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립극단 173회 정기공연 작품 '무주별곡'(김지연 작-정진수 연출)은 전북 무주를 배경으로 제삿날 모여든 권씨 집안 가족의 갈등과 화해를 그린다. 1996년 국립극장 창작대본 공모에서 당선된 작품 ‘가믄 강 가믄 뫼’를 무주별곡으로 제목을 바꿨다. 토속어와 생활관습을 그대로 재현해 구수하고 질펀한 고향 정취를 되살려냈다는 평을 받았다.
전통마을을 배경으로 한 풀뿌리 한국인의 가족사를 그린 작품으로 인고의 세월을 살아왔던 우리네 어머니의 억세디 억센 팔자, 가장으로서의 무거운 짐을 지고 묵묵히 살아온 아버지의 인생,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의 삶이 불만스러운 자식들의 애증이 담긴 작품이다.

전북 무주 인근 대차리 서면마을, 권씨 집안의 제삿날, 「윤씨」 유령은 딸 「아기」를 마중하러 권씨 집안을 찾아온다. 권씨 집안의 가장인 「장환」은 오렌지병과 한으로 심사가 올곧지 못하다. 아내는 장사에 바쁘고, 노처녀인 큰딸 「원남」은 어미에게만 관심이 있는 데다가 막내 「필남」은 가망없는 입시에 매달려있다. 설상가상으로 외손주를 더불고온 둘째 딸 「정남」은 남편과의 불화로 이혼들 앞두고 있다. 제사를 준비하는 저녁 시간 내내 「장환」은 딸들에게 서운함을 호소하나 딸들 역시 그들 나름의 고민과 방황으로 아비를 이해할 여력이 없다. 딸들은 아들을 못낳은 죄로 죽어지낸 어미에 대한 연민과 아버지와 할머니에 대한 애증과, 더불어 자기 자신에 대한 인생의 고뇌로 하여 외로울 뿐이다. 제사를 시작하는 자시 경, 노망난 「하씨」(장환의 양모)의 발작과 발신지를 알 수 없는 장난 전화로 가족 내의 갈등이 분출된다. 친아들을 병으로 잃고 장환을 양자로 맞아 기르며 쌓인 울분을 어쩌지 못하는 「하씨」, 일부종사를 못한 어머니 「윤씨」에 대한 원망을 지닌 「아기」, 양모의 울분 속에 자라나 비뚤어지기만 했던 「장환」, 「장환」은 습관대로 아기에게 손찌검을 하나 왠일인지 가장 내성적이던 「필남」의 제지로 집밖으로 내쫓긴다. 「아기」는 「원남」에게 "너는 아직 젊다"는 말을 남기고 심장발작으로 쓰러진다. 삼일장 후 「윤씨」의 이끌음에 따라 아기는 황천을 건너려 망각주를 마신다. 「원남」과 「필남」은 각자 자신의 길을 찾아 떠나버리고, 「정남」은 다시 돌아올 것을 기약하며 물마른 펌프와 대추나무를 회억한다.

이 작품은 진부한 작품이 아니다. 무엇보다 삶에 대하여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작가의 시각이 그렇다. 20대 후반의 젊은 신인 작가의 처녀희곡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작가의 시선은 객관적이다. 물론 등장인물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따스함 같은 것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아니나 멜로드라마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이 연극에는 주인공이 없다. 그래서 어느 특정인물을 특별히 부각시키지 않는다. 그리고 각 인물들은 때로 자기 얘기를 늘어놓을 때가 있지만 주로 남을 상대로 얘기한다. 우리가 사람을 진정 이해하는 대목은 그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해 얘기할 때보다 남을 대하는 태도이다. 이 극의 등장인물들은 남(남이라기보다 식구)을 대할 때 주로 상대방을 괴롭히고 헐뜯고 공격한다. 이들의 이
같은 행동에서 관객은 공격받는 쪽보다 공격하는 인물의 내면의 고독과 좌절감을 맛본다. 삶에 대한 가득한 불만, 불안, 고독, 허무 이런 것들이 작품의 주제를 이룬다. 결코 낙천적인 작품은 아니나 작가의 성숙한 삶에 대한 인식을 확인할 수 있으며 더욱이 이런 인식이 생경하게 직접적으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고 작품 속에 용해되어 있다는 점에서 우리 희곡 문학에서 드물게 보는 秀作이라고 생각된다. 특히 신인답지 않게 긴 침묵이라거나 장난전화 또는 의식의 흐름을 연상케 하는 음향효과의 이용과 유령의 등장 같은 기법들을 동원할 줄 아는 데서 앞으로의 활동이 더욱 기대된다.

'한국희곡'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김영무 '스타열전' (1) | 2018.09.14 |
|---|---|
| 백하룡 '행복이 가득한 집' (1) | 2018.09.14 |
| 고영범 '에어콘 없는 방' (1) | 2018.09.07 |
| 오태석 '여왕과 기승' (1) | 2018.09.06 |
| 오태석 '사육' (1) | 2018.09.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