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작품은 세계를 하나의 거대한 온실(溫室)로 형상화한다. 그 거대한 온실 속에서 인간들은 화초처럼 재배되고 사육된다. 이 작품은 1970년 4월 실험극장 공연작으로 국립극장에서 초연되었다. 나영세 연출에, 김동원, 안은숙, 이정길 등이 출연하였다 전체 3막으로 구성된 이 극의 무대는 한 가정집의 응접실이다 견고한 철제 층계와 유리벽으로 된 온실, 그리고 네 개의 석상(石像)이 그 배경을 이룬다. 배경의 차갑고 단단한 물질적 이미지는 그대로 등장인물들의 관계를 암시하는 기호로 작용한다. 막이 열리면 불면증 환자인 귀주와 간호사인 연순의 대화가 시작된다. 이때 연순의 연인인 일도가 나타나 자신이 골프장에서 사람을 죽였다며 부산을 떤다. 이어서 온실을 돌보는 노인이 등장하고, 노인의 아들이 이곳에서 행방불명된 사실이 밝혀진다. 2막에서는 이진과 귀주가 부부사이이며, 귀주와 노인아들이 불륜을 저지른 것으로 묘사된다. 석상 앞에서 이진과 귀주는 석수장이의 넋을 달래는 굿을 벌인다. 3막에서 연순은 이진에게 일도의 다리를 부러뜨려 입원시켜 줄 것을 요청한다. 온실 안에서 이진과 일도가 뒤엉켜 싸움을 벌일 즈음 노인이 온실을 돌보러 나타난다. 그의 몸에서는 홍역 열이 감지되고, 귀주는 잠을 되찾는다.

이 극은 병적인 분위기로 가득 차 있다 등장인물부터가 그렇다. 우선 이들은 의사 - 환자의 관계에 있다 연순은 간호사이고, 이진은 변호사이다. 누군가를 돌본다는 점에서 이들은 의사의 입장에 있다 반면, 귀주와 일도는 환자의 입장에 속한다. 귀주는 불면증 환자이고, 일도는 망상증 환자이다 아울러 이들은 연인관계에 있다. 이진과 귀주, 연순과 일도는 부부 사이로, 서로를 깊이 사랑하고 있다 문제는 그 사랑으로 인해 의사와 환자의 관계가 쉽게 자리바꿈한다는 점이다 사랑이 하나의 질병이라면 사랑에 눈먼 자들은 누구나 환자일 수밖에 없다. 때문에 이진과 연순의 치료행위는 점점 폭력적인 양상을 띤다. 연순은 일도를 입원시키기 위해 이진을 협박하고 이진은 귀주를 잃지 않기 위해 일도에게 폭행을 가한다. 그들은 우리에 갇힌 짐승처럼 미친 듯이 날뛰며 서로에게 상처를 입힌다. 애욕의 우리 안에서 그들은 한 마리 육식동물로 돌아간다. 이에 따라 전구의 필라멘트가 끊어지듯 등장인물들의 정신은 마모된다. 그러나 정신의 마모를 일으키는 병인(病因)은 실은 사랑이 아니다. 귀주의 말을 빌리면 그것은 ‘고독이라는 무서운 병’이다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고독의 병을 앓고 있는 것이다. 그럴 때 이들의 고독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그것은 ‘고향의 상실’에서 온다. 일도가 말하는 ‘회귀성 동물’이 이를 잘 말해준다 상처 입은 짐승이 자신의 보금자리로 돌아가듯, 약육강식의 현실원칙에 상처 입은 인간들은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 고향은 언제나 쾌락원칙이 지배하는 태초의 낙원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에게 더 이상 고향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스팔트와 철제 건물 차가운 유리로 뒤덮인 세상에서 그들은 고향으로 가는 길을 잃어버린 지 오래다. ‘석상’과 ‘온실’은 이러한 그들의 현실을 잘 대변한다. 석상은 사람의 형상을 한 오브제이다 그것은 인격이 제거된 빈 껍질만의 사물이다 이 극의 등장인물 역시 석상과도 같이 인격을 잃은 존재들이다. 육신의 무게만을 젊어진 그들은 오로지 폭력의 행사를 통해 서로에 대한 사랑을 증명할 뿐이다. 이울러 차가운 사물로서의 인간들은 도시의 온실 속에서 배양된다. 응접실 한편에 자리 잡은 온실의 존재는, 당대의 일상공간이 규격화된 인격을 생산하는 거대한 공장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상징한다. 이처럼 석상과 온실은 톱니바퀴 같은 일상 속에서 정신의 뿌리를 잃고 마모되어 가는 현대인들의 병든 현실을 은유하고 있다. 나아가 석상과 온실은 이러한 닫힌 현실로부터의 탈출을 가능하게 하는 출구이기도 하다. 등장인물들은 자신을 결박하고 있는 물신(物神)의 주술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 그리하여 사령 굿을 연상시키는 제의를 통해 석상에 혼을 불어넣고자 한다. 그럴 때 석상은 태초의 신성한 영을 지닌 토템이 되고, 온실은 광활하게 펼쳐진 원시림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등장인물들이 앓는 질병은 때 묻지 않은 상태로 돌아가기 위한, 혹은 신성한 존재로 부활하기 위한 산고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는 노인이 홍역을 앓게 되는 마지막 장면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노인의 홍역은 등장인물들의 죄에 대한 상징적 대속행위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노인의 병은 역설적으로 등장인물들의 치유를 뜻하는 것이 된다. 요컨대 작가는 온실이라는 공간을 벌어 폐쇄된 일상 속에서 사육되는 현대인의 폐쇄공포증을 드러내고자 한다. 그럴 때 그 사육의 주체는 누구인가 그 답은 일도의 신분에서 찾을 수 있다 동물원 사육사라는 그의 신분은 지극히 정치적인 함의를 가진다. 사육사는 폐쇄된 사회를 통제하는 권력자의 모습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등장인물들의 병, 고독이라는 무서운 병은 심리적인 질병이면서 동시에 사회적인 질병이기도 하다. 문제는 사육사로서 권력의 구조를 내면화한 일도가 다시 동물원을 뛰쳐나옴으로써 스스로 권력의식을 허문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골프장의 드넓은 초원으로 뛰쳐나온 그는 정치인을 향해 획하고 멋진 스윙을 날린다. 이 통쾌한 삿이야말로 작가 오태석의 정치학에 다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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