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한아름 '왕세자 실종사건'

clint 2016. 11. 19. 20:55

 

 

 

 

늘 반복되는 일상으로 지루하던 조선 왕실 중궁전에서 왕의 관심을 받지 못하는 중전은 약간의 일탈로 지루함을 달래며 지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모두를 혼란 속에 빠트릴 왕세자실종사건이 발생한다. 극은 이제 밤의 정적을 깨고 비명과 북소리가 난무하며 어둠을 몰아내기 시작한다. 왕세자가 실종되었던 시간에 처소를 이탈하고 동궁 숙직 내관이니 구동이를 만났던 자숙이가 감찰 상궁인 최상궁으로 인해 용의자로 지목된다. 내관과 나인의 미스테리한 만남에 이유를 밝히려 취조를 하던 중, 뜻 밖에 자숙이 왕의 아이를 회임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자숙과 구동은 용의선상에서 제외된다. 사가에서부테 제리고 들어온 몸종 자숙의 회임은 왕에 대한 배신감과 자숙에 대한 실망으로 이어지고 중전에게는 견딜 수 없는 고통으로 다가온다. 자숙의 급격한 신분상승과 이를 시기, 질투하는 무리. 왕과 자숙에 대한 배신감에 사로잡힌 중전의 일탈, 급박한 상황에서 책임을 모면하기 위한 방책들. 그리고 이들 간에 숨겨진 감정선과 이를 감추려는 시도는 어느새 사건을 점점 본질과는 먼 곳으로 몰고 가버리는데...

 

<왕세자 실종사건>은 조용하던 궁궐에 왕세자가 실종된 몇 시간 동안 일어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세자가 사라지기 전 얼마 동안의 시간을 극중 인물들과 관객이 함께 반복·추리하는 형식으로  중첩되는 이미지들 속에 극은 진실 확인을 위해 현재와 과거 그리고 상상이 연결되며 자유롭게  시·공간을 넘나든다. 조선 왕실의 기대주인 왕세자, 떠오르는 정기를 받으라고 동궐(東闕)에 거처하던 왕세자의 실종은   궁을 혼란 속에 빠트린다. 왕세자의 실종을 계기로 밝혀지는 숨겨진 관계 속에서 인물들은   각자를 항변하기 바빠진다. 사건의 시작점에서 너무 멀어진 인물들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사는 동안 ‘과연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라는 본질적인 물음을 잊고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이 작품은 묻고 있다.

 

 

 

 

 

<왕세자 실종사건>이 익숙한 것은 이 작품이 2004년도의 화제작 <죽도록 달린다>의 한아름과 서재형의 작품이기 때문이다.<죽도록 달린다>는 극단 물리의 신인 연출가 서재형의 연출 데뷔작으로, 극의 처음부터 끝까지 그야말로 ‘죽도록’ 달리는 배우들과 달리는 말에 박차를 가해 더더욱 속도감을 높이는 듯한 타악 그룹 공명의 신나게 두드려대는 소리들이 인상적인 무대였다. 이번 예술의전당 ‘자유젊은연극 시리즈’의 초청작으로 올라가는<왕세자 실종사건>은 한아름, 서재형, 타악 그룹 공명이 다시 한번 의기투합하여 올리는 두 번째 작품으로 이들 각각의 스타일이 그대로 잘 살아있다. 단순하면서 감각적인 무대와 역동적인 타악 소리도 여전하고, 권력를 둘러싼 암투가 진행되는 왕궁에서의 사랑 이야기라는 기본 틀도 거의 그대로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익숙한 것이 자꾸 반복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약간의 염려와 함께 공연장으로 향했다. 그러나 공연이 시작되면서 이러한 염려는<왕세자 실종사건>이 만들어내는 새로움에 밀려 말끔히 걷혀갔다. 일단 이 공연이 전작인<죽도록 달린다>와 가장 크게 다른 점은 조용하다는 것이다. 서재형은 전작의 격렬하고 거친 호흡을 가라앉히고 일부러 느리게, 느리게 시간을 지연시키고 반복시키면서 기막히게도 정적인 순간들을 만들어낸다.

 

 

 

표면적으로 이 극은 7살 어린 왕세자의 실종과 그를 찾아내야 한다는 추리극 구조에 따라 숨가쁜 사건 전개를 보여준다. 그러나 특이하게도 이 극은 왕세자가 실종되는 동일한 시간을 최상궁과 자숙, 구동, 중전 시점에서 각각 다른 상상과 과거 회상을 반복해서 재현하고 있고, 반복되는 동일한 시간은 점차 중궁전 나인 자숙과 대전 내관 구동의 시디신 사랑 이야기로 초점이 맞춰지면서 북을 울려대고 급박하게 옮겨지는 발걸음들을 일순간 정지시킨다.시간을 멈추게 하는 마법과도 같은 쑥국새 소리와 휘파람 소리―. 아이러니칼하게도 이 극에서 서재형 연출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격렬하고 리드미컬한 타악 반주는 극히 제한되어 있다. 긴박하게 두드려지는 타악 소리는 시간의 흐름을 끊어내는 기계적인 반복음으로만 사용되고 있다. 대신 그 공간을 채우는 것은 배우들이 구음 소리로 직접 들려주는 적막한 한여름 밤의 온갖 풀벌레, 개구리, 늙은 여우의 울음소리들이다.

 

 

 

 
그리고 구동이 어린 시절 친구이나 지금은 왕의 여자인 자숙에게 내미는 시디신 살구. 권력을 둘러싼 숨가쁜 암투 속에 어이없게도 한 알의 살구가 비집고 들어와 입안 가득 시디신 침을 고이게 하는 것처럼 한여름 밤을 채우며 조용하게 흔들거리는 밤의 소리들은 자꾸만 시간을 멈추게 하면서 그 속을 들여다보게 한다. 숨가쁨과 숨죽임의 시간들이 절묘하다.
결국 이 극의 표면적인 서사인 왕세자의 실종은 어린 시절의 기억을 지우고 각자 내관과 나인의 삶을 살아야 했던 구동과 자숙의 기억의 복원, 실종된 시간의 복원을 위한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이 극에선 제목인 ‘왕세자 실종사건’에 걸맞게 왕세자를 찾기 위한 노력이나 추리가 진행되지 않는다. 실종된 왕세자를 찾기 위한 시간은 오로지 보모상궁을 통해서만 제시되는데, 자유소극장 벽면을 따라 3층 높이에 설치해둔 허공의 길을 보모상궁이 느린 속도로 움직여 길 끝에 다다랐을 때 공연이 끝난다는 커다란 틀만 마련해두고, 차가운 돌바닥이 깔려있는 실제 아래쪽 무대에선 엎치락뒤치락 숨 가쁘게 과거와 현재가 뒤섞이면서 구동이와 자숙이의 아픈 시간들이 반복된다. 그리고 그렇게 반복되는 시간들은 이들에게 어느 한순간 멈추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순간들이며 또 동시에 너무나 잔인한 시간들이기도 함을 아프게 각인시킨다.
반복되는 시간 속에서, 매번 똑같은 장면에서 침이 고이게 하는 살구는 구동이가 자숙이에게 유일하게 줄 수 있는 선물이면서, 자숙을 따라 궁궐로 들어오기 위해 포기해야 했던, 곧 내시가 되기 위해 잘라내야 했던 구동이의 양물(陽物)의 상징이기도 함이 밝혀지면서 구동과 자숙에게 자꾸만 반복되는 시간이란 얼마나 잔인하고 신 눈물이 나는 것인지 보여준다.
 

 

그리하여 결말에 이르러 한밤중의 어이없는 숨바꼭질 놀이로 궁궐을 발칵 뒤집어놓은 어린 왕세자가 허공에 매달린 의자에 앉아 실실거리는 가벼운 웃음소리를 뿌릴 때, 차가운 돌바닥 위에 돌려세워진 채 마치 거꾸로 필름을 돌리듯 뒤로 잡아당겨지는 몸짓으로 마지막 커튼콜 인사가 진행될 때 한여름 밤에 맛봤던 죽도록 신 살구 맛이 오래도록 입안에 남게 된다. 
그리고 무대 정면 뒤쪽이 아닌 악사석이 있는 무대 왼쪽에 살구빛 배경막을 걸어 90도 각도로 비틀어놓은 무대와 양식적인 무용 동작으로 시간의 빠름과 느림을 표현했던 배우들의 움직임은 그러한 살구의 감각을 시적인 이미지로 살려놓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작가 / 한아름
서울예술대학 극작과 졸업
프랑스 파리 제8대학 공연예술학과 연극전공 석사
(現)서울예술대학, 극동대학, 동아인재대학 출강
2006예정 릴레이 / 문예진흥원 예술극장 소극장
2005 왕세자실종사건 예술의전당/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2005 죽도록 달린다. 문예진흥원 극단 물리/ 문예진흥원 예술극장 소극장
2004 죽도록 달린다. 극단 물리/ 극장 아룽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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