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두가 잠든 새벽, 12명중 한명인 푸피는 몰래 숨겨 놓은 빵을 혼자 먹다가 다른 수감자들에게 들키고 서로 먹겠다고 빼앗고 싸우는 와중에 푸피가 죽게 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들은 모두 굶주려있었기에 빵 부스러기 하나에도 상당히 예민한 상태였고 이성을 잃은 그 상황에서 푸피의 시체를 요리해서 먹을 것인가 먹지 않을 것인가로 심한 갈등을 겪는다. 그중 수감자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온켈은 푸피를 요리해서 먹는 것을 강경하게 반대했다. 그래서 나머지 수감자들은 온켈이 잠든 후 암묵적으로 합의해 푸피를 요리한다. 요리에 일가견이 있는 바이스가 푸피를 요리하게 되고 그들은 요리가 완성되는 시간의 지루함을 달래기 위한 극중극을 시작한다. 요리를 완성시키는 단계에서 모두가 조바심을 내게 되고 또 한 번의 몸싸움이 벌어지면서 가장 나이가 어린 라마세더가 죽게 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라마세더의 죽음으로 인해 수감자들은 마음속 갈등을 겪긴 하지만 계속 요리를 진행한다. 이어 온켈은 자신의 꿈 이야기를 하는데 푸피요리가 차려진 식사에 수감자들을 초대하는 꿈이었다. 그곳에 푸피의 딸이 참석하여 자신의 어머니는 어디에 있냐고 묻는다. 그 꿈 이야기로 온켈은 간접적으로 수감자들을 회유하려 애쓰지만
그에 굴하지 않는 클라웁은 처음 수감 실에 끌려오던 날 모두의 탈출 계획을 온켈이 망쳐놨기 때문에 자신들이 여기에 잡힌 신세가 된 거라고 온켈에게 반격한다. 그렇게 클라웁이 모두를 선동하여 온켈은 그들에게 집단구타를 당하게 된다. 그리고 바이스는 요리가 완성됨을 알린다. 하지만 처음과는 다르게 사람들은 망설인다. 그 와중에 독일인 장교 쉬레킹어가 등장하고 이들이 푸피를 요리했음을 알게 된다.
그는 수감자들에게 푸피요리를 먹는 것과 가스실로 향하는 것 둘 중 하나를 선택하게 하고 남은 10명중 단 두 명만이 푸피요리를 먹는다. 푸피를 요리하는 데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클라웁도 정작 요리를 한 바이스도 밀고자 글라츠도 목소리를 잃은 하아스도 유태인도 아닌 채 잡혀온 집시도 모두 푸피를 먹지 않고 죽음을 택한다. 그들 중 가장 이성적이게 행동했던 헬타이와 히르쉴러 두 사람만이 살아남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먹기를 강요했던 독일인 장교 쉬레킹어가 이 요리를 게걸스럽게 먹음과 동시에 연극은 막을 내린다.

타보리의 '식인종들'은 독일에서 앞서 공연되었던 『안네 프랑크의 일기』와 롤프 호호후트의 '대리인', 피터 바이스의 "조사" 에 이어 아우슈비츠를 소재로 하고 있는 드문 작품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안네 프랑크의 일기'가 사실 그 자체를 전달하면서 관객들의 감성에 호소하는 극이었고, 호호후트와 바이스의 작품이 수용자들로 하여금 객관적 사실을 직시하게 함으로써 정치적, 사회적 상황에 대한 통찰을 유도한 반면 타보리의 작품은 아주 새로운 형태의 아우슈비츠의 무대화이다. 타보리에게 있어 아우슈비츠와의 논쟁, 즉 과거 극복은 감성에의 호소나, 기록 극이 의도하였던바 정치적, 사회적 참여에 있지 않다. 그에게 국장은 법정도, 가르침의 성지도 아니다. 타보리는 먼저 기록 극이 대상으로 삼지 않은 희생자들의 정신적 쇼크에 새로운 강조점을 둔다. 또한 호호후트나 바이스의 경우 유태인들이 부차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데, 타보리는 희생자로서의 유태인들을 극의 중심에 둔다. 그렇다고 그가 유태인들을 감상적으로 미화시키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1969년 베를린에서의 초청 공연 당시 항의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는데, 그것은 타보리가 살아남으려는 욕구에 사로잡혀 있는 아우슈비츠 수감자들의 '경멸과 혐오스러움' 까지도 형상화했기 때문이다.
또한 타보리는 "아우슈비츠 이후 불가능하게 된 것은 시詩 라기보다는 오히려 감상성이자 경외이다. 죽은 자들의 고통으로 동정을 얻으려 하거나 완전히 내버려진 상태의 그들의 짓눌린 분노를 한탄하는 것은 죽은 자들에 대한 모욕이 될 것이다. 그 사건은 모든 눈물을 거두어간다”고 명백히 하였다. 이러한 입장으로부터 감상적으로 아우슈비츠에 접근하는 데 분명한 거리를 취하였다. 그러면 타보리는 아우슈비츠를 어떻게 무대화하고 있는가? 그에게 아우슈비츠의 무대화는 어떠한 방식으로 가능한가? '식인종들'은 전통적인 모방 원칙을 따르지 않는다. 사건 진행, 시간, 공간, 인물은 다층적이며 개방적이다. 사실적 묘사는 꿈, 회상, 성찰을 통해 갑작스럽게 중단되는가 하면, 심각한 내용은 익살, 그로테스크를 통해 무력해진다. 중심적인 사건과 인물은 극중극과 역할극을 통해 연속성과 동질성을 유지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작가는 전통 극에서의 종교적 휴머니즘 모델을 포기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이 작품의 중심인물인 온켈은 '상당히 허구화되고, 아우라를 지닌 인물'에 속한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다른 아우슈비츠 수감자들이 살아남으려는 욕구에만 사로잡혀 있다면 온켈은 끝까지 자신의 종교적 입장을 견지하며, 자신의 믿음을 관철시킨다.

'식인종들'은 작가가 작품의 첫머리에 미리 밝혀두고 있듯 작가의 개인사와 밀접히 관련된 작품이다. 작품의 중심인물인 온켈은 바로 작가의 아버지 코르넬리우스 타보리를 구현하고 있다. 또한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두 명의 살아남은 자들 덕분이다.”라고 함으로써 작품이 곧 실제 사건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예시한다.
총 2막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작품은 아우슈비츠에서 실제 있었다는 식인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다. 사건이 시작되는 장소는 강제수용소이다. 첫 장면은 "확성기에서 죽어가는 사람 들이 자신들이 좋아하는 음식을 큰 소리로 외치는 소리”로 시작된다. 그런데 사건의 장소 가 병사는 플롯에 지나지 않는다. 시간 역시 과거, 현재, 극의 현실 등으로 다차원적이다.
제일 먼저 등장하는 온켈은 흰 장갑을 손에 낀다. 흰 장갑은 그에 대한 상징이자, 그를 다른 인물들과 구별시키는 도구이기도 하다. 뚱뚱한 푸피가 몰래 숨겨 놓은 빵을 먹다 다른 수감자들에게 들켜 죽임까지 당한다. 빵을 빼앗는 와중에 일어난 사고였다. 이때 온켈만이 격투를 저지하며, 수감자들의 행위를 비난한다. 수감자들은 이에 그치지 않고 죽은 푸피를 요리하자는 데 합의한다. 파리 한 마리를 서로 잡으려 하는 데에서나, 요리법을 들을 때 마치 개들처럼 침을 질질 흘리는 모습에서 수감자들의 굶주림이 극한 상황이라는 것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수감자들에게서 동물적인 본성 이외에 다른 인간적 모습이란 찾아보기 힘들다. 단지 온켈만이 수감자들의 야만적인 행위에 반기를 들고 저지하고 나선다. 수감자들 중에 가장 연장자인 온켈에게 이전에 다른 수감자들이 그를 신뢰한다는 표시로 칼을 맡겨 놓았었다. 모든 요리 준비를 마친 수감자들은 격투 끝에 그에게서 칼을 빼앗는다.
바로 이 격투 장면으로부터 살아남은 두 사람, 히르쉴러와 헬타이의 대화가 이어진다. 이 두 사람은 수용소에서 살아남아 현재 안락한 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이들의 대화를 통해 앞의 사건은 이미 25년 전의 지난 이야기로 화한다. 그런데 이들은 아직 그 과거의 사건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히르쉴러는 고기 먹는 일을 꺼려하며, 헬타이는 음식 먹을 때 칼을 보려 하지 않는다. 이 사실이 두 사람의 대화와 히르쉴러가 관객에게 직접 말을 하는 방식으로 전달된다. 이렇게 이무런 극적 변화 없이 무대가 현재가 되었다가 다시 과거 25년 전의 수용소로 옮겨진다. 온켈이 잠든 사이 푸피 요리를 시작한 수감자들은 오직 요리가 완성되는 데에만 연연한다. 여기에서 극중극이 도입된다. 극중극은 요리 완성에만 애타하는 수감자들의 지루함을 달래기 위한 방편과도 연결되어 있다. 극중극에서는 다른 무엇보다도 수감자들의 기본적인 욕구가 표출된다. 간소시지를 사려는 열망, 애정에 대한 갈구가 그것이다. 이러한 극중극 사이에도 에피소드가 개입한다. 즉, 랑에게 젖을 빨리던 어머니 역한의 하아스가 극으로부터 빠져나와 관객에게 직접 말을 한다. 본래 정치가였던 하아스가 어떠한 상황에서 체포되었고, 그의 특이한 성격이 어땠는지를 아무런 극적 연관 없이 들려준다. 이러한 방식으로 극적 오락과 사실적 진지함이 지그재그로 진행된다. 또 온켈은 하아스와 바이스의 애정 표현에 격분해 하며 그 자신도 극에 참여한다. 온켈은 계속 커피를 마시며, 자신의 주치의와 대화를 나눈다. 다른 수감자들이 극을 중지시킬 정도로 온켈은 지나치게 커피에 애착을 보인다. 그러다 돌연 자신의 역할을 벗어나, 아들, 즉 작가 타보리로, 또한 현재 진행되고 있는 연극의 배우로 화한다. 아들로서 온켈은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추적하며, 배우로서 온켈은 히틀러 시대 배우로서의 어려움을 토로하기도 한다. 시간 역시 강제수용소의 현실이 아닌 연극의 현실로 새롭게 바뀐다. 이렇듯 과거와 현재, 역할극을 통한 인물들의 변화는 관객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극으로부터의 거리두기를 유도한다. 요리가 완성되어감에 따라 성급하게 서두르던 라마세더가 다른 수감자들에 의해 살해당하는 사건이 다시 발생한다. 죽은 라마세더는 다시 살아나 온켈과 마지막 대화를 나눈다. 라마세더는 온켈에게 존경심을 표현하는 동시에 그에 대한 이해하기 어려운 점 또한 토로한다. 즉, 온켈의 흰 장갑, 순종적으로 거리를 닦는 것, 나치에 대한 부드러운 표현인 “거위”, "거위에 저항하는 유일한 방법은 가능한 한 거위처럼 되지 않는다”는 데에 문제를 제기한다. 이러한 라마세더의 의문은 아들 타보리가 아버지를 이해하려는 시도와 결부된 듯 보인다. 특히 아버지에 대한 작가의 시선은 "자기 새끼의 무덤을 만들어 주기 위해 뼈를 파헤치는 개”처럼 땅을 파 라마세더를 묻어 주었다는 표현에서도 잘 나타난다. 라마세더의 물음에 별다른 응답을 주지 못한 온켈의 태도가 2막 끝에 등장하는 쉬레킹어 의 대화에서 재차 논의된다. 1막은 클라웁의 "청소”라는 명령에 따라 모두 일렬로 무릎을 꿇고 바닥을 닦는 것으로 끝난다. 이 장면은 나치시대에 거리를 청소한 유태인의 굴욕 상을 뜻하는 듯 보인다.

2막에서도 온켈은 본래의 인물 이외에도 아들로서 또는 배우로서의 역할을 넘나든다. 첫 장면에서 온켈은 아버지 타보리의 아들로서 히르쉴러에게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에 대해 묻는다. 이는 다시 아버지의 죽음을 이해하려는 작가의 의도를 드러내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작가는 죽은 자들에 대한 살아있는 자들의 '동정심' , '정의감’,'사랑' 을 원치 않는다. 오히려 죽임을 당한 아버지의 아들로서 작가는 죽은 유태인들의 '자존심을 문제로 삼는다. 1막에서는 굶주린 수감자들이 식인종들로 변모되는 상황이 무대화되고 있다면, 2막에서는 과연 본래 누가 식인종인가가 새롭게 제기된다. 2막에서 온켈은 1막에서와는 달리 모래를 손에 들고 등장하며 그것으로 사람들을 괴롭힌다. 자신의 꿈 이야기를 들려주는 온켈 역시 복수의 신에 다름 아니다. 온켈의 꿈에 수감자들은 집에 돌아가 어머니와 재회한다. 어머니와의 재회는 각기 다르다. 집시는 따뜻하게 받아들여지는 반면, 랑은 자신의 종양을 보이며 위로를 기대한다. 바이스는 결혼한 동성을 소개하며, 글라츠는 어머니를 "욕심 많은 마녀”로 생각 한다. 그런데 꿈 역시 연속되지 않고 과거로 회귀되거나 극의 현실이 되기도 한다. 즉, 1막에서와 유사하게 살아남은 자, 히르쉴러가 관객에게 직접 말을 한다. 현재 그는 정신요법을 받고 있다. 전쟁의 기억, 자신이 가해자라는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꿈 이야기를 무대화하는 중에 글라츠는 과거로 회귀하여 자신이 밀고자였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이 지점에서 작가 타보리의 기지가 발휘된다. 글라츠가 밀고자였다는 사실을 알고 다른 사람들이 그에게 분노를 터트리고 위협적인 태도를 취할 때 그를 감싸던 온켈이 “자제력을 잃고 자신의 역할에서 벗어나 격분하여 글라츠에게 성큼성큼 걸어가 일격을 가한다,” 온켈의 꿈 이야기는 그 자신이 제공하는 식사에의 초대에서 정점을 이룬다. 그가 마련한 식탁은 1막에서의 푸피 요리를 연상시키는 인육이다. "여기 뇌가 든 주발, 반죽하여 황갈색으로 튀긴 것… 여기 눈이 든 접시… 여기 찐 콩팥… 그리고 여기 커다란 은 튀김판 위에 피 소스가 떠다니고, 등에는 번호를 새긴 문신!” 이라고 말하며, 온켈은 푸피를 기다리도록 한다. 그런데 푸피 대신에 그의 아들이 참석하여 "저희 아버지는 어디에 계시죠?”라고 묻는다. 이렇게 하여 온켈이 수감자들의 행위를 반추시켰다면 뒤이어 클라웁의 반격이 시작된다. 푸피의 물음에 "우리가 그를 다 먹어치우고 배설까지 해버렸소" 라고 대답하며 클라웁은 온켈의 행위를 문제 삼는다. 가축운반용 화물열차를 타고 이동하던 중 수감자들은 탈출계획을 세웠었다. 계획은 주도면밀하게 진행되었고, 탈출의 기회 또한 주어졌었다. 보초병을 죽이고 도망하면 되는 일이었으나, 그것이 온켈의 저지로 무산되고 말았다. 더구나 그 화물열차에 탄 사람들은 질식하거나 발작을 일으킬 정도로 참혹하였다. 그런데 온켈은 살인에 반대하며, “신의 떠벌이는 장사”를 벌였다. "저항 없이 그냥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주장과 온켈의 저항이 서로 맞서게 되었던 것이다. 클라웁은 온켈이 탈출을 저지하여 결국 "샤워 실”로 표현되는 가스실로 수감자들을 이끌었다고 주장하며 다른 사람들을 선동한다. 여기에서도 작가의 극적 기지가 발휘된다. 클라웁의 선동에 따라 수감자들은 온켈에게 집단적인 구타를 가한다. 배우들이 자신의 역할을 잊어버린 상황이 발생하고, 무대감독이 무대로 달려 나와 서로 싸우는 자들을 경고하며 떼어 놓는 해프닝이 연출된다. 이 장면에 이어 온켈은 아들로서 아버지에 대해 말을 하기 시작한다. 아버지는 유태 교인이었으며, "언제나 식탐이 적으신 분”이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꿈, 과거의 기억, 성찰 등이 무대화되다가 갑작스럽게 바이스가 요리가 완성되었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2막은 다시 1막과 내용적으로 결부된다. 요리가 완성되자 돌연 수감자 들은 먹으려 하지 않으며 죽음을 준비한다. 그것이 립스틱을 바르는 것으로 아이러니하게 표현된다. 이때 하사관을 동반한 독일인 장교 쉬레킹어가 등장한다. 그의 등장은 가스실 해당자 선발을 뜻한다. 수감자들의 나이를 묻던 쉬레킹어는 푸피가 없어졌으며, 그가 요리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식탁을 준비토록 한다. 그 사이에 쉬레킹어는 관객에게 직접 말을 한다. 쉬레킹어는 아버지와 아들로서 역할을 넘나드는데, 아들은 아버지에게 전쟁 중에 뭘 하였는지를 묻는다. 말하자면 후세대가 전쟁 세대에게 묻는 물음이라고 할 만하다. 아버지는 아들의 물음에 대한 직접적인 답변은 회피한 채 자신의 전쟁 악몽을 고백한다. 그와 함께 죽은 온켈을 연상시키는 유태인 노인의 저항적 행위가 그를 통해 토로된다. 자신의 명령을 좇아 그대로 행했던 노인에게서 그는 범접하기 어려운 '인간적' 차별성올 느꼈고, 그것이 지속적으로 그의 뇌리에 남아 저항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앞서 라마세더가 제기하였던 온켈의 행위가 간접적으로 해명되는 듯하다. “늘 손가락으로 가리키지, 너, 너, 너다!”라는 표현으로 작가는 아버지의 저항이 아직도 작용 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려는 듯 보인다.
극이 끝나면서 식인종들은 오히려 살아남은 자들에게로 향해진다. 수감자들 중에 인육을 먹은 두 사람이 살아남았고, 동시에 먹기를 강요한 쉬레킹어가 게걸스럽게 먹는 모습과 동시에 무대의 빛이 꺼지기 때문이다.

조지 타보리 (George Tabori)
1914년 헝가리의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난 조지 타보리는 1936년에 영국 시민권을 얻어 영어로 작품을 쓰고 있다. 거의 20년 가까이 미국에서 활동하다 1971년 독일로 이주하였다. 유태인이었던 그의 아버지와 친척들이 나치의 직접적인 피해자들이었기 때문에 독일 땅을 밟으려고도, 독일의 어떤 제품도 사지 않으려 하였는데, 의외로 그의 작품은 미국이나 영국이 아닌 독일에서 제대로 이해되고 수용되었던 것이다. 현재 그는 극작가, 연출가, 극장장, 배우라는 활동을 이상적으로 통합시킨 예술가로서 브레히트 이후 독일어권에서 독보적인 존재로 간주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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