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도리동>은 국보 제121호인 경북 안동 하회동의 별신굿탈 제작자로 전해진 허도령 설화를 극화한 것이다. 고려 말엽 지금의 경북 안동군 풍천면 하회동(물이 돌아 흐르는 마을)에 죽은 총각 혼령에게 새색시가 시집가게 된다. 그녀는 비관 끝에 자살하려고 강물에 뛰어들때 마침 이 마을에 사는 허도령이란 총각이 그녀를 구해주어 둘은 사랑에 빠지게 된다. 이즈음 우연하게도 별신굿재비를 보관해 두는 동사가 원인 모르게 불타 별신굿 탈이 모두 타버리고 온 마을에 괴질이 돌아 지옥같은 형국이 된다. 마을 사람들은 이런 현상을 각시와 도령의 불륜 때문에 일어난 흉조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한편 별신굿을 주재하는 산주에게 정결한 총각을 뽑아 별신굿 탈을 만들어 바치라는 서낭님의 내림이 있게 된다. 마을의 총각 여럿 중에서 허도령이 내림을 받아 산중에 장막을 쳐놓고 그 속에 갇히게 된다. 산주에게 내린 현몽에 의하면 탈을 만든 총각은 탈이 완성된 후 죽게 된다는 믿기 어려운 그러나 믿어야 하는 비극적 결말이 전제돼 있다. 도령은 인간이 죽음의 공포로부터 해방될 때 죽음의 불안을 극복할 때 비로소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진리를 터득하고, 혼신의 힘으로 탈을 완성한 후 영원한 평화와 자유를 찾아 저승으로 떠나게 된다.
<물도리동>은 국보 제121호인 경북 안동 하회동의 별신굿탈 제작자로 전해진 허도령 설화를 극화한 것이며 민예가 추구하는 한국적 연극정립을 향한 단계적 작업으로서 무의의 연극적 기능을 실험한 작품이다. 탈 제작을 완료하고 죽음을 맞아야만 하는 허도령이 죽음에 대한 공포를 극복함으로써 영원한 자유를 얻게 되는 내용으로 심각시의 허도령에 대한 순애, 산주의 직무와 인간으로서의 내면적 갈등, 마을사람들의 보이지 않는 어떤 힘에 대한 외경 등이 연극적으로 얽혀 굿과 놀이와 가무와 함께 한국적 연극의 체취를 느끼게 해준다.
<물도리동>을 보고 있다가 나는 한순간 경악감을 느꼈다. 마지막 허도령이 탈 하나 하나에 생명을 부여하는 대목이 그것이다. 우리는 예수가 아니더라도, 자신의 능력에 의해 어떤 사물에 생명을 넣어 준다는 것은 신명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과정은 한갓 전설적인 이야기에 생명감을 주고 현실감을 지각시켜주는 극예술의 극적 장면인 것이다. 인간의 의지로 이룩하는 의식의 세계, 그 세계를 시각화하는 것은 예술성의 본질에 해당하는 것이기 때문에 더욱 감동이 크다. 그 장면에서 탈 하나 하나에 이름을 부여하는 대사를 다시 한 번 읽고 싶은 욕심이 앞선다. (<주간조선>, 1977년 12월 18일)
이 작품은 전설의 재현을 가무극 형식으로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당시 허규는 ‘전통의 계승, 전통의 현대화’라는 이념을 전제로 오영진 원작의<한네의 승천>에 이은 작업으로<물도리동>의 원천이 되는 하회 별신굿 탈놀이의 허도령 전설을 현지조사·재구성·재창조하기에 이른 것이다. 탈놀이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모두 극중의 실제 인물로 등장시켰으며, 특히 각시와 허도령을 부각시킴으로써 전승 탈놀이의 내용과 전설이 사실적인 사건으로 변이됐다. 전설이 지니는 현대적인 의미를 추구하거나 생동하는 축제판을 만들기보다는 과거적인 사건의 복원에 치중한 듯한 느낌을 짙게 풍긴다. 하지만 이 작품은 아름다운 마음씨, 진지한 삶의 태도, 섬세한 정서, 신과 인간의 조화, 주민들의 집단의식 같은 것을 시적인 언어와 노래와 춤과 몸짓으로 표현해 놓은 점에서 희곡사적인 가치가 있다. 허규의 이런 작업을 계기로 한국의 전통적인 말과 소리와 몸짓과 색채들은 비로소 연극으로 총체화되기 시작했다.
평론가 한상철은 이 작품의 공연에 대해 “이번 공연을 통해 작곡, 안무, 미술, 가면 등 독창적으로 제작한 이 극단의 의욕은 높이 살 만하다. 그것이 이 극단에 연극제 대통령상을 수상케 한 요인이 되기도 했지만 공연 자체에 있어서는 여러 가지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가장 큰 문제점은 연극이 정리가 안 되었다는 점이다. 이 점은 작가와 연출가가 동일인이라는데도 원인이 있겠지만 잡다한 모든 요소들을 한 연극에 모두 집어넣으려는 과욕이 예술은 선택과 절약을 원칙으로 한다는 근본원리를 무시했고, 따라서 극의 주제가 애매해졌다는 점이다. 그러나 앞으로 여러 차례의 재공연을 통해 보다 명료하고 세련된 극이 될 가능성을 충분히 가지고 있는 연극이었다”고 평가했다. (<우리 시대의 연극인>, 서연호, 연극과인간, '허규 전통의 현대화를 위한 집념')
경북 안동군 풍천면 하회동(물도리동)에는 예부터 별신굿 탈놀이가 전승되어 왔다. 이 놀이는 1928년 별신굿을 마지막으로 현재는 체계적인 전승이 끊어진 상태로서 놀이에서 사용하던 탈(국보로 지정)의 일부와 옛놀이마당이 남아 있고, 놀이꾼 중 한사람(이창희 옹)이 생존해 있을 뿐이다. 이번 연극제 초청작품의 하나인 극단 민예극장의<물도리동>(허규 작·강영걸 연출)은 이러한 탈놀이에 얽힌 전설을 토대로 새로운 형태의 작품이다. 작품의 연출적 특징은 한마디로 소리(노래)를 위주로 한 판굿놀이를 과감하게 시도한 점이라 하겠다. 작곡가(조동호)에 의해 새로 창작·구성·편곡된 소리는 극이 진행되는 동안 여러 차례 독창·합창·선창·후창 등의 방법으로 불리어지는데, 소리의 사이사이에는 무용적인 동작(문일지 안무)이나 연기가 펼쳐진다. 무대공간의 구성은 전면과 중앙을 놀이마당으로 개방하여 주위에 타원형의 계단을 만들어 가변적인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왼편 층계 위에는 樂士석으로 꾸미고 등·퇴장은 억제시킨 채 모든 연기자들은 층계 위에서 계속 머물면서 각기 역할과 합창대의 구실을 함께 하고 있다. 이러한 공간의 구성과 놀이판의 짜임새는 판굿 형태를 계승한 의도가 역력하다. 마을 사람들이 함께 모여 소리도 하고 춤도 추며 악기를 연주하거나 연극을 꾸며 보이기도 하면서 집단적인 신명을 불태우고 민중적인 의지를 새로이 가다듬던 놀이가 판굿이었는데, 이번 작품은 바로 이러한 전통을 현대극 속에 새로이 수용해 보고자 한 노력이 돋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와 노력에도 불구하고 현대극이 갖춰야 할 참신한 성격과 견실한 구조에 대한 추구와 탐색이 아직 취약한 수준에 머물고 있다는 점에서 결함이 드러난다. 우선 하회탈 전설의 극화가 전제되어 있는 만큼 주인공인 허도령은 물론 그를 중심으로 한 각시·양반·산주·마을 사람들의 입장과 처지가 바탕이 된 성격추구가 분명했어야 한다. 왜 탈을 만들어야 했으며 탈을 통해서 볼 수 있는 민중적 성격은 무엇이고, 그 전설을 오늘의 시점에서 되살려 보게 된 까닭이 무엇인가를 보다 세심하게 곰곰 따져보았어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전반적으로는 전설의 재편성 내지 민속놀이의 재구성이라는 인상을 갖도록 해 주는데 이러한 측면은 상대적으로 극적인 구조의 탐색이 부족하다는 반증이 된다. 노래·춤·대사·탈놀이 등이 긴밀한 연결을 갖지 못하고 각기 흩어진 느낌이 짙다. 가장 중요한 성격의 추구를 방치해 두고 왜 그처럼 설화적 분위기의 조성에 매달려 있는지, 정말 국보급의 탈 이야기인데도 탈(안정의 제작)은 썼으되 신명의 춤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기왕에 놀이의 마당을 설정하였으니 ‘뜻 있는 놀이’답게 왜 한번쯤 놀아보지 못하는 지가 끝내 의문이고 못내 아쉬움이 남는다. 오늘날 우리들은 한국인의 얼굴을 잃어가고 있다는 자각을 뼈아프게 느끼고 있다. 우리의 얼굴과 자존을 충격적으로 찾아내는 일은 정말 불가능한 것인가. (<한국일보>, 1986년 9월 4일, '소리판굿 試圖, 취약한 구조')
민예는 그간 오랫동안 ‘한국적인 연극의 체취’를 느끼게 해 줄만한 연극을 만들기 위해 많은 고통과 노력을 기울여 온 극단으로서 수많은 재야극단 중에서 가장 뚜렷하게 극단의 성격을 명시하고 실천해온 유일한 극단이며 특히 모든 단원들이 한국인 고유의 춤과 노래를 익히고 전통극의 여러 가지 연극적인 특징들을 살려내고 전통과 현대를 잇는 가교의 역할을 해내려고 해왔다. 그들은 이미<놀부전>이나<한네의 승천>에서 우리 고유의 연극적 유산을 활용, 어느 정도 현대의 관객들에게까지도 호소력과 흥미를 가질 수 있을만한 작품을 만들어냈으며 그러한 작업을 바탕으로<물도리동>에서는 한층 그들의 작업 성과를 집약시키고 완성시키려는 의도 하에 많은 시간과 정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그래서 직접 희곡을 쓰고 노래를 새로이 작곡하고 춤을 새로이 만들고 장치를 새로이 꾸몄으며 전부 12개의 탈 중 전해 내려오지 않는 3개의 탈을 새로이 만들기까지 했다.
옛 극을 옛 식으로 제작하지 않는 공연은 위에서와 같은 새로운 작업이 반드시 필요할 것이며 더욱이 하회 탈놀음은 원형이 전해지지 않기 때문에 새로운 재구성이 불가피했을 것이다. 원형이 잔존해 있는 다른 탈놀음도 실은 단지 원형 재현에만 목적을 둔 것이 아닐 때 새로운 재창조는 불가피하다. 전통이 다만 과거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현재 속에 그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 되려면 전통은 파괴와 재창조의 과정을 겪지 않으면 안 되는데, 이 때 전통은 형식과 내용의 완전한 결합과 통일을 보여주는 樣式 속에서 숨쉬게 되는데 그것은 전혀 옛 양식도 아니며 완전히 새로운 양식도 아닌, 그러면서 동시에 그 두가지가 다 될 수 있는 어떤 하나의 抽象이 되어야 한다.
바로 이러한 추상화야말로 전통의 현대적 재창조의 열쇠이며 동시에 그 척도가 된다. 전통의상을 현대적으로 개작했으나 전혀 비한국적 의상이 되어버린 소위 아리랑 드레스의 실패, 전통적인 건축 양식을 이것저것 통일성과 조화없이 모아놓은 경복궁 현대박물관이 전혀 비현대적이며 비창조적인 인상을 주게 된 것, 장충동 국립극장이나 세종로의 세종문화회관이 아직도 한국건축양식의 현대적 유형이 되지 못한 점 등, 이 모든 것들이 다 어떻게 전통을 현대적 양식으로 추상화시키느냐 하는 그 추상화의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연극에 있어서도 그 점은 마찬가지다. 이제까지의 대부분의 시도는 기껏하여 전통극의 어느 형식만을 그대로 모방하거나 빌어와 새로운 내용 속에 억지로 덧붙이는 것이 고작이라 형식과 내용이 따로따로 별개의 것처럼 존재했거나 아니면 현대적인 양식의 극 속에 마치 혹처럼 갑자기 옛 춤이나 노래가 튀어나와 강한 위화감을 주는 것들이었다.
이번<물도리동>은 한국적 연극을 정립하기 위한 단계적 작업이라 했다. 사실 무엇이 한국적 연극이냐 하는 문제부터 심각히 연구되어야 하겠지만, 서로 일단 그것을 단순히 전통극의 외양만 닮으면 되겠지 하는 종래의 생각에서 벗어나 한국인의 의식과 정서의 핵을 한국의 설화에서 찾아 이를 연극적으로 형상화시켜야겠다는 의도는 바람직한 것이었다. 또한 그러한 연극적 형상화를 위해 모든 연극적 요소들을 새로이 창안해서 만들어 나가려던 계획도 좋은 것이었다. 의도와 계획 그 자체와 완성된 예술 작품은 엄격히 구분되어야겠지만 민예의 작업이 궁극적인 목표를 향한 단계적 작업이며 따라서 시행착오를 각오하는 것이기에 방향설정 자체에 일차적으로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 같다.
(<주간조선>, 한상철, 1979년 6월 11일, '전통극의 재창조')
작가의 말 - 허규(許圭)
1972년 12월 24일. 문화방송 옆 지금의 '이딸리아노' 3층 '새문화스튜디오' 사무실에서 연탄난로를 벗 삼아 하회탈을 만들기 시작했다. 인형극 공연을 위해 만들다 좀 남은 종이 떡 종이를 물에 불려 풀어서 풀로 짓이긴 것을 가지고 주먹크기의 하회탈 9개(국보121호)를 빚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을 빚게 된 동기나 이유는 뚜렷하지 않았다. 연말의 뒤숭숭하고 허망하고 무료한 심정을 한낱 종이 떡을 만지면서 틀을 잡고 난로 불에 말리고 칼질을 하고 센드-페이퍼로 갈아내는 것으로 시간의 흐름을 잊어보려고 했을 뿐이었던 것 같다. 단지 그 해의 마지막 일주일을 별소득은 없지만 바쁘게 보내자는 심산으로 12월 31일 밤까지 완성하기로 작정하고 만들어 나갔다. 예정보다 하루 늦어 다음해 1월 1일 채색까지 끝마쳤는데, 너무 조급하게 만든 탓인지, 아니면 재주가 없어 그런지 마음에 드는 탈은 몇 개 없고 대부분 실패작이 되었다. [물도리동]을 극본으로 구상하기 시작한 것은 그때 부터였다. 하회탈 제작자로 전해지는 허 도령, 그 절묘하고 신기에 가까운 조각 솜씨에 대해 존경심을 갖게 됐고, 아울러 나의 무 재주를 통감하였다. 창작이 아니고 모조품을 하는데도 비슷하게 되지 않는 데 대한 열등감 같은 것이 나를 괴롭히는 것이다. 그래서 전설대로 허 도령은 신의 계시에 의해 탈을 만든 것이라고 믿어버리기로 했지만 神(신)의 유무에 대해서 회의적인 나에게는 그리 마음이 내키는 결론은 못되었다. 그러나 하회탈제작에 관한 짤막한 전설, 즉 허 도령이 꿈에 신으로부터 현시를 받아 금줄을 쳐놓고 포장 속에서 혼신의 힘을 기울여 탈을 만들고 있을 때 그를 사모한 마을 처녀가 그리움을 못 이겨 포장을 들치고 보는 순간 도령은 열 두 개 째 마지막 탈(이매)의 턱을 완성 못하고 피를 토하고 죽었다는 전설은 좋은 연극 소재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하고 연출이 본업인 사람이 언감생심 희곡을 써보겠노라 작심한 것이다. 현지답사와 그 밖의 자료 수집을 통해서 하회동. 선낭 설화를 발견했다. 하회동 골맥이 신(동신=서낭신)은 하회동 서쪽 강 건너 의성군 월내 마을에서 시집 온 심씨 과부 서낭이라는 애기를 듣고 나 나름의 상상을 해봤다. 서낭설화는 보편적으로 恨(한)과 怨(원)을 품고 죽은 사람의 전설이므로 하회동 골맥이신 설화와 허도령 전설을 한 사건으로 결합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고 거기에다 하회탈 중에서 가장 크고 가장 잘 만들어진 각시 탈과 별신굿 연희내용과의 상관관계, 그리고 별신굿에 관한 구전 설화등을 작품의 배경으로 삼아 구성하면 인간의 영원한 제인 죽음과 삶, 그리고 참된 자유가 무엇인가를 추구해 볼 수 있다고 믿고 작품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초고를 끝내기까지 4년 가까이 걸렸다. 초고는 당시 민예극장이 실험목표로 삼고 있었던 마당극 형식으로 썼었는데 76년 가을 일본에서 초청 공연얘기가 있어서 그 전년도에 민예극장이 실험했던 [한네의 승천]에 이른 두번째의 한국가무극 형식으로 개작을 하면서 미진했던 부분을 보완, 대폭 수정하여 연극제에 참가하기에 이른 것이다. 작가나 연출자는 물론 창작을 하는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작품에 대해서 작품으로 표현하는 것 외의 수단으로 이러쿵저러쿵 주석을 달고 변명을 하는 것이 유쾌한 일이 못된다. 그러나 [물도리동]에 한해서는 몇 가지 분명히 밝혀 두어야 할 게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이 작품(=공연)이나 개인의 극본이나 연출작품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4년 동안 추구해온 독창적 한국연극의 모색과 정립이라는 극단 [민예극장]의 이념과 실천방안에 바탕을 두고 극단 단원들과 민족 극 정립이라는 국가적 요망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돼 보자는 뜻을 가진 몇몇 분들의 열성, 창의성 재능, 협동이 합쳐졌기 때문에 막을 올릴 수 있었다는 것을 밝혀두어야 하겠고, 다음 보전되어오는 9개의 하회탈외에 전해지지 않는 3개탈(별채, 떡다리, 도령)을 별신굿에서의 탈들의 역할, 성격, 조각수법, 구전자료 등을 참작하여 복원한 것, 巫儀(무의)의 연극적 기능 실험, 단원들이 창단 이래 익혀온 판소리, 가곡, 가사, 무가, 탈춤 등 우리 민족의 연극 유산을 바탕으로 하여 재창조하였다는 것도 아울러 밝혀두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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