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김병균 '블라인드'

clint 2023. 5. 19. 19:19

 

지하 속 밀폐된 금고 안. 시간대를 종잡을 수 없는 그곳에 6명의 등장인물이 갇혀 있다. 모두가 정신을 잃은 상태. 그들은 의자에 손발이 묶인 채 입에 재갈이 물려 있고 눈은 안대로 가려 있다. 유일하게 아무런 결박없이 정신을 잃은 채 무대중앙에 누워있는 이수진의 모습. 시간이 흘러 차츰 정신을 차리다가 자신들이 결박된 상황임을 감지한 등장인물들. 거친 호흡과 함께 내뱉으며 몸부림을 친다. 정신을 차린 이수진은 이 낯설고 기괴한 광경에 놀라 허겁지겁 일어선다. 밖으로 통하는 문을 찾는다. 하지만 육중한 금고문은 꼼짝하지 않는다. 그녀는 묶인 이들의 결박을 푼다. 모두의 결박이 풀리자 그들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금고문을 향해 달린다. 필사적으로 문을 열어보려 애쓰지만 이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깨닫는다. 절망 속에서 누군가가 말한다. 밖에서 열어주지 않는 한 이 곳에서의 탈출은 불가능하다. 왜냐? 자신이 이 공간을 설계할 때부터 그렇게 만들라고 지시를 했기 때문. 마치 철옹성과도 같은 비밀금고 안에 그들은 갇혀 있는 것이다. 그를 제외한 다른 이들은 그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어떤 불순한 계획 속에 자신들을 가둬둔 게 아닐까? 최소한 자신의 탈출을 위해 비밀 열쇠 같은 것을 따로 숨겨두었을지도 모른다. 그에 대한 강제적인 몸수색. 하지만 끝내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다. 순간 이게 뭐지? 이게 왜 여기에...." 누군가의 속삭임. 모두가 그를 주시한다. 그는 주머니에서 찾은 소형 리모콘을 들고 있다. 자기 게 아니라고 강변하는 그를 모두가 의심한다. 일단은 리모콘을 작동시켜 보자는 한 무리. 함부로 작동시켰다간 더 위험한 상황이 올 수도 있다고 만류하는 한 무리. 결국 리모콘을 작동시켜 보기로 한다! 불쾌한 기계음이 들려온다. 메시지다. 여기 갇힌 모두는 죄의 경중을 떠나 모두 죄인으로 선고받은 자들이다. 자신이 인정하든 그렇지 않든 ..... 이제부터 당신들은 스스로 누군가의 검사가 되고 변호사가 되고 배심원이 되어 그리고 단 한 명만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다. 이 중에 가장 죄가 없는 자. . 남은 시간은 60. 서로의 죄를 묻고, 변론하고, 판결하여. 이곳을 탈출할 수 있는 단 한 명의 피의자를 선택할 수 있다. 자, 이제 “GAME START!"

 

 

이 작품은 2020년경을 배경으로 실제 일어났던 사건을 바탕으로 연극적 상상력으로 가공하여 만들어낸 것이다. 허구적인 상황에서 누군가 사회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이런 납치극을 꾸밀 수도 있겠다 싶기에 흥미롭게 읽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유검무죄 무검유죄'를 더해서 자기편의 범죄에 한없이 자비롭고, 빈부격차와 권력 격차가 갈수록 커지는 대한민국의 현실을 독특한 설정으로 반영한 이야기로 보였다. 연극 판 <오징어 게임> 같다.

 

 

작품 <블라인드>의 줄거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밀폐된 공간에 여섯 명의 인물이 감금되어 있다. 이들은 묶이고, 종이봉투로 머리가 가려진 채 버둥거리고 있다. 영문도 모른 채 잡혀온 사람들은 기자, 연예기획사 대표, 전직 경찰, 유기견 보호단체 대표, 목사, 기업 3세 대표이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죄인인데, 가장 죄가 가벼운 단 한 명만 빠져나갈 수 있고, 그 사람을 선택하는데 주어진 시간은 60분이라는 휴대전화 문자를 받는다. 이들은 살아남을 단 한 명을 선택하기 위해 스스로 검사와 변호사, 배심원이 되어 서로의 죄를 묻고, 변론한 후 판결해 보라고 주문받았기에 살기 위해 격렬하게 논쟁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논쟁 과정에서 자신들의 주장과는 달리 각자의 흉악한 범죄 사실이 하나씩 드러 난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범죄를 저질렀다. 먼저 연예기획사 대표는 전직 아이돌 가수인데, 음주운전 뺑소니 사망 사건을 일으켰으며, 각종 탈법과 불법사건 사고로 연예 기사의 중심에 있는 인물이다. 연예인 성접대, 약물투약, 불법 동영상 배포 등의 어휘를 읽다 보니 2019년 자살한 장00 배우가 떠올랐다. 둘째, 목사는 교회 전도사 시절 교회청년부 여성 관련한 그루밍 사건으로 대서특필된 인물이다. 미성년 신도들을 대상으로 그루밍 성폭력을 일삼았기 때문이다. 셋째, 유기견 보호단체 대표는 '구조 천사'라는 별명과 달리 유기견 안락사 폭로사건을 통해 개백정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꼬리치며 달려드는 사랑스러운 강아지의 눈동자를 보면서 그 심장에 죽음의 주사를 꽂아 놓은 사람이다. 넷째, 기자는 정론 직필과는 관련이 없는 인물로 가짜뉴스를 만들고, 그런 글을 퍼나른 일을 했다. 그는 가짜 기사 한 줄로 유가족 가슴에 대못을 박고, 멀쩡한 사람이 투신자살하게 했다. 다섯째, 전직 경찰은 연예인 지망생 자살사건을 단순 자살사건으로 둔갑시키려다 강남클럽 경찰 유착 비리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처벌받은 인물이다. 여섯째, 기업 3세 대표는 노동자의 안전을 신경 쓰지 않았고, 그로 인해 사망한 사원의 유가족에게 몹쓸 짓을 하였다. 이 인물 가운데 과연 누가 살아남았을까?

 

 

이 작품은 그 결말을 독자 스스로 판단하도록 하였기에, 결말을 열어 놓았다<블라인드>는 겉은 화려하지만, 속은 보잘것없는 우리의 현재 모습을 추리소설과 같은 구성을 활용하여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 작품은 한 공간에서 짧은 시간에 여러 인물이 서로 갈등하는 모 습을 보여주기에 연극무대에서 표현하는 데 어울린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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