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품의 배경은 경기도 파주군 파평면 율곡리에 있는 휴전선 부근의 화석정이라는 작은 마을로 되어 있다. 이 작품은 장면마다 해설자가 등장하여 극의 진행을 이끌어 가고 있으며 화석정에서 바로 보이는 임진강가, 윤구노인집 마당과 안방에서 동시에 연극이 진행되고 무대장치 (시제와 공간장소)는 해설자의 설명이 이를 대신해준다. 이 작품에 나타난 비목은 전쟁세대들의 고향에 대한 한과 어머니 봉순의 가슴속에 맺혀있는 한국여인의 한, 즉 6.25민족상쟁의 비극이 남겼던 의미를 오늘의 세대에 대비시켜 그 허망함을 말해주고 있다. 결국 이 작품은 우리 민족의 자화상이다. *작품줄거리 : 6.25당시 임진강 건너의 고향인 동파리를 지키겠다고 전쟁터로 나간 둘째 아들의 전사소식을 모르는채 출입 영농을 하며 옛 고향의 향수를 못잊어하는 윤구 노인과 그 땅을 팔아서 서울로 가장사를 하겠다는 그의 아들과 손자사이의 갈등으로 극은 시작된다. 이들의 갈등이 점점 심화될 즈음 노인의 고향인 동파리를 지키나 눈과 팔, 다리를 잃은 송대섭의 출연으로 극은 급선회 된다.
연극<비목>은 1976년도에 이재현(李載賢)이 희곡화하여 서울의 극단 여인극장이 세실극장에서 1977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강유정(姜由禎) 연출로 공연하였다. 제1회 대한민국연극제 참가작품으로 상연된 이 작품의 출연에는 정동환(해설자), 이승옥(봉순), 최상설, 유병준, 최종원, 차영한, 김대식, 유영환, 김창완, 정수정, 이영란, 김명희 등이 출연하였다. 당시의 팜플릿에서 작가 이재현은 다음과 같이 작의를 밝히고 있다.
“전쟁의 상흔을 요새도 문득문득 보곤 한다. 그럴 때마다 전쟁이 아직도 우리 주위 도처에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실감한다. 지난 전쟁으로 인해 우리나라와 민족이 겪은 수난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그 비극의 상처를 우리는 아직까지도 그대로 안고 있다. …(중략)… 6·25 당시 무명용사들의 애절한 사연은 국민 모두의 심금을 울렸었다. 그 사연의 주인공들이 하나의 보잘것없는 ‘목비(木碑)’가 되어 전방 곳곳에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이다. 그들도 분명 우리의 국군이었고, 어느 군인 못지않게 용감히 싸우다 전사했건만 국립묘지에는 그들을 위한 한치의 땅도 없다. 오랜 세월 비바람 속에 이제는 퇴색할 대로 퇴색하고 그 형체조차 허물어져 버린 ‘비목’의 사연은 바로 우리 민족의 수난사를 그대로 말해 주고 있다.
희곡<비목>은 가곡<비목>에서 비롯된 것이다. 작사자 한명희(韓明熙) 형은 나와 서울대학교 동기동창임으로 그를 만나 ‘비목’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는 ROTC 장교로서 화천 북방 백암산에서 복무하며 ‘비목’의 현장을 목격했다는 것이다. 산목련이 만발한 민통선 북방 바로 김일성 고지와 마주하고 있는 그 곳에는 인적이 끊긴 지 20여 년이 지나 무성한 잡초만이 자라 있는 너무나 외지고 쓸쓸한 곳이란다.
이<비목>의 사연이 나에게 너무나 큰 공감을 줬기 때문에 곧 집필을 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당시 민통선 안에 출입하며 농사짓는 ‘출입영농단’의 소재를 극화하여 실향민의 애환을 그리려고 했던 터였다.
“화석정(花石亭)앞 동파리(東波里)로 무대를 옮긴 것은 두 소재를 연결하기 위해서였다. 집필을 위해 사단의 허가를 얻어 두 차례 동파리를 찾았을 때 바로 비목의 현장이 도처에 있음을 목격하고 나대로 큰 감명을 받았었다. 파고다 담배를 애써 권하며 지난 이야기를 들려주던 노인이 바로 이 작품의 주인공으로 이가 유난히도 하얀 부인인 바로 봉순이다. 원두막 옆에서 샛밥을 먹으며 말참견을 하던 청년이 상필일 것이다.”라고 밝혔다. 이 작품은 장면의 많은 변화 때문에 해설자를 등장시켜 극 진행을 이끌게 하고 있었으며, 화석정에서 바로 보이는 임진강가 윤구 노인집 마당과 안방에서 동시에 연극이 진행되도록 하고 있었다. 무대장치는 해설자의 설명이 이를 대신해 주고 있었다.
‘잘살아 보자’는 구호가 이 접전지역에도 들어와 땅을 사겠다는 사장의 등장으로 고향 땅을 지키려는 윤구와 그 땅을 팔아서 서울로 가 장사를 하겠다는 그의 아들과 손자 사이에 갈등이 시작된다. 들어가 살지도 못하는 고향은 이제 소용없다고 윤구에게 반항하며 그의 분노를 사게 된다. 윤구, 그가 고향을 지키려는 집념은 젊은 세대에게는 현실감이 없고 할아버지(윤구)가 답답할 뿐이다. 하지만 윤구에게는 조상이 대대로 물려준 땅이며 더구나 둘째아들(창윤)이 어린 나이로 그 땅을 지키려다가 그 곳 어느 산 계곡이나 기슭에 묻혀 있을 것이라는 확신감 때문에 그 땅 동파리는 생명의 젖줄이 되고 있는 것이다. 할아버지와 손자와의 이러한 갈등이 한참 고조되어갈 때 잊혀진 전쟁의 상처를 환기시키는 무명상이용사가 북에 두고 온 산하를 한 발이라도 가깝게 보고 싶어 6·25 동파리 전투에 참가했던 기억을 되살려 보려고 화석정을 찾아온다.
이 무명상이용사한테서 윤구는 무명용사들의 애처로운 무용담을 듣는다. 윤구는 내 아들 창윤이도 비목이 되어 거기에 묻혀 있을 것이라고 하면서 비통에 사로잡힌다. 윤구는 큰아들과 며느리 손자를 데리고 군 사단의 허락을 받아 백암산 기슭을 찾는다. 여기 세 비목이 등장하는데 대사처리를 세 비목은 시를 낭독하듯 표현한다. 연극에서는 이 장면을 비목을 만들지 않고 있었다. 세 인물은 북남동으로 위치를 설정하고 각기 방향을 향해 정면으로 관객석을 마주 바라보고 앉혀 놓았다. 그리고 조명으로 백암산 계곡과 기슭을 처리하여 울창한 계곡 속에서 하늘은 북청색으로 뒤덮힌 색조로 나타내고 음향효과인 바람소리, 맹수들의 울음소리가 들리며 세 가족들 등장과 함께<비목>주제곡이 깔리게 하고 있었다.
세 비목이 이끼낀 화석이 되듯이 앉혀 있는 위치에 따라 인물의 머리 위에 탑(Top)만 떨어뜨려 얼굴만 비춰주고 있었다. 세 가족과 세 비목(혼)의 만남은 내 아들 창윤이가 아니고 내 아들이 아니더라도 우리를 지키려고 싸우다가 스러져 간 이 젊은 무명용사들이 곧 윤구에게는 내 아들 창윤이라는 신념이 고향 땅을 지키려는 집념과 동일시되어 감동 어린 해후를 하는 것이다. 윤구가 둘째아들(창윤)을 가슴 태우며 그리던 마음이 이 무명용사들의 영전에 처음으로 제사를 드리게 된 것이다. 이 장면이 자칫 감상적인 데로 빠지기 쉬운데, 내 아들 내 오빠의 일개인적인 것보다 우리를 지켜 준 무명용사들, 조상이 물려준 내 고장을 지키려는 윤구, 우리들 정신을 지배하고 있는 전통성과 함께 연결되어 있었다.
이 감동 어린 해후가 젊은 세대의 손자로 하여금 화석정 농협에 취직을 하여 농사일을 거들고 열심히 고향을 지키겠다고 다짐하는 것으로 보여 줬다. 오늘도 윤구는 동파리로 배를 타고 농사를 지으러 간다. 일상 속에 잠겨 있는 우리의 숙명과 한을, 우리들의 실제 생활과 밀착시켜 담담하게 행동화시켜 나타내고 있었다.
이상일 비평-
6·25는 민족사의 차원은 둘째치고라도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체험으로 볼 때 엄청난 재난이었다. 그렇다면 6·25의 상처는 어차피 연극예술의 무대 위에서도 어떤 모습으로든지 재현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우리가 몸소 겪은 너무나 가까운 한의 역사와 아픔의 체험을 극문학이나 연극예술로써 이정표 하나 제대로 마련해 놓지 못하고 있는 설정이다. 다른 분야는 말할 것 없이 우리의 연극무대만을 놓고 볼 때에 그 무대 위에 잔영으로 남아 있는 6·25의 흔적이라는 것은 아쉽게도 육신의 상처일 뿐이지 마음에 깊이 패인 아픈 흔적이 아니다. 그것은 6·25의 체험을 재현하는 데에 역사의식이 결핍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주제 빈곤의 현상 가운데서 거론될 수 있는 작품이 여인극장의<비목>이다.
이재현(李載賢)의<비목>은 요즈음에 노래로 더 잘 알려진 제목인데 그 비목의 현장이 연극으로는 신파조가 되어 비감스럽기보다는 우스꽝스러운 느낌을 준다. 극의 초점은 비목의 현장 한 곳에 집중되어 있다고 해도 좋을 형편이다. 그러나 이야기 중심으로 옮겨가는 길목에는 많은 꾸밈이 숨겨져 있다. 연극은 본디 허구의 얼개라고 하지만 그것은 진실을 담은 허구이기 때문에 현실의 사건보다 더 관객의 가슴을 찌를 수 있는 것이다. 6·25의 전율을 다룬<비목>은 전장에서 숨진 이름없는 병사들의 무덤에 박힌 나무토막 하나 하나가 현실의 어떤 웅변보다도 더 많은 메시지를 전할 수 있다는 것을 실증해 준다. 그러나 6·25가 흐트러질 위험이 있다. 작가 이재현은 고향의 흙에 매달리는 늙은 세대와 흙의 향수를 잃어버린 젊은 세대 사이에 비목을 세워 놓고 그 둘을 결합시키려고 한다. 그러나 비목의 가슴 아픈 상처는 육신에 새겨진 흔적이 아니라 마음을 후벼 놓은 상처라는 사실을 지나쳐 버리고 있다. 더욱이 작가의 손이 닿지 않은 면은 연출이나 연기자들이 드러내어 줘야 했는데 그들은 이야기의 흐름을 좇기에 바빠서 배후의 진실을 캐지 모했다. 6·25가 남긴 상처가 기껏해야 흙을 둘러싼 두 세대의 대립 정도이고 더구나 그 대립이 그처럼 행복한 결말로 끝나야 할 정도의 예사로운 흔적일까? 비목에 서린 혼백은 한이고 원망이다. 그것은 한국인만이 겪은 아픔이요 가장 한국적인 숨결이다. 그것을 작가는 가장 손쉬운 결말로 끌고 갔다. 그래서 마침내 비목의 아픈 이야기를 한낱 육체의 상처로밖에 처리하지 못함으로써 6·25라고 하는 중후한 주제를 예술의 형식으로 내면화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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