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존 포드 '안타깝게도 그녀가 창녀라니'

clint 2024. 7. 4. 13:58

 

 

 

희곡 <안타깝게도 그녀가 창녀라니('Tis Pity She's a Whore)>는 영국 극작가 존 포드(1586~1639)의 대표작으로 1620년대에 집필되어 1633년에 출판되었다. 이 극은 이탈리아 파르마를 무대로 근친상간이라는 금기를 범한 남매 지오바니와 아나벨라의 이야기를 다룬다. 내용이 지나치게 선정적이라는 비판을 받았고 제목도 강력하고 충격적이어서 그대로 사용되지 못하기도 했다. 할리데이 (Halliday)에 따르면 출판 시기에 따라 극의 제목이 '지오바니와 아나벨라(Giovanni and Annabella)', '남매(The Brother and Sister)' 등으로 바뀌어 표기되었다고 한다. 벨기에 극작가 모리스 마테를링크(Maurice Maeterlinck)가 이 작품을 불어로 번역해 1894년에 루브르 극장(the Theatre de l'Ouvre)에서 공연할 때 극의 제목은 '아나벨라(Annabella)'였다.')

 

 

 

사실 이 극의 제목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충격적인 것이어서 수백 년 전에 살았던 존 포드가 이렇게 센세이션을 일으킬 제목을 선택한 이유와 그것이 전달하는 메시지에 주목하는 것은 이 극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극의 아덴판(Arden Edition, 2011)을 편집한 소니아 마사이(Sonia Massai)는 극의 제목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남매의 근친상간에 관한 비극 제복에 퍼드가 '연민'이란 단어를 사용한 것은 두 연인이 관객들에게 불러일으키게 될 감탄의 정도와 그들이 자신들을 파괴시킨 열정을 통제하지 못하는 무능력 사이의 비극적 긴장감을 암시한다."

다시 말하면 지오바니와 아나벨라의 근친상간은 그것이 터부시되는 비도덕적인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포드는 관객이 그들의 사랑의 순수성과 절실함을 목격하게 되면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공감하도록 묘사가 되어 있는 한편, 젊은 연인을 파멸에 이르게 한 그 열정에 무방비로 노출된 후에 최종적으로 무능력하게 굴복하게 되는 결말을 그려 극을 보는 관객에게 비극적 긴장감을 불러일으켰는데 이런 일련의 과정이 '연민'이란 단어에 암시되어 있다는 것이다.

또한 마사이는 제목에 '연민'과 함께 '창녀'라는 단어가 문장에서 짝을 이루도록 사용한 것은 독자나 관객으로 하여금 관습적으로 연민할 만하다고 여겨지지 않는 상황과 열정을 마주하도록 하기 때문에 과격한 것이고 궁극적으로 반 아리스토텔레스 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맥락에서 마사이는 "과격한 연민(radical pity)"이란 용어를 사용했는데 작가가 극에서 묘사한 두 주인공에게 갖게 되는 인민은 기존의 것이 아닌 새로운 유형의 연민이기 때문이다. 지오바니와 아나벨라는 전형적인 비극의 주인공들처럼 진실에 눈멀었거나 실수로 잘못 이끌려서 비극을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사랑이 그들을 고양시키면서 동시에 파괴시킬 수 있는 열정임을 알면서 자발적으로 비극을 받아들인다. 이러한 인물들에 대한 관객의 반응을 위해서는 당연히 기존의 연민은 재해석되거나 재정의되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마사이는 "과격한 연민"이란 용어를 선택한 것이다.

 

 

 

제목부터 파격적인 존 포드의 극은 내용과 표현 면에서도 직설적이고 충격적이다. 특히 아나벨라가 근친상간이 폭로될까 두려워 도피목적으로 결혼한 소렌조가 아내의 비밀을 알게 되고 지오바니가 아나벨라에게서 이 사실을 전해듣고는 그만의 방식으로 아나벨라의 명예를 지키고 소렌조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녀를 죽인 뒤 그녀의 심장을 갈끝에 꽂고 소렌조의 생일 축하연에 나타나는 장면은 당대의 관객 뿐 아니라 오늘날 관객에게도 상당히 충격적일 수밖에 없다. 이처럼 충격적인 주제와 잔혹한 장면을 포함하고 있는 이 작품을 통해서 작가가 전달하고자 한 것은 무엇일까? 극의 주요 플롯은 근친상간을 한 남매 지오바니와 아나벨라가 당연하게도 참혹한 결말을 맞는 것이다. 하지만 그 주된 플롯이 전개되는 양상을 보면 극에서 묘사된 두 남매의 근친상간에 대한 작가의 관점은 명확하지 않다. 다시 말해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주 플롯의 행보와는 달리 이면에서 표출되는 메시지는 다른 결을 보이고 있다. 두 연인의 비도덕적이고 비윤리적인 행위가 초래한 파국적인 결말과 달리 그들의 사랑은 진실하고 순수하게 그려지며 그로 인한 불행에 대처하는 모습도 다른 비극의 주인공들처럼 장엄하고 고귀하게 묘사되기 때문이다. 그들의 사람은 일시적인 충동이 아니라 수많은 날들의 기도와 노력에도 불구하고 거부할 수 없었던 감정이다. 어쩌면 지오바니의 주장처럼 근친상간은 단지 도덕적· 종교적으로만 불법으로 정의된 것이고 자연의 법칙에서 보면 인위적인 법이 막을 수 없는 더 커다란 자연의 힘에 의한 것일 수 있어 보인다. 그러한 강력한 힘에 이끌린 연인의 사랑이 현 제도 아래서 이루어질 수 없음을 알게 되었을 때 연인들은 기꺼이 목숨도 내놓는 영웅적 행동을 보여준다. 이렇게 작가는 공공연한 이탈행위를 한 두 연인을 판단하는 전통적 시각의 타당성에 의문을 던진다. 그리고 이러한 작가의 의도는 연인을 둘러싼 주변인물들의 행위와 대조를 이루면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어느 사회에서나 비난 받을 수 있는 근친상간을 저지 른이 남매에게 우월감을 느끼고 이들을 정죄하고 비난하는 주변인물들도 사실 근친상간이라는 금기에서만 자유로울 뿐 하나같이 종교적· 도덕적으로 부패한 모습을 보여준다. 아나벨라를 '창녀'라고 비난하면서 신체적· 정서적으로 학대한 소렌조는 아나벨라를 만나기 전 유부녀 히폴리타와 관계를 가져서 그녀를 '창녀'로 만드는데 일조한 인물이다.('Whore'라는 단어는 그 당시에는 매춘을 직업으로 하는 여성이 아니라 혼외 성관계를 가진 여성을 가리켰다고 한다) 그리고 결혼이라는 합법적 제도하에 있었던 히폴리타도 소렌조와의 관계를 위해 남편 리카르테토를 죽음으로 이끄는 행위를 함으로써 결혼이란 제도의 공허함을 보여준다. 이는 법적으로, 종교적으로 금지되어 있지만 진실한 사랑을 하는 지오바니와 아나벨라의 사랑과 대조되면서 어느 것이 더 올바른가 하는 의문을 남긴다.

 

 

 

종교적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지오바니의 정신적 멘토인 보나벤츄라 수도사는 지오바니가 종교적 진리와 자연의 진리의 모순에 대해 반문하자 명확한 답을 주지 못한다. 그뿐만 아니라 지오바니의 아이를 임신한 아나벨라를 그 사실을 속인 채 다른 남자와 결혼하도록 종용함으로써 그녀가 창녀라는 오명을 쓰고 파국을 맞이하는 데 적지 않은 원인을 제공한다. 성직자로서 바르고 정직한 충고가 아니라 세속적이고 기만적인 충고를 한 것이다. 게다가 그 수도사보다 계급적으로 훨씬 위에 있는 추기경의 행태는 종교적 진리에 대한 강한 의심을 불러일으킨다. 그는 명백한 살인죄를 저지른 그리말디에게 귀족 태생이라는 이유로 면죄부를 준다. 그리말디로 인해 조카 베르케토를 잃은 도나도는 추기경의 결정에 '이것이 성직자의 말인가? 여기에 정의는 있는 것인가?"라고 외치면서 부패한 추기경을 비난한다. 이는 또한 살인죄와 같이 엄중죄가 상황에 따라 달리 취급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근친상간에 대한 처벌 또한 절대적이지 않을 수 있음을 시사한다.

기존 질서에 부합하는 정당한 행위로 여겨지지만 그 이면에 부패하고 비도덕적인 의도를 내비치는 모습은 소렌조의 하인 바스케스에게서도 잘 드러난다. 그는 이 극이 전개되는 데 중요한 촉매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는 오셀로를 파멸로 이끄는 악당 이아고처럼 단순한 하인 역할에 머물지 않고 극의 비극적 상황을 활성화하는 역할을 한다. 그는 소렌조의 아버지에게 충성했듯 소렌조에게 충성한다. 하지만 그가 충성하는 소렌조는 도덕적으로 올바른 자가 아니며, 바스케스 역시 그 사실을 안다. 그럼에도 바스케스는 주종관계에서 충성을 이행면서 비도덕적이고 교활하고 잔인한 행위를 서슴지 않는다.

이렇게 지오바니와 아나벨라의 주변 인물을 통해서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달리 말해, 근친상간을 저지른 남매를 비난하고 그들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종교적, 도덕적, 윤리적 정당성에 대한 의문이 분명하게 부각된다. 극을 관람하는 관객들에게 "지금 당신이 정당하고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것이 정말로 그러한 것인가" 하는 의문을 던지는 것이다. 아마도 이것이 존 포드가 이 극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일 것이다.

 

 

 

결론적으로 작가는 누구나 금기라고 생각하는 근친상간을 소재로 극을 전개했다. 하지만 그들을 둘러싼 인물들의 추악한 이면을 보여줌으로써 이들의 행태가 공공연하게 금기시하는 범죄와 다르지 않거나 그보다 더 추악한 것임을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이 있다. 목숨을 담보로 사랑을 갈구하는 지오바니에게 그 대가로 심장이 도려내지는 고통을 겪고 창녀로 낙인 찍히게 된 아나벨라를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극은 공공의 적이라고 할 수 있는 근친상간의 예상치 못한 고결한 모습과 정당하고 합법적이라고 생각하는 행위들의 부정적인 이면을 교차해서 보여 줌으로써 사람들이 갖고 있는 도덕적 편견에 새로운 충격을 주려는 시도를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충격적인 전개는 "안타깝게도 그녀가 창녀라니!"라는 극의 제목이기도 한 추기경의 마지막 대사로 막을 내린다. 마지막 대사인 만큼 그 의미가 가벼울 수 없다. 이 대사는 추기경이 지오바니와 아나벨라의 근친상간과 관련된 사건을 모두 마무리한 후 지오바니 손에 죽은 아나벨라에게 내린 평가다. 추기경은 '그토록 어리고, 타고난 재능 또한 그토록 풍요로웠던 젊은이에 대해 누가 말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안타깝게도 그녀가 창녀라니"라고?" 말한다. 이 대사를 통해 추기경은 아나벨라를 '창녀'로 정의하고 확정짓는다. 극을 보는 모든 관객들에게 그녀가 창녀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관객들은 그가 종교의 최고지도자로서 청렴하고 도덕적 인 인물이 아니라 지오바니 가문의 재산을 자기 이익을 위해 몰수하고, 살인죄를 정죄하는 데도 귀족 가문에는 다른 잣대를 적용하는 기회주의자임을 이미 목격했다. 이러한 인물의 입에서 나온 마지막 대사는 관객들에게 극의 중심사건이 되고 있는 남매의 근친상간에 대한 판단을 다시 생각해보게 하는, 강한 진동으로 던져진 돌의 역할을 한다. 그리고 좀 더 나아가 여기에는 이렇게 기존의 가치로 자리 잡힌 종교적·도덕적 가치관이 와해되고 붕괴된 영국 캐럴라인 시대의 상황도 투영된 것이라고 확대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John F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