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고영범 '에어콘 없는 방'

clint 2018. 9. 7. 16:43

 

 

 

에어콘 없는 방(부제: 유신호텔 503)3.1 운동기 한국 독립운동을 상하이와 전 세계에 알린 현순 목사의 아들 피터 현에 대한 이야기이다1906년 하와이에서 태어나 한국 상해 미국을 떠돌며 살다가 해방 이후 30년 만에 한국을 찾게 된 피터 현은 한 호텔 방에서 젊은 시절의 자신을 만나게 된다. 197587일 밤부터 다음날 아침가지 유신호텔 503호에서 1975년 한국의 암울했던 유신독재 치하 1936년 뉴욕 세계 대공항 1950년대 미국 사회를 휩쓸었던 매카시즘 광풍 19536.25 한국전 휴전 협정까지 다양한 시공간대가 뒤얽히고 중첩되며 현대사의 혼란스러운 여정들이 펼쳐진다. 열기와 광염 혼란과 분열로 가득했건 한 사람의 인생으로부터 시작되는 역사적인 울림은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삶을 진지하고 뜨겁게 반추하게 만든다. 벽산희곡상 수상 당시 공간과 시간 인물 그리고 주인공의 자의식을 통해 다면적으로 이야기를 풀어내며 남과 북이라는 조국과 조국이 될 수 없는 미국을 배경으로 현대사를 유랑하는 한 영혼을 슬프고 아름답게 그리고 있는 화려한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았다태수는 왜?, 이인실, 방문을 쓴 극작가 고영범과 햄릿아비, 벚꽃동산, 봄날 등을 연출한 이성열 같은 대학 연극반 동기이며 2007년 백수광부의 오레스테스에서 함께 작업한 바 있는 두 사람이 2017년 남산 드라마센터에서 공연함.

 

 

 

 

 

197587일 칠순노인이 유신호텔 503호에 짐을 푼다. 1945년에 미군정의 첩보부대 중위 신분으로 들어와 민정시찰 업무를 담당하다가 몇 달 후에 공산주의자들과 협력했다는 협의를 받고 강제송환 당했던 피터 현이 아버지 현순 목사 부부가 국립묘지의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게 된 걸 계기로 부모님의 유분을 들고 입국한 것이다. 강제송환을 당한 후 미국 하원의 비 미국적 행위 조사위원회에서 좌익 활동 혐의를 받고 오랜 기간 조사를 받아본 경험이 있는 피터현은 유신 치하의 한국에 돌아오면서 극심한 불안과 공포에 젖어 있다. 이 작품은 그가 그 방에서 하룻밤 새에 경험하는 머릿속의 여행 이야기다.

 

 

 

 

 

공연리뷰

박헌영이 무대 밑바닥에서 불쑥 튀어나온다. 연극이 거의 막바지에 다다랐을 즈음이다. 그는 중절모에 뿔테 안경을 썼고, 고급스러워 보이는 체크무늬 코트를 입었다. 유럽의 어느 거리를 지금 당장 활보한다 해도 어색해 보이지 않을 멋쟁이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말들은 방정맞다. 몸짓도 개그맨처럼 우스꽝스럽다. 어떤 관객에게는 생경하게 보일 것이다. 남로당을 이끌었던 사회주의 운동가, 북에서 김일성에게 숙청돼 처형당했던 이 비운의 혁명가는 졸지에 그렇게 희화화된다. 하지만 이 연극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가운데 하나다. 연출가 이성열은 전설적인 존재를 희화적으로 비틀면서 또 다른 성찰을 유도한다. 그러나 지금 남산예술센터에서 공연 중인 <에어콘 없는 방>은 박헌영 같은 거물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 연극은 우리가 잘 모르는 어떤 사내, 피터 현(1906~1993) 이라는 디아스포라의 삶을 무대에 펼쳐놓는다. 그는 1906년 하와이에서 태어나 이듬해에 한국으로 들어왔다. 아버지 현순 목사는 정동교회의 목사였고, 피터(혹은 베드로)는 유소년 기를 정동 길에서 보냈다. 하지만 아버지 현 목사가 3·1운동과 임시정부 등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까닭에 일찌감치 세계를 떠도는 유랑의 신세가 됐다.

세 살 위의 누나인 앨리스 현(1903~1956)의 삶은 더욱 비극적이다. 박헌영의 연인으로 알려져 있는 이 여성 혁명가는 1949년에 북한으로 들어갔다가 1956년 처형당했다.

연극은 1975년의 시점에서 막을 올린다. 71세의 피터현이 부모의 유골함을 들고 귀국했다. 아버지 현 목사가 건국공로자로 추서되고 유해를 국립묘지에 안장하기로 당시의 정부가 결정했기 때문이다. 이 연극은 그렇게 오랜만에 고국땅을 밟은 피터현이 유신호텔 503에서 하룻밤을 묵으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객관적인 시간은 24시간쯤에 불과하다. 하지만 에어컨도 없는 그 작고 답답한 방에서 피터현의 정신적 분열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면서 과거의 시간들이 현란하게 펼쳐진다.

 

 

 

 

 

연출가 이성열은 하룻밤의 광염소나타라고 했다. 불과 4평쯤인 더운 호텔방에서 피터현의 혼란과 망상이 연쇄적으로 폭발한다. 그동안 닫혀 있던 무의식의 문이 하나씩 열리면서, 이른바 해방공간으로 불리는 1945년부터 1948년까지, 또 피터현이 미국 뉴욕에서 연극연출가로 살았던 1930년대의 기억들이 무대로 소환된다. 1930년대의 뉴욕은 좌파 예술가들의 에너지가 약동하던 곳이었다. ‘연출가 피터현도 반전의 메시지를 담은 <황소 페르디난드>, 노동자계급의 봉기를 소재로 삼은 <비버들의 봉기>를 무대에 올렸다. 하지만 그의 예술적 재능은 인종차별의 벽에 부딪혀 시들고 말았다.  

2, 3겹의 이야기를 탄탄한 드라마로 직조해낸 극작가 고영범의 공력이 돋보인다. 연출가 이성열은 반원형의 극장을 적절히 활용하면서, 이 슬프고도 무거운 이야기를 좀 더 가볍게 풀어내려 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현대사의 풍랑에 휘말려 고향을 잃었던 피터현의 개인사를 통해 국가개인의 문제를 돌아보는 연극이라고 할 수 있다. 메시지가 한 단계쯤 더 선명했으면 어땠을까 라는 아쉬움도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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