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세네카 '메데이아'

clint 2024. 5. 30. 16:43

 

 

1

극은 메데이아의 독백으로 시작된다. 그녀는 이아손과 달리 과거를 되살리려 한다. 과거와의 연속성을 유지하면서 자기 정체성을 지키려는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영역을 대표하는 신들을 부른다. 카오스의 영원한 밤, 저승, 하데스, 페르세포네 등이다. 불행을 내려 달라고 그들에게 탄원한다. 이들은 마법적 장면에 중요한 신들과 영역들이다. 메데이아는 크레온과 그의 딸에게 죽음으로 복수하기 위해 마법이 필요할 것이다. 특히 복수의 여신들을 부르는데 사용한 표현은 현재의 결혼을 과거 자신의 결혼과 연결시키면서, 동시에 곧 일어날 크레온과 크레우사의 죽음을 예고한다. 하지 만 그녀는 이아손이 살아남기를 기원한다. 추방자로서 거처도 없이, 법의 보호도 없이. 그녀가 아이들을 언급하는 순간, 에우리피데스의 판본에 익숙한 독자들은 아이들을 죽인다는 아이디어가 서서히 떠오르고 있음을 감지하게 된다. 태양신의 마차에 대한 언급도, 이제 왕궁이 불타버릴 것이란 예상과 더불어, 마지막에 메데이아가 그 마차를 타고 도주할 걸 예상하게 한다. 이 도입부에서 희미하게 암시된 일들은 앞으로 점차 또렷한 모습을 갖출 것이다이어서 코린토스 시민들로 이루어진 합창단이 결혼 축가를 노래한다. 평화에 대한 이들의 소박한 기원은 조금 전 메데이아의 기원과 대조된다. 이 노래는 보통 결혼 축가에 포함되는 요소들을 담으면서, 또한 메데이아와의 결별이 정상적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란 암시도 담았다.

2

이 부분은 크게 세 가지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선 메데이아의 독백, 이어서 메데이아와 유모의 대화, 마지막으로 크레온과의 대화이다. 결혼 축가를 들은 메데이아는 과거 자신의 행적을 떠올리며 어떻게 복수할지 모색한다. 그러다 이아손의 궁색한 처지에 생각이 미치고, 그의 행복을 비는 마음이 된다. 그녀는 대신 크레온의 집을 태우겠다고 선언한다. 유모는 메데이아에게 평온하게 고난을 견디라고 충고한다. 왕에게 저항하면 결과가 좋지 않다고. 거기에 크레온이 찾아온다. 그는 메데이아를 추방하기로 결심한 상태다. 애당초는 메데이아를 죽여 없애려 했으나, 이아손이 간청해 추방으로 변경한 것이다. 메데이아는 자기변호의 기회를 얻어, 우선 자신이 희랍인들에게 큰 도움을 준 것을 상기시킨다. 크레온이 지금 사위를 맞아들일 수 있는 것도 자기 덕분이라고, 게다가 크레온은 왕으로서 탄원자를 보호할 의무가 있다고, 또 이전 모든 범죄의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는 것은 잘못이라고. 애초에 아카스토스가 자기 아버지(펠리아스)를 죽인 책임을 묻고자 넘겨 달라 요구했던 인물도 메데이아 아닌 이아손인데, 크레온은 그 갈등을 메데이아를 추방함으로써 해소하려 한다고. 이제 크레온은 조금씩 흔들리고 결국 하루 더 머무는 것을 용인한다. 그녀에게 변명의 기회를 준 것부터가 그의 실수였다. 그는 결국 메데이아의 상대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이어서 합창단이 배를 처음 만든 사람의 대담함을 찬양하고, 항해 이전의 순수하던 시대를 돌아보며, 아르고호의 여행을 회고한다. 그들은 메데이아가 그 항해의 상이라고 노래한다.

 

 

 

3

유모가 메데이아의 격정과 광기를 걱정하는 사이, 메데이아는 밖으로 달려 나간다. 그녀는 우주가 존재하는 한 복수를 이루리라 다짐하고, 한번 찾아오지도 않는 남편을 원망하며, 어렵게 얻은 이 하루를 잘 이용하자고 다짐한다. 거기에 이아손이 찾아온다. 자기의 결정은 아이들을 위한 것이었다며, 메데이아를 간곡히 설득하자고 혼자 다짐한다. 메데이아는 남편에게 자기가 어디로 가야 할지 묻고, 자신이 그에게 준 도움을 다시 나열한다. 이아손은 메데이아에게 조용히 떠날 것을 청하며 자신이 금전적 도움을 주겠다고 제안한다. 메데이아는 함께 떠나자고 주장하다가, 그가 아이들을 걱정하는 것을 보고서 아이들을 해칠 생각을 떠올린다. 메데이아는 남편의 의견에 수긍한 듯, 아이들과 작별인사를 나누고 떠나겠노라고, 자기가 했던 악담은 잊으라고 말한다. 하지만 남편이 떠나자, 드레스와 관에 독을 묻혀 왕녀 크레우사에게 전할 뜻을 밝힌다. 이어서 합창단이 남편을 빼앗긴 여인의 분노보다 무서운 것이 없다고 노래하고, 아르고호 영웅들의 불행한 죽음을 돌아보며, 이아손만큼은 살아남기를 기원한다.

4

유모가, 메데이아가 온갖 재료를 섞어 독약을 만든 과정을 보고한다. 이어서 메데이아는 헤카테 여신에게 이 약이 큰 효력을 발휘하도록 기원한다. 아이들을 불러 그 약을 묻힌 장식품들을 가져다 새 신부에게 주라고 전달한다.

합창단이, 분노와 사랑에 휘둘려 광란하는 메데이아를 걱정하는 노래를 부른다.

5

전령이 달려와 왕과 공주가 죽고 왕궁에 불이 났다는 소식을 전한다. 메데이아는 즐거움을 표현하다가, 갑자기 슬픔에 젖어든다. 아이들을 안고 마음이 이리저리 변하던 중, 복수의 여신의 환각을 보고서 아이 하나를 죽인다. 이아손이 달려와 그녀를 비난하고 아이 하나라도 구해내려 하지만, 메데이아는 남편이 보는 데서 아이를 죽여 던지고는 용이 끄는 수레를 타고 날아가 버린다. 혼자 남은 이아손은 신들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외친다.

 

 

 

 

 

세네카 비극 중 중기에 속하는 이 작품은 대체로 네로가 황제가 되기 전에 완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작품의 주요 내용은 메데이아가 자신을 배반한 남편 이아손에게 잔인하게 복수한다는 것이다. 이 복수극은 이전에 메데이아가 행했던 여러 범죄와 연관되어 있는데, 이아손은 이러한 범죄에서 이득을 보았었다. 이아손이 아르고호 영웅들을 이끌고 콜키스 땅으로 황금 양가죽을 구하러 왔을 때, 그녀는 아버지를 배신하고 그에게 도움을 주었다. 우선 불 뿜는 황소와 싸우고 용 이빨에서 솟아난 전사들과 싸울 수 있도록 특별한 약을 주었다. 이어서 아레스의 숲에서 황금 양털을 지키던 용을 수면제로 잠재우고 그 양털가죽을 훔쳐냈다. 그리고 이아손과 함께 도망칠 때 추격자들을 따돌리기 위해 자기 동생 압시르토스를 토막내어 바다에 던지고 상대방이 시신을 수습하는 사이에 시간을 벌어 도주하였다. 이아손의 고향인 이올코스에서는 왕권 넘겨주기를 거부하는 늙은 펠리아스를, 약초와 함께 삶아서 다시 젊게 만들어 주겠노라고 펠리아스 딸들을 유혹해서는, 토막 내어 죽였다. 왕을 너무 끔찍하게 죽였기 때문에 이아손 가족은 이올코스에서 추방되어 남쪽 코린토스로 이주한다. 거기서 이아손은 메데이아를 버리고 코린토스 왕 크레온의 딸 크레우사와 결혼한다. 이제 이아손은 아내와 함께 과거를 떠나보내려는 것이다.

 

 

 

 

이 작품은 메데이아가 복수를 위한 계획을 집착적으로 발전시켜 나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1막에서 그녀의 복수의 소망은 거의 환상에 가깝게 그려진다. 하지만 그 후 그녀는 잇달아 세 가지 타격을 당한다. 우선 결혼축가가 이제 남편이 새로 결혼했다는 것을 절감하게 한다. 게다가 이제 그녀는 현실적으로 추방 위기에 직면한다. 3막의 끝부분에 가면, 그녀는 이제 남편을 그냥 제도에서뿐만 아니라, 감정에서도 잃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3막 끝에 그녀는 남편의 새 아내 크레우사를 없애기로 결심한다. 아이들을 죽이자는 생각은 좀 더 의식 밑바닥에서 자라간다. 이미 제3막에서 이아손과 논쟁하는 중에 그녀는 아이들을 통해 남편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다는 가능성을 포착한다. 하지만 그녀는 우선 크레우사에게 집중하느라 이 문제를 뒤로 미뤄 둔다. 5막에 가서, 크레우사와 크레온이 파멸했다는 게 확실해진 순간에야 그 문제가 의식의 표면에 떠오르는데, 그 발상에 대한 메데이아의 첫 반응은 공포심이다. 그렇지만 그녀는 그것을 거의 스토아적으로 이겨낸다. 결과만 놓고 보면 메데이아를 그냥 괴물로 여기기 쉽지만, 찬찬히 보면 우리는 그녀의 심리가 단계적으로 섬세하게 변해가는 걸 알 수 있다. 남편에 대한 미움도 처음부터 확고한 것이 아니라, 여전히 미련이 남은 사랑과 뒤섞인 것이다. 예를 들면 제2막 초반에, 어떻게든 남편의 입장에서 변명을 해보려 애쓰는 장면이 그렇다. 그녀가 이전에도 여러 죄를 지었지만, 그것은 모두 남편과 그의 동료들을 위해서 한 일이란 말도 거의 사실이고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그녀를 동정하게 한다. 적어도 이아손만큼은 그녀를 비난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이 작품을 읽을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은 에우리피데스의 메데이아인데, 세네카는 에우리피데스 작품에 없던 요소를 몇 가지 새로 도입했다. 우선 메데이아가 독약을 만드는 제4막 내용은 희랍극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면모이다. 여기서 그녀는 자신의 '야만적 기술에 확신과 긍지를 지닌 것으로 그려졌다. 마지막에 그녀가 아이들을 죽이는 것도 그냥 복수를 위해서가 아니라, 이전에 동생을 죽인 것에 대한 앙갚음이기도 하다는 것, 역시 희랍 모델에는 없던 요소다. 우리는 보통 메데이아를 걱정에 압도된 인물로 여기지만, 이런 점을 보면 적어도 이 작품에서 그녀는 격정 이외의 다른 면모를 지닌 것으로 그려졌다이 작품에서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이다. 둘째 코러스에서 아르고호의 항해는 인간이 자연을 기술로써 지배해 나가는 과정의 출발점으로 소개된다. 하지만 메데이아는 혈통에 의해 강력하게 자연과 연관되어 있다. 그녀는 태양신의 손녀딸이고 마법과 약물에 능한 민족의 자손이다. 메데이아는 그동안 일종의 '문화시민'으로서 이런 재주를 사용하길 자제했었다. 이제 거기서 밀려나자 그녀는 다시 옛 능력으로 돌아간다. 그녀와 자연 사이의 긴밀성은 작품이 진행될수록 길어진다. 셋째 코러스는 메데이아의 복수심을, 자연이 아르고호 선원들에게 가한 보복과 연결시켰다. 그들 중 대다수는 불과 물이라는 자연력에 희생되었던 것이다. 이제 아르고호 선원 중 마지막 생존자인 이아손도 곧 그렇게 될 것이다. 조금 간접적인 방식으로.  5막은 메데이아의 내부에서 두 가지 정체성이 다투는 것을 보여준다. '아내' '어머니'의 힘겨루기다. 하지만 아이들이 죽는 순간 그녀와 이아손 사이의 모든 관계가 사라지고 그녀는 자신이 다시 콜키스의 처녀로 돌아간 듯한 환각을 느낀다. 사실 메데이아가 작품 내내 추구해온 것은 아내나 어머니의 지위라기 보다는, 누구에게도 구속되지 않고, 오히려 자기 의지를 남들에게 강제할 수 있는 자기중심적 자율성이다. 작품 마지막에 그녀는 마침내 자신이 그런 수준에 도달한 것을 느낀다. "이제 나는 메데이아다. 나의 재능은 악을 통해 성장했도다!" 가 바로 그러한 완성의 선언이다.

 

 

 

이 작품을 해석하는 데서 가장 문제되는 것은, 작품 속 메데이아가 거의 스토아철학자처럼 그려졌는데, 그녀의 최종 결정은 스토아철학이 권고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분노의 무절제한 폭발이라는 점이다. 메데이아는 세네카가 그의 철학적 산문들에서 권고한 대로 행동한다. 로마식 스토아학파는 각 사람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현자가 될 가능성을 갖고 태어난다고 믿고, 그 가능성을 완성하는 것을 삶의 목표로 제시하였다. 그 목표를 이루는 방법으로 권장되는 것이 이상적 감독자를 상상하여 그가 늘 자기를 주시한다고 믿는 것이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메데이아가 바로 그 방법을 택한다. 문제는 그 메데이아가 다른 이야기들에 나오는 메데이아라는 점이다. 메데이아와 유모의 대화 장면에서, 유모가 "메데이아여!"라고 부르자, 그녀가 "나는 그녀가 될 거예요"라고 응수하는 장면이 특히 그것을 잘 보여준다. 그런데 이런 모든 스토아적 태도와 숙고 끝에 그녀가 도달한 곳은 보통 사람의 수준을 넘는 범죄였다. 스스로 자신을 통제하고 자기를 이루어가겠다는 그녀의 목표가 최악의 결과를 낳고 말았다. 세네카는 철학적 산문에서 자기통제가 악한 결과를 낳을 가능성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비극작품에서, 자기통제가 도덕적 진보로 연결되지 않는 세계를 우리에게 슬쩍 소개하고 있다메데이아가 이렇게 된 데는 그녀가 완전히 고립된 상태란 점이 작용했을 수 있다. 이 작품에서는 코러스부터가 메데이아에게 다소 적대적으로 설정되어 있다. 에우리피데스의 <메데이아>에서 합창단은 메데이아에게 매우 우호적이고 이아손을 비난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반해, 이 작품의 합창단은 이아손의 새 결혼을 축하하는 노래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한편 메데이아의 고립은 그녀가 가족 내의 아내로서, 어머니로서자기 역할을 스스로 버리고, 타인과의 소통을 포기한 채 자신에게 너무 집중한 데도 원인이 있다. 이 작품의 결말은 도덕적 교훈을 주기 위한 것은 아닌 듯하다. 악인이 성공을 누리기 때문이다. 어떤 학자는 도덕적 유보 없이 '선을 넘는' 복수극이 주는 쾌감과 거기서 성취하는 주인공의 '크기'를 강조한다. 또 어떤 학자는 이 작품이 우리의 삶에 여전히 놓여 있는 도덕성, 살인, 자기 정당화 등의 문제를 제기했다는 것에 큰 가치를 부여한다. 이 작품에 그려진 인물의 성격에 대해서도 학자들 사이의 의견이 상반된다. 크레온에 대해서는 '완벽한 독재자' '겁쟁이'라는 상반된 평가가 있다. 이아손에 대해서도 '비열한 인간'이라는 평가와 '스토아적 절제를 갖춘 사람'이라는 평가가 엇갈린다. 독자가 각자 판단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