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염재만 '반노'

clint 2015. 11. 17. 22:29

 

 

 

 

한척의 배와 참한 색시를 얻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꿈인, 성실하고 우직한 진두-  그러나 섬을 떠나온 진두는 가히 성적 탐욕의 화신이라 할 수 있는 홍아와의 만남으로 인해 그 소박했던 꿈마저 잃어갈 수밖에 없는 처지에 이르고 만다. 홍아의 끝없는 성적 탐욕의 노리개로 전락한 진두는 마침내 절도행각까지 저지르게 되며 철창에 갇히는 신세로 떨어지게 되고-, 감방에서 풀려난 진두는 홍아와 함께 세속과는 거리가 먼 외진 산속 오두막집으로 거처를 옮긴다. 홍아로서는 이웃의 눈치나 평판 따위 같은 거추장스러울 게 없는 이곳이 너무 좋기만 했다. 마치 성도착증환자 처럼 밤 낮 없이 집요하게 요구하는 홍아의 성적 탐욕에 진두의 영육이 쇄락해지기 시작한다. 홍아는 이런 진두에게 오히려 사랑이 식었다며 칼을 휘두르거나 같이 죽자고 생떼까지 쓰게 된다. 홍아는 진두가 떠날 것이 두려웠다. 임신한 애기까지 약을 먹고 사산시키는 행패까지 부린다.핏덩이를 묻으며 짐승 같은 슬픔을 토해내는 진두-. 그는 마침내 홍아를 떠나기로 결심한다. 동해안의 작은 부두에는 홍아의 광적인 울부짖음이 “두~웅”뱃고동 소리와 함께 메아리친다.“이 놈아 나를 두고 못 간다! 이놈아 못 간다!”

통통선 꽁무니에 몸을 실은 진두는 선착장 끝자락에 앉아 울부짖는 홍아의 모습을 연민으로 바라면서 이렇게 마음을 달래고 있다.“자유를 찾아 섬으로 간다.”라고-.

 

 

 

 

' 반노'는 작가 염재만의 처녀작이자, 대표작이며 최대의 히트작인 반면, 작가 자신과 가족들에게 엄청난 시련을 안겨준 "고난의 십자가" 그 자체였다.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다닌 저자가 학창시절과, 군대 생활, 그리고 공무원과 직장생활을 전전하며 짬짬이 써왔던 글들을 묶어 첫 소설집 「반노」를 낼 때까지만 해도 작가는 흔히 있을 법한 "약간의 글재주를 가진" 그러나 남다른 그 무엇으로 일찍부터 주목받지는 못하는, 평범한 문학청년이었다. 그러나 이 작품집은 인쇄가 완료된 상태에서 출판도 하기 전에 검찰에 의해 "음란문서"로 낙인찍히고, 작가 자신은 "음란문서위조죄"로 기소되는 어이없는 사태가 발생하면서 모든 것이 달라지게 되었다.
작품집의 제목이자 대표작이었던 「반노」는 "…서로의 국부가 교면스러운 빛을 발산하면서 한껏 부조되고 그 위에 온갖 충격이 요동쳐 갑니다"는 등 노골적인 성묘사를 하고 있다는 이유로 판금 및 기소되어 1심에서 유죄판결을 받았다. 3선 개헌을 앞두고 "퇴폐척결"을 이유로 사전 검열제도를 과도하게 실행했던 잘못된 결과였다.

 

 

 

작가가 이에 불복하여 제기한 항소심에서는「이 소설은 인간의 성에 대한 본능을 그 주제로 하고 있고, 군데군데 성교장면이 나오기는 하나 남녀간의 성교에서 향락적이고 유희적인 면을 탈색해 버리고 본능에 의한 맹목적인 성교와 그 뒤에 오는 허망함을 반복 묘사함으로써 인간에 내재하는 성에 대한 권태와 허무함을 깨닫게 하고, 그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자아를 발견하는 것을 주제로 한 작품으로서, 그 주제나 표현에 있어 음란성, 즉 선정적인 면이 없다」고 판시하여 무죄를 선고하였다. 그러나 뒤이은 검찰의 상고로 사건을 맡게 된 대법원은 심리미진을 이유로 무죄판결을 파기한 후 2심 법원에 환송하였고, 다시 환송 후 항소심이 열리게 된다. 여기서 다시 무죄 판결이 나오자 검찰의 재차 상고로 다시 대법원의 최종 판결이 나오기까지 무려 7년! 대법원은 "「반노」의... 기재 사실이...과도하게 성욕을 자극시키거나 ...노골적이고 구체적인 묘사라고 볼 수 없다고 판단하고, 나아가...그 전체적인 내용의 흐름이 인간에 내재하는 향락적인 성욕에 반항함으로서... 새로운 자아를 발견하는 과정으로 이끌어 매듭된 사실"을 인정하여 공소사실에 대한 "무죄"를 최종 선고하였다. 이 판결은 문학작품의 음란성 여부는 그 작품 중 어느 일부분만을 따로 때어 논할 수 없고 그 작품 전체와 관련시켜 판단해야 한다는, 문예작품 성묘사의 한계에 대한 우리나라 최초의 대법원 판례로서 내외에 큰 주목을 받았다.

 

 

 

 

소설 「반노」는 경건한 생활을 바탕으로 초자아적인 삶을 추구하는 진두라는 남성과 성에 얽매인 채 오직 그 속에서만 삶의 의미를 찾아보려는 홍아라는 여인이 함께 어울려 살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여인과 동거를 하면서도 새로운 인생의 방향을 모색하는 남자와 성의 화신이라 할 만큼 매몰돼 있는 여자는 사사건건 대립을 하게 되고 결국은 결별하게 된다는 것이 기본 줄거리이다. 작가는 「반노」가 "제목이 말해주듯 복종의 사슬을 끊고 인간의 고차원적인 세계, 즉 제2의 자아 발견을 구하는 인간의 본능을 그린 작품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소설의 내면을 들여다 볼 줄 몰랐던 공안당국의 터무니없는 단속 때문에 "외설 작가"라는 죄인 아닌 죄인의 굴레를 둘러쓴 7년 동안 작가의 삶은 크게 변해 있었다. 정상적인 직장생활을 할 수 없었음은 문론 가정은 파경을 맞았고, 작가 자신은 신경쇠약에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대법원의 판결로 별다른 작품 활동 없이도 이미 유명작가가 되어버린 그는 이후 한진출판사에 정착하여 새로운 작품 활동에 전념하게 되면서 차츰 전업 작가로서의 입지를 굳혀가게 된다. 첫 출판 당시 작품집에 수록되었던 중편소설 「반노」를 단행본 장편소설로 재구성하여 "합법적으로" 출판하여 유례없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또한 같은 이름의 영화도 제작되어 큰 흥행을 거두었다. 작가의 사후인 2006년 9월에는 서울대에서 제정한 역사적 의미가 있는 판금도서 20권의 첫 번째로 선정되어 이 작품의 문학사적 가치를 다시 한 번 재평가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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