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한옥마을에 잘 살고 잘 늙은 은행나무가 있다. '전주 최씨 종대(宗) 은행나무'라 불리는 이 나무는 꾸밈없이 수수하다. 비라도 내리면 오래 묵은 향이 코끝을 애련케 한다. 긴 세월 한자리에 서 묵묵히 보고 들으며 품은 사연과 깊이 간직한 것들이 잘 익은 것이다.
이 나무에 전해 오는 속설은 여럿이다. '은행나무 곁을 지날 때는 심호흡을 다섯 번 해서 정기를 받아라', '과객들이 은행나무 앞을 지나면서 (최덕지의 학문을 숭상하는) 묵념을 올렸다.', '은행나무에 제사를 지내면 떡두꺼비 같은 사내아이를 낳을 수 있다.', '정월 초하루에 아들을 점지해 달라고 기도를 올리는 여인들이 줄을 이었다.' 등이다. 오랜 세월 세간에 전해진 이런 이야기는 분명 이유가 있다. 은행나무 속설은 은행나무를 심었다고 알려진 최담(1346~ 1434)과 그의 아들 최덕지(1384~1455)의 삶과 인품, 그리고 집안 내력과 관련이 깊다. 전주 출신으로 완주에 묘가 있는 최덕지는 '사제학가'로 칭하던 가문의 일원이다. 전주 한벽당을 건립한 최담의 넷째 아들이며, 고산현감· 장수현감으로 완주에 삼기정 ·비비정을 세운 최득지의 아우다. 또한, 전주의 고서(古書)에서 효자 이야기로 잘 알려진 박진의 조카다. 최담은 태종 16년(1416년) 임금의 부름을 받아 71세 나이에 세 번째 관직으로 통정대부 호조참의 집현전 제학을 제수받았다.
최덕지와 은행나무를 소재로 「은행나무꽃」(2014)는 최덕지와 그의 첫 번째 아내인 이이화(가상 인물)의 절절한 사랑 이야기가 바탕이다. 은행나무꽃은 시사성 있는 대사와 상황을 더 추가하며 성장하는 최덕지와 민중의 모습을 넣었다. 은행나무꽃은 제32회 전국연극제에서 작품상(은상)과 희곡상을 받았다.
'은행나무꽃'은 가벼운 듯하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주제 의식을 담아내고 있다. 담백한 연출과 소소한 웃음 장치를 적절히 활용, 무겁지 않게 이야기를 풀어낸 점이 돋보인다. 한바탕 웃음과 깊은 생각을 동시에 갖게 한 작품이다. 특히 이 공연은 지역에 대한 섬세한 감성과 세심한 이해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최근의 지역 공연들이 화려함을 앞세워 관객을 압도하려 하는 것과는 달리, '은행나무 '꽃'은 소담하고 정겨운 우리네 삶과 이야기로 더없는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화려한 무대 세트도, 의상도, 조명도 없지만, 간결하고 담백한 무대와 이야기에 지역적 특색과 전통민속놀이 등을 더해 저만의 개성과 매력을 갖췄다. 자극적이지는 않지만, 따뜻한 정겨움을 느낄 수 있는 공연인 셈이다. 이는 곧 지역적 색깔과 특색을 담은 공연물을 어떻게 만드는지 보여주는 전범(典範)과 같았다. 지역 설화와 연극적 상상력의 조화로움이 빚어낸 결실일 테다.
"책을 많이 읽는다고 백성의 아픔을 아는 것은 아닙니다. 백성들 생활 가까이에서 그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눠야지요." (희곡 은행나무꽃」 중에서 이화의 대사)
“사대부가 섬겨야 할 것은 백성입니까, 임금입니까? 책임과 권력은 무엇이 다른 겁니까? 출사는 위민입니까, 치국입니까?” (희곡 「은행나무꽃」 중에서 최덕지의 대사)
세상이 속수무책 꽃물이 들면 은행나무도 제각기 꽃을 피운다. 그러나 아름답고 화려한 꽃잎을 가지지 않았기에 은행나무에 꽃이 피었음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삶도, 사랑도 그렇다. 애절한 그 마음을 알기는 쉽지 않다. 「은행나무꽃」에는 마주 보며 사랑을 나누고 싶어 했던 남녀가 사랑을 틔우기도 전에 이별해야만 했던 사무치게 아름다운 사랑이 있다. '벼꽃과 감자꽃이 펴야 백성의 삶이 평안하고 사대부의 시문보다 백성의 태평가가 나라를 더 강성하게 한다.' 라고 믿는 이이화와 상하· 존비· 귀천의 명분과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서 방황하며 인화(人和)의 참뜻을 찾아가는 최덕지다. 그리고 지난 왕조에 대한 미련과 새 왕조에 대한 기대 속에서 방황하는 민중이 있다. 이들은 이이화와 최덕지가 들려준 "모두 똑같은 사람"이라는 말에 감격하며 소박하게 평등한 세상을 꿈꾼다. 이들의 마음과 마음은 오래묵은 나무의 향을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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