에 본거지를 설치한 다음 본격적인 해적소탕과 해양 개척에 발벗고 나섰다. 장보고는 신라와 당나라 및 일본의 3각 무역을 개척하는데 심혈을 쏟았으며 남쪽 중국과 북쪽 중국, 나아가서 당시의 당나라의 수도 장안을 잇는 내륙무역과 해상교통권을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신라방이나 신라인이 중국내의 주요 교통요충지에 크게 번지나갔고 일본 태부와 당-신라-일본을 잇는 3각교역을 강화하는 한편, 승리, 유학생 관료들의 당나라 왕래(해상여행)에 갖가지 편의를 제공하였다. 나중에 장보고는 당시 잦은 전쟁으로 혼미에 빠졌던 신라조정의 왕권투쟁에 까지 관여하였다. 신라 흥덕왕 사후 왕위계승전에서 희강왕 일파에게 패한 시중 벼슬의 왕족 김우징과 무주현 전라도 광주도독이었던 김양 등이 청혜진으로 정적을 피해 몸을 의탁했다. 김우징의 정적 김명이 그 후 신라의 수도인 서라벌을 무도하게 찬탈했다는 소식을 듣고 장보고에게 도움을 청하자 그는 친구 정년에게 군사 5천을 주어 수도 경주로 쳐들어가 김명과 민애왕 일파를 격파하고 김우징이 신무왕에 즉위토록 하였다. 그러나 지방의 독자적인 자치정권이나 다름 없었던 장보고 세력은 궁극적으로 신라 조정과 병존할 수 없 었다. 김우징(신무왕)이 청해진에 의탁하고 있을 때 이루어 진 것으로 보이는 장보고의 딸을 문성왕의 차비(며느리)로 삼기로 했던 약속이 파기된 사건을 계기로 장보고는 신라 조정에서 파견한 염장이라는 그의 옛 친구에 의해 꿈 많은 인생을 허망하게 마치게 된다(811). 그리고 문성왕 13년(851)에는 마침내 청해진이 폐쇄되고 그를 따르던 일부 부하 장병과 주민들은 중국 또는 일본으로 도주하였다. 남아있던 대부분의 주민들은 내륙평야지 벽골군(오늘날의 김제지방)으로 강제이주 당하였다. 이로써 20여 년간 국제항 청해진에 본거지를 두고 동양 3국의 바다를 호령하던 장보고의 해상왕국은 소멸되고 정해진은 폐허가 됐다. 신라는 그 이후 장보고 시절의 화려했던 해양경영권을 영원히 되찾지 못한채 몰락의 길을 재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