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브레히트 원작 배삼식 번안각색 '하얀 동그라미 이야기'

clint 2024. 6. 2. 13:47

 

 

오래된 옛날 장자와 장자부인 그리고 그의 어린 아들이 살고 있다.

초파일 날 장자네 가족은 절에 재를 올리러 가는데

아이(귀복)의 숙부가 반란을 일으킨다.

그 결과 장자는 죽임을 당하며 장자부인은 난리통에

아이를 버리고 도망친다. 한편 장자네 하녀 순례는

절에서 장자네 경리  칠복을 만나는데, 곧 입대를 한다.

난리통에 그들은 미래만을 약속한 채 헤어진다.

피신하려던 순례는 우연히 버려진 귀복을 보게 되는데,

고민 끝에 귀복이를 데리고 떠난다.

 

 

 

순례는 오빠네 집으로 가던 중 갖은 고생을 겪으면서

결국 귀복이를 자신의 아이로 받아들인다.

오빠네 집에 도착한 순례는 아이와 함께 살 거처를 마련하기 위해

죽음을 앞둔 유섭과 거짓 결혼을 한다.

하지만 결혼식날 전쟁이 끝났다는 소문에 유섭이 병석을 털고 일어나

순례와 유섭은 불편한 결혼 생활을 한다. (군대를 안가려 아픈 척함)

그러던 중 칠복이 전쟁이 끝나자마자 곧장 순례를 찾아오지만

순례의 결혼 사실과 아이를 본 후 실망하여 떠나간다.

 

 

 

이와 동시에 포졸들이 찾아와 아이를 데리고 성으로 간다.

한편 봉선달은 난리 중에 도망가던 폭군의 목숨을 모르고 구해준다.

뒤늦게 사실을 알게 된 봉선달은 자신을 관아에 고발한다. 하지만

무사들이 봉선달의 기지를 보고 그를 비어 있던 판관 자리에 앉힌다.

봉선달은 엉뚱한 방식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유리한 재판을 한다.

그러던 중 난리가 끝나자 장자부인이 귀복이를 되찾기 위해

봉선달을 찾아온다. 그런데 그동안 잘사는 사람들에게

불리한 재판을 했던 봉선달은 도망을 치다가 잡혀 수모를 당한다.

하지만 자신이 구해준 폭군의 명으로 다시 판관으로 임명되고,

하얀 동그라미 재판으로 순례에게 아이를 찾아준다.

 

 

 

브레히트는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하여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가 첨예하게 대립하던 시대를 살았다. 그리고 전후 두 개의 이데올로기로 분단된 독일 중에서 사회주의 국가를 택했다. 이러한 브레히트는 70-80년대 분단과 군사독재라는 특수한 역사적 상황을 거친 우리에게 유난히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연극을 통해서 인간존재의 사회성을 강조하고 관객들에게 사회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끌어내려고 했던 그의 작품세계는 지금도 매우 유효하다고 할 수 있다. 90년대 초, 소비에트연방이 붕괴될 때 사회주의 역시 실패로 간주되었다. 근대성이라는 패러다임 안에서 과학과 산업의 발달로 승승장구해오던 인간의 이성적 능력에 대한 의구심도 점점 커져갔다. 이제 브레히트가 신봉했던 이데올로기는 구시대의 유물이 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브레히트는 여전히 연극사의 무대에서 밝게 빛나고 있다

 

 

 

브레히트의 연극은 재미있다. 무엇보다도 그 재미는 습관적으로 받아들이던 사물들과 관념들을 새롭게 뒤집어보는데 있다. <코카서스의 하얀 동그라미>에서 브레히트는 '아이는 낳은 어미가 키워야 한다'는 사회적인 통념을 뒤엎는다. 공연이 끝날 때쯤 관객은 하얀 동그라미 안에 놓인 아이를 가운데 두고 두 여자가 양팔을 잡아당기는 동서양의 고전을 통해서 이미 알고 있는 상황을 대한다. 하지만 관객은 브레히트의 치밀한 계산에 따라 마련된 정반대의 결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게 된다. 이러한 '뒤집어보기'는 이데올로기적이거나 교훈적인 목적 만을 위해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보다 브레히트는 관객이 관찰자로서 직접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보고 스스로 판단할 수 있게 한다. 판단의 가능성은 관객 개개인에게 열려 있다. 중요한 것은 고정되어 불변하는 것처럼 보이는 주어진 현실을 일단 의심해보고 회의해보는 관객의 인식 태도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주어진 현실을 무조건 거부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여기에는 현실을 타성적으로 바라보는 관객들의 시각을 깨뜨리고 일상에 은폐되어 있는 삶의 가치들을 끊임없이 벗겨내 보고자 하는 의도가 숨어 있다. 어지러운 시대에 엉뚱하게 재판관이 된 <코카서스의 하얀 동그라미>의 아쯔닥(이 객색본에서는 봉선달)은 세상을 비웃기라도 하듯 자기 멋대로 판결을 내린다. 하지만 그의 판결은 거꾸로 상식이 갖고 있는 허구성을 찌른다. 뿐만 아니라 돌발적이고 엉뚱한 행동은 아이러니하게도 '그 나름'의 정의를 구현한다. 이 점에서 아쯔닥은 브레히트의 '뒤집어보기'연극 미학을 가장 잘 구현해주는 등장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세기말을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중요한 것은 미래의 허구적인 '약속의 땅'이 아니다. 그보다는 신화적인 인형과 미래의 비전이 똑같은 가능성으로 담겨 있는 현재의 삶에 더 비중을 둔다. 연극이 지니는 예술적 가치 중 하나는 관객으로 하여금 일상에서 벗어나 자신의 현재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데에 있다. 브레히트의 연극은 관객들에게 특정한 결론이나 이데올로기를 강요하기에 앞서 판단의 가능성을 열어 놓는다는 점에서 여전히 유효하며, 그런 점에서 현대적이다.

 

 

 

<하얀 동그라미 이야기>는 솔로몬의 재판을 연상시키는 줄거리를 담고 있다.

풍비박산한 지주의 집을 배경으로 낳은 정과 기른 정을 놓고 벌이는 재판이야기다.

배삼식은 브레이트 원작의 골격은 유지한 채 대사와 상황 등을 우리식으로 풀었다.

그리고 변경된 이 아야기는 더 재미있고 쉽게 관객들을 만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