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 K>(1989. 4)는 군사정권이 언론난립을 정리한다는 명분으로 민주언론사들을 무자비하게 폐지했던 80년대의 폭거정치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폐간지의 마지막 기사를 작성하면서 K기자는 ‘우리는 어둡고 긴 터널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기록한다. 그는 동료들과 함께 ‘민주언론쟁취를 위한 우리의 입장’이라는 성명서 작성에 참여한다. 그는 체제저항의 주동자로 몰려 당국에 연행된다. 이 작품은 심문, 고문, 감옥, 법정, 석방 장면 등으로 전개되며, 과거의 동료들과 애인의 거짓증언에 의해 그가 헤어날 수 없는 상황에 뒤얽히는 과정을 다각도로 보여준다. 마지막에 풀려난 그는 ‘현실, 그 자체가 체포되었다’고 절규한다. 사회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감옥인 현실에서 자신은 ‘기사다운 기사’를 쓸 수 없는 기자임을 통탄한다. K는 손도끼로 자신의 손목을 자른다. 연극의 핵심은 K의 민주시민적인 행위를 반체제적 범죄로 쉽게 조작해가는 사회구조를 조명하는데 있다. 그가 동지로 믿었던 주변 지식인들의 시세 순응적인 태도와 가치관의 요동으로 말미암아 거짓말은 그대로 사실로 둔갑한다. 시민적인 발언은 개인의 불만으로 단순화되고, 비전이 있는 비판은 일시적인 푸념으로 폄하된다. 당국자의 의중에 따라 하루아침에 범법자가 되기도 하고 선량한 시민으로 인정되기도 한다. 이처럼 작품에서 묘사되는 동시대 한국사회는 정치 조작술의 극단을 보여준다. 스스로 손목을 자르는 K의 결단은 자기를 포함한 동시대의 지신들에 대한 환멸과 자조의 결과이자 일종의 저항이기도 하다. 다양한 국면을 빠른 전개로 실현한 이 공연은 시대불안과 암담한 미래를 가슴 서늘하게 느끼게 했다.
이 공연에 대하여 신현숙은 ‘공간의 수평선을 극장 밖 복도에까지 확장하고 분장실로 이어지는 통로를 무대 안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원근법의 효과에 의해 현실감과 입체감을 나타낸 점, 공간의 수직선을 확장해 재판석을 객석의 측면, 관객의 머리 위 높이에 올려 설계함으로써 무대에 깊이를 주게됨은 물론이고 무대 바닥에 위치한 피고(시민K)와 높은 공간에 정좌한 재판관의 위상적 대립을 통해 사회조직의 한 단면을 공간적으로 형상화시킨 점, 화면을 이용해 이용 공간을 삽입시키고 객석에 시민K가 자연스럽게 앉음으르써 객석마저 무대 공간에 통합시켜 관객의 무의식 속에 자신도 연극 속에 동참되어 있음을 느끼게 만든 점 등 무대 공간에 대한 연출가의 뛰어난 에스프리가 돋보이는 작품이었다.’고 평가했다.
상황극 시민K, 이 소극장 공연을 위한 대본은 5명 정도의 배우와 3명 규모의 스텝이 적절하게 배역을 바꿔 나가면서 8개의 상황을 구성하게끔 쓰여졌다.
(공연상의 유의점)
* 대사 읽기에 대한 율격적 계산 (음송, 단조로운 보고, 방송 멘트, 노래, 외침 등) 이 되지 않으면 소설적 문법에 떨어질 우려가 있다. 연출은 발 빠른 대사법과 다양한 방법적 변화의 필요성을 느낄 것이다.
* 장면 전환에 대한 소도구 이동 배치와 배우의 전환 동작에 대한 계산이 되어 있지 않으면 진행을 방해하는 암전과 불필요한 소음으로 극적 긴장이 떨어질 우려가 있을 것이다.
* 배우는 개인적 성격에 집착하기 이전에 자신에게 배당된 성격의 역할에 대한 전체적 인식을 필요로 할 것이다.
* 음향과 조명과 슬라이드는 단순한 극적 부대조건이 아니라, 상황을 직조하는 본질적 역할이어야 함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던져진 상황: 시민K는 언론사 통폐합과 숙정, 그리고 민주언론쟁취를 위한 투쟁의 역사현실 속에 내던져진 신문기자로 설정된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자유일보’는 폐간의 운명에 처해지고, 동료기자들(여기서는 후배기자와 애인 등으로 설정되어 있다)은 저항의 기세로 집단적 맞섬을 시도한다. 이 과정에서 시민K는 민주언론 쟁취를 위한 선언문 작성자의 일원으로 개입된다. 그러나 기자들의 맞섬은 물리적 폭력 앞에 철저하게 부서진다. 후배기자가 체포되면서 시민K와 애인인 동료여기자 또한 체포의 위험에 놓인다. 애인은 은신을 권유하지만, 시민K는 그대로 자신들에게 놓여진 상황을 받아들인다.
심문 : 조사관과 대면하게 된 시민K는 선언문 작성에 개입된 경위를 밝히면서 자신의 개입이 주도적 선택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직업적 결사의 흐름이었음을 구차하게 털어놓는다. ‘어쩔수 없는 상황’논리로 자신의 책임을 줄여보려는 시민K의 변명은 조사관의 일방적 폭력행사 앞에 무너진다. 조사관은 시민K에게 선언문 작성 행위 자체에 대한 부정과 변절과 선택을 강요한다. 그러나 시민K는 사꾸라로 몰리기보다는 차라리 감옥행을 선택하겠다고 자신의 입장을 밝힌다.
고문 : 조사관은 후배기자와 동료 여기자인 애인이 어떠한 상황에 처해있는가를 보여준다. 그러나 시민K에게 가해진 치명적인 고문행위는 물리적 고통이 아니라, 정신적 침해였다. 조사관의 흑색 전략에 의한 이간행위는 시민K를 어느새 변절자 내지 내통자의 위치에 놓은 것이다. 후배기자와 애인의 저주를 받으면서 시민K는 인간의 존재 의미 자체가 박탈당했음을 느끼고 분노한다. 시민K는 비로소 외로운 저항을 결심한다.
구치소에서 사투 : 구치소에 수감된 시민K는 그 곳에서 병든 우리사회의 전모를 파악한다. 고위층 암살 미수범으로 수감된 전직 정보총책, 운동권 여대생, 그리고 파란의 정치 이면사 현장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수감된 여가수를 통해 정치적 역사현실의 장을 실감한다.
재판정에서 사투: 재판장에 선 시민K는 철저하게 가려지고 조작된 법정구조에 대항한다. 그러나 시민K의 주장은 후배기자와 애인의 위증에 의해 무기력해진다.
현실, 그 자체가 체포되었다: 방면된 시민K는 자신의 방면된 이유를 생각한다. 결론은 ‘현실, 그 자체에 체포되었다’는 판단에 이른다. 이 야만적 현실 자체가 바로 거대한 감옥이라는 성찰과 함께, 갇힌 현실 속에서 저항해야 하는 지식인의 시대 복무적 역할을 인식하고 다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시민K의 저항은 보이지 않는 눈에 의해 감시당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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