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이반, '바람타는 성'

clint 2015. 11. 14. 10:24

 

1901년 구한말의 제주 섬. 제주목사 이상규가 도민들의 세금을 거두어 사리사욕을 채우고 면직되어 간 뒤, 새로이 파견된 봉세관은 백성들의 어려움에는 아랑곳없이 더 많은 세금을 부과하자, 도민들의 원성은 더욱 깊어진다. 이때 봉세관의 말음들은 불란서의 힘을 업고 교세확장에 눈이 어둡던 불란서 신부들의 교폐와 합세하여 교민들을 괴롭힌다. 백성들은 자구책으로 「상무사」라는 자위민단을 만들어 도민을 보호하려고 한다. 이로 인하여 천주교와 상무사의 마찰은 힘의 대결로 발전하고, 상무사 민병들은 관노였던 이재수를 중심으로 난을 일으킨다. 이 틈을 노린 일본 첩자 아라가와 등이 제주도가 독립하기를 권하지만 관노 이재수는 우리 백성을 둘로 가를 수 없다는 뜻을 갖고 자수를 하여 사형 당한다.
역사에서는「제주민란」, 「제주교난」이라고 말하고 있는「이재수의 난」은 불란서, 일본, 러시아 등의 외세에 대하여 백성들
스스로 힘을 합해 막으려 했던 의지와 천주교세에 대하여 무속신앙의 자존을 갖으려 했던 의미를 갖고 있다.

 

 

 

 

이재수의 난은 1901년 제주도민들간의 경제적 이해 대립관계와 종교적인 갈등, 일본인 수산업자들과 프랑스 선교사세력들의 대립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발생한 사건이다. 당시 제주도에는 아라카와[荒川留十郞]를 비롯한 일본인 수산업자들이 대거 진출하여 활동했는데, 대정군수였던 채구석(蔡龜錫)과 유림 오대현(吳大鉉), 관노출신인 이재수 등은 상무사(商務社)를 설립하고, 일본인 업자들과 결탁하여 어로독점을 꾀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부에서 파견된 제주도 봉세관(捧稅官) 강봉헌(姜鳳憲)이 프랑스 선교사, 천주교도들과 결탁하여 상무사측에 대규모 잡세를 부과하고, 어로독점에 제동을 걸면서 강봉헌측과 상무사측이 심각하게 대립하게 되었다. 한편 강봉헌은 일반 도민들에게도 엄청난 잡세를 부과했기 때문에 관에 대한 제주도민들의 불만도 점차 고조되었다. 그런데 강봉헌은 잡세의 징수에 천주교도들을 동원했기 때문에 제주도민들의 천주교도들에 대한 적대감도 점차 싹터 갔다. 더구나 천주교도들은 신당(神堂)과 신목(神木)을 불사르는 등, 제주도 전래의 전통을 무시했기 때문에 적대감은 더욱 심화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1901년 2월 9일 제주도민 오신락(吳信洛)의 죽음이 천주교도들의 소행이었다는 소문이 퍼지고, 5월에 들어 상무사측이 천주교도들과 충돌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에 상무사측은 누적된 제주도민들의 불만을 배경으로 대대적으로 봉기를 일으켰다.

 

 

 

 

 5월 16일 이재수의 지휘 아래 수천 명의 도민들이 제주성을 포위하고 성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에 천주교도들과 제주관청은 성문을 닫아걸고 대항했지만, 5월 28일 제주성이 함락되었고 수백 명의 천주교도들이 죽음을 당했다. 이에 정부는 군대를 파견하여 봉기군을 진압하고 강봉헌·채구석·이재수 등을 잡아 서울로 압송했다. 한편 프랑스 신부들은 뮈텔 주교를 통해 프랑스 함대의 개입을 요청했는데, 프랑스 함대는 난이 진압된 후에 도착했다. 프랑스는 신부들의 피해와 천주교도들의 죽음을 이유로 서울로 압송된 자들의 처벌과 배상금을 요구했다. 이 요청에 따라 조선정부는 10월 9일 이재수 등에게 교수형을 선고했다. 프랑스는 또한 죽은 천주교도들의 묘지를 안장하는 문제를 제기했는데, 이는 1903년말이 되어서야 사라봉(沙羅峰) 아래 황사평(黃沙坪)에 안장하는 것으로 종결되었다. 또한 5,160원의 배상금이 프랑스에 지급되었으며, 배상금의 이자인 722원은 제주도민들의 탄원으로 석방된 채구석이 도민들로부터 걷어 지급했다.

 

 

 

 

 이반
함경남도 홍원군에서 태어나 강원도 속초에서 성장했다. 1961년 숭실대학교 문리대 철학과에 입학하고 1992년 동대학교 대학원에서 철학박사(예술철학) 학위를 수여했다. 1966년 잡지 '새벗'에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1968년 서울 Y소극단 '탈'의 연극운동 주도, 극작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