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조선일보 신춘문예 희곡 당선작
심사평 - 임선옥·평론가 오경택·연출가
응모작 97편은 현재 한국 사회의 절망적 상황을 보여주고 있었다. 코로나 팬데믹을 벗어나 표면적으로는 사람들이 밖으로 나와 서로 소통할 것 같았지만, 오히려 이전보다 더 폐쇄적이고, 절망, 우울, 불신, 폭력, 죽음이 넘실대고 있었다. 독백이나 방백을 통해 관객에게 직접 말하는 작품이 눈에 띄게 늘어난 것도 특징적이었다. 하지만 지나치게 사변적이거나 자기 넋두리에 그치는 측면이 있고 시대와 접점을 형성하기에는 부족해 보이는 작품이 많았다. 또한 근미래를 배경으로 하여 과학의 발달에 따른 폐해를 다룬 작품도 많이 보였으나 깊은 사유까지 도달한 작품은 찾기 어려웠다. ‘동파’ ‘부메랑, 그 임계점’ ‘구덩이’가 최종심에 올랐지만, 세 작품 중에서 선뜻한 작품을 꼽기에는 각각 아쉬운 점이 보였다. ‘동파’는 전세사기를 당한 후 생활고에 시달리는 부부의 고단한 삶의 풍경을 배수관이 얼어붙은 세탁기에 빗대어 생생하게 묘사하였으나 예측 가능한 전개와 감상적 결말이 아쉬웠다. ‘부메랑, 그 임계점’은 대한민국의 구조적 부조리와 소통 부재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모습은 흥미로웠으나 표층적 사건에 치우쳐 인물을 통한 심층적 주제 증명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구덩이’는 자살을 소재로 한 기시감이 있는 구성과 전개가 아쉬웠으나 희곡은 상연을 전제로 한다는 측면에서 볼 때, 등장인물들의 목적과 갈등의 조합이 무대 위의 긴장과 밀도감을 담보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고 당선작으로 선정하였다.
희곡 당선 소감 - 이정
나는 나를 위해 씁니다. 누구의 인생을 뒤흔들거나 세상의 어둠 한구석을 밝히는 작은 불빛이 되겠다는 포부가 이제는 없습니다. 내가 쓰는 것으로 그런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기를 기대하는 것은 오만이고 욕심이었음을 이제는 압니다. 나는 그저 내가 즐거워지기 위해, 내가 위로 받기 위해, 내가 용기 내기 위해, 내가 답을 찾기 위해 씁니다. 나를 구원하기 위해 쓴 것들이 부끄럽지만 운 좋게 다른 이들을 만나 시간 낭비가 되지 않는다면, 운이 더 보태 져서 숨소리처럼 작은 울림이라도 된다면 좋은 일이겠지만 그 또한 나만의 기적일 것입니다. 그렇게 쓰인 부족한 작품을 뽑아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감사말씀을 전합니다. 나만 생각하는 부끄러운 인생을 살았음에도 이 영광을 함께 기뻐하고 축하해주실 분들이 있습니다. 뭘 하기는 한다는데 어슬렁거리기나 하는 것 같은 나를 보며 분통 터졌을 분들에게 미안하고 고맙습니다. 오랫동안 변함없는 우정으로 응원과 믿음을 보내주는 분들에게 고맙습니다. 아무것도 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해준 분에게 가장 고맙습니다. 언제가 되었든 신춘문예에 꼭 당선되고 싶었습니다. 이제야 도착해 깨닫습니다. 운이 나빠서, 경험과 고통이 부족해서, 내가 못나서, 세상이 나를 못 알아봐서 늦은 것이 아니라 단지 나의 노력이 부족해서 그랬다는 것을요. 이렇게 된 이상 다시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계속 써보겠습니다. 나를 위해. 나의 언어로.
이정
-1977년 서울 출생
-서울예대 극작과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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