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신파’(김명화 작·임영웅 연출)는 무대에서 퇴장한 배우들의 뒷모습뿐만 아니라 연출가, 기획자, 평론가 등 무대 밖 연극인들의 삶을 사실적으로 다룬, 일종의 자화상 같은 작품이다. 관객들은 이 역시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연극’이란 걸 알면서도 금단의 세상을 엿보는 듯한 묘한 호기심으로 무대를 바라보게 된다. 무대는 대학로 후미진 골목길에 위치한 낡은 카페 ‘신파’. 맘씨 좋은 마담이 연극인들의 후원자 노릇을 자처한 덕에 곧 문을 닫게 된 이곳에 연극인들이 하나 둘씩 몰려들면서 극이 전개된다. 이들이 농담처럼, 푸념처럼 털어놓는 얘기들은 연극을 향한 듯하지만 결국엔 삶을 겨냥하고 있다. 과거에 연기했던 인물들이 들락날락해 자꾸 대사를 씹는다는 중견 배우, 어떻게 사람들이 다 주인공 역만 맡느냐며 중요한 건 연극이라고 주장하는 후배 배우, 배우가 성스러운 존재인 줄 알았는데 한물 간 퇴기 같다고 하소연하는 여배우의 모습에선 누구나 경험하는 인생의 쓸쓸한 단면이 느껴진다. 연극계 전반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도 담겨 있다. 돌발적이고 충격적인 내용을 선호하는 관객, 지원금이 없으면 공연을 무대에 올리지 않는 기획자 등. 하지만 결국 이 연극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갈수록 힘들어지는 현실에서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연극에 대한 애정이다. 마지막까지 무대를 지키는 배우 지망생은 그런 희망의 상징이다. 뚜렷한 사건 전개 없이 12명의 등장인물들에게 골고루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는 것이 또 다른 이 극의 특성이다.
카페에서 연극쟁이들이 나누는 하룻밤 이야기를 그린 이 작품에서는 체호프의 ‘갈매기’처럼 배우 모두가 카페 탁자에 나누어 앉아 균등하게 조명을 받는다. 평생 조역배우, 캐스팅이 잘 안 되는 여배우, 관객 안 드는 작품만 쓰는 극작가, 지원금이 없으면 공연을 올리지 않는 기획자,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연극평론가, 유명 연출가 등. 별다른 주인공도 줄거리도 없다.
이들은 술잔을 기울이며 각자의 삶의 무게를 한마디씩 툭툭 던질 뿐이다. 연극에 대한 얼치기 열정보다는 삶의 피로, 연극 ‘사회’에서의 권력관계도 묻어난다. “난 배우가 성스러운 존재인 줄 알았어. 근데 한물간 퇴기 기생 같아요. 술자리 흥이나 맞춰주면서 누가 날 불러주지 않을까, 간택당하는 인생이 너무 피곤해요”라는 여배우의 한탄도 있다. 연극쟁이들도 늘 셰익스피어 대사를 읊조리지만은 않는다. ‘카페 신파’에서 이들이 늘어놓는 시답잖은 잡담은 지극히 사실적이라서 관객들에게 다소 상식적인 이야기로 보여지기도 한다. 반면 우리네 인간사의 쓸쓸한 단면을 보여줌으로써 이곳 연극동네는 ‘예외’적 풍경이 아니라 ‘현실’의 거울이 되기도 한다.
작가의 글 - 김명화
<카페 신파>는 신파라는 카페 공간에서 벌어지는 연극인들의 일상을 다룬 작품이다. 〈돐-날〉에서 시도된 극 사실을 조금 더 발전시켜, 막과 시간의 변화 없이 한 장소 안에서 작품을 진행하였다. <돐-날>이 입센처럼 갈등에 충실하였다면, 이 작품은 다소 감상적인 체홉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사람들의 인생에 대한 비애와 예술가의 혼란, 사랑과 어긋남을 카페라는 시시한 일상의 공간을 프리즘 삼아 그려보고 싶었다. 마침 연출을 맡으신 임영웅 선생은 한평생 연극을 하신 분이셔서, 연극인들의 애환을 과장 없이 담담하게 그려주셨다. 문제는 관객이었다. 관객이 들지 않아 고생하는 연극인들의 비애를 다룬 작품의 심술 탓인지, 눈물 날정도로 관객이 와주지 않았다. 덕분에 오지 않는 관객을 기다리면서, 나는 진심으로 연극 만들기의 비애에 젖어 연출 선생님이 권하시는 모든 술을 받아마셨고 한 달 내내 취해있었다.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늦은 술자리를 파하고 산울림 소극장의 가을 은행나무 아래서 내게 손을 흔들어주시던 임 선생님의 쓸쓸한 모습이 생각난다.
그런데 카페라는 한 장소에서 일상적인 말을 주고받으며 연극이 전개되는 통에, 나는 독창성을 의심받는 한두 가지 지적을 평론가들로부터 받기도 하였다. 가령 일본의 일상 극을 대표하는 히라타 오리자와 함께 <강 건너 저편에>를 공동집필한 것 때문에 그의 영향을 받았으리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하였고 이 공연이 있기 전에 먼저 공연된 아일랜드 희곡 <거기>도 카페라는 한 공간에서 전개되는 작품이어서 그 유시성이 짧게 지적된 바 있다. 이제 시간이 지났으니, 그에 대한 답변을 해도 괜찮을 듯싶다. 조금 나를 옹호하자면, 이 작품은 쓰자마자 발표된 것이 아니다. 2002년 봄에 제안을 받고 가을에 임영웅선생님께 드렸지만, 선생의 사정으로 공연이 2004년에 이루어지게 되었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거기>는 2002년 가을 공연되었으니 내가 그 작품을 베낄 가능성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나도 그 공연을 보면서 비록 진행되는 내용은 다르더라도 똑같은 컨셉의 공연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가슴 한 쪽이 서늘했던 기억은 있다- 그것이 동시대성일 것이다. 작품은 작가의 소산이지만, 모든 작가들은 시대의 소산이고 비록 질감은 다르지만 유사한 욕망과 컨셉을 가진 작품들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반면에 히라타 오리자의 경우는 무의식적인 영향을 받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비록 인터넷상으로 대본을 주고받으며 작업한 경우였지만, 나는 오리자와 함께 한편의 작품을 쓰면서 그가 추구하는 일상성을 점검할 기회를 가졌었다. 그러나 동시적으로 말을 주고받거나 연극의 시작이 없는 점 등 몇 가지 기법을 흥미 있게 관찰했지만, 궁극적으로 내가 추구하는 일상성하고는 다르다는 결론에 도달했던 것 같다. 가령 이런 인식이었다. 일상성이란 삶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일본적 일상은 내게 의미가 없다는 것, 조용하게 말하고 타인을 배려하고 상황에 맞게끔 말하는 방식이 정립된 일본과 달리, 한국적 일상은 느닷없고 역동적이고 자기중심적이지 않은가. 내가 일상성을 무대에 끌어들인다면 한국적 일상에 대한 관찰이 필요하겠구나 하는 인식에 오히려 도달하였다. 나로서는 <거기>와 마찬가지로 일상/극사실에 관심의 눈을 돌린 동시대적 연극의 경향으로 해석하고 싶지만, 그 평론가의 지적처럼 근접한 시기에 함께 작업한 탓에 무의식적인 영향을 한두 가지 받았을지도 모르겠다. 한 가지 더 추가하자면, <카페 신파>는 일상극/극사실의 범주에도 속할 수 있지만 메타극의 범주에도 포함된다는 지적을 하고 싶다. <돐_날>에서 극단적 재현을 통해 재현을 깨고 소외를 유발한 것처럼, 나는 <카페 신파> 역시 극사실을 추구하면서 사실은 진행 되는 모든 내용이 픽션이라는 메타적 설정을 통해 재현을 넘어서고 싶었다. 사실 나는 온전히 극사실/일상성에 매혹된 작가가 아니다. 그저 진행되는 연극에 대한 문제의식으로부터 달리 나아갈 수 있는 방향을 소박하게 모색했을 뿐이다. 아마 앞으로 유사한 시도를 한두 번 정도 더 하겠지만, 나는 또 그 과정을 떠나 새로운 지평을 모색할 것이다. 살아있는 동안, 창작을 하는 동안 내내 그러고 싶다. 가능하다던 치열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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