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김창만 '북경의 밤'

clint 2023. 5. 16. 20:43

 

김창만의 희곡 <북경의 밤>은 북경 감옥에서 일제의 간악한 고문과 회유 끝에 순국한 항일투사의 실화를 극화한 작품으로, 연안의 태항산 조선의용군 진영에서 초연된 후 항일투쟁 의지를 고취시키려는 목적 하에 해방 전 여러 지역에서 공연된 레퍼토리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중국 연안지역에서 일제와 맞서 투쟁하던 조선의용군 내에서 다양한 문화 활동을 통해 항일투쟁 의식을 고취하면서 일제의 고문에 희생당한 순국열사를 기리려는 의도를 십분 발휘한 이 작품은, 1946년 국립극단의 전신인 중앙예술공작단이 공연하였으며, 같은 해 8 8.15 해방 1주년 기념 희곡집에 수록되었다. <북경의 밤>은 전체 2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장은 해골이 나뒹구는 한 민중 무덤가에서, 한 달 전 체포되어 내내 고문을 받던 조선의용군 포로 김철로부터 동료 여전사 김영의 은신처와 그들 집단 북경책임자의 신원을 알아내려고 살해 협박하는 일본 경찰의 악독한 모습을 두드러지게 형상화하고 있다. 그에 맞서서 온갖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죽음을 맞이하겠다는 김철의 결의에 찬 의지를 확실하게 보여준다. 이처럼 1장에서는 포로에게 살해협박을 서슴지 않는 간악한 일본경찰과 그에게 굴복하지 않는 조선청년의 기계를 극단적인 대비로 그려냈다.

2장은 그로부터 일주일 후 경찰서 지하 유치장에서 최후의 수단으로 물과 음식을 제공하지 않는 고문으로 극단적인 한계에 봉착한 김철의 상황을 전경으로 배치하였다. 그를 상대로 일제의 순사와 조선인 변절자 장영택, 그리고 고문기술자 고교가 차례대로 그를 회유하고 핍박하는 과정이 극화되었다. 간사하고 몰염치한 회유와 잔인한 고문의 과정, 하지만 죽음으로 지켜낸 최후의 승 리를 극적으로 그려냈다. 일제의 간악한 만행과 그것을 극복해내는 조선의용군의 의연함을 보여주기 위한 2장에서는 각종 고문도구들이 가득 찬 음습한 지하유치장의 시각적 장치들, 옆방에서 들려오는 고문을 가하는 소리와 그에 따른 비명 소리와 같은 청각적 장치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긴장감 넘치는 극적 분위기를 조성해 냈다.

이 작품의 극적 구성은 결국 의식마저 혼미해진 김철로부터 결정적인 정보를 알아내기 위한 일제의 3단계 책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먼저 바보 같은 유치장 간수의 입을 통해, '왜 어린 청년이 혁명에 충실한가. 모든 것을 희생하며 조선 독립을 꿈꾸는가'하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하고, 김철로 하여금 눌릴 대로 눌리고 짓밟힌 대로 짓밟힌 조선사람은 누구나 치열한 독립정신을 지녔음을 당당하게 답하게 한다. 이어서 변절자 장의 회유공작이 펼쳐지는데, 김철은 일제와 조선사이엔 타협과 응부가 아닌 대결과 싸움만이 존재한다고 단호히 거절한다. 끝으로 극도의 갈증으로 정신이 혼미해진 그에게 물을 이용한 고교의 마지막 고문이 이어진다. 김철은 고통의 한계를 지나 최후의 순간을 맞이하면서 동지들에게 끝까지 싸워서 조선독립을 이뤄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장렬하게 순국한다.

 

김창만

 

특별히 이 작품은 주동인물과 반동인물들 사이의 극단적인 갈등 대립 관계를 처절하게 보여줌으로써 극적 의도를 잘 발휘하고 있다. 사경을 헤맬 정도로 고문당한 자와, 정신적, 육체적 고문을 가한 자 사이의 외형적인 우열은 분명하지만 오히려 육체적 한계를 정신력으로 극복함으로써 주동인물의 고결한 영웅적 행위를 감동적으로 전할 수 있었다. 절정에서 보여준 주동인물 김철의 죽음은 실제의 관객(중국인들과 국내 조선인들)에게 커다란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였다.

김철과 변절자 장영택의 대립적인 관계를 통해 극적 재미와 갈등을 심화시키면서 주제의식을 놓치지 않고 있는 「북경의 밤」은 당시 창작된 단막극 가운데에서도 상당한 작품성과 대중성을 가지고 있는 작품이다. 조선 의용군 대원들의 사기를 돋우면서 일본군과 변절자의 이중성을 잘 포착하고 있다.

<북경의 밤>을 창작한 김창만은 항일투쟁에서 선전선동을 책임진 인사했지만, 그 스스로가 전문적인 극작가와 연출가는 아니었다. 이 작품 역시 조선의용군의 항일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한 아마추어 선전극이였기에, 작품의 문학적 품위와 예술적 감동을 느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일제와 맞서는 전장에서 조선인들이 펼친 몇 안 되는 항일연극의 일면을 확인케 한 이 작품의 가장 중요한 의의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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