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윤백남 '암귀'

clint 2023. 4. 6. 17:07

1928년 7월 이 잡지에 발표함

 

 

<암귀>의 남성인물인 권혁은 전직 군인 출신의 맹인이다. 군인은 나라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직업군으로,  일제강점기부터 군사정권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지속되어 온 군사주의적 남성성을 확보한 사람들이다. 남성들은 군인이라는 직업을 수행하며 국가에 봉사하는 존재가 됨으로써 자신이 강한 남성임을 증명하고자 한다. 군인 권혁의 육체는 장애를 입음으로써 남성성을 유지할 수 없는 장애자로 전락한다. 시각장애는 육체노동의 가능성을 제거하여 경제활동의 기회를 상실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남성성에 막대한 손상을 야기한다. 대한제국의 정위로 조선 남성들에 우위를 점하며 살아온 권혁은 맹인이 되면서 하층 계급보다 못한 존재로 재배치된다. 정상적인 신체활동을 하지 못하게 된 권혁은 식민지라는 엄혹한 현실을 헤쳐 나갈 수 있는 최소한의 가능성마저 상실한 상태이다.  육체적 결핍이 야기한 경제활동의 불가능성은 자연스럽게 정신적 측면에도 영향을 끼친다. 퇴역 군인들의 보조금 지급을 위한 청원에 주창자가 되어달라는 이명선의 부탁을 완곡히 거절하는 권혁에게는 자신의 장애를 전시하여 재화와 맞교환함으로써 훼손된 남성의 표상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에 대한 공포가 잠재되어 있다. 그러나 권혁은 자신의 실의와 공포를 고백하는 대신 해탈과 승화로서의 자기의식을 가장하며 보다 높은 차원의 남성성을 내세우고자 한다. 그는 하드 바디적 군인으로 정체화되었던 남성성을 부정하며 그것이 “폐일언하고 추악헌 심사”였다고 고백하는 한편,  “눈 멀은 지금이 행복일는지도” 모른다고 말하며 긍정하는 모습을 드러낸다.


신체적 장애는 외부의 부정적인 인식보다도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 당사자에 의해 더욱 부각되며 이는 스스로의 활동을 제어하는 자기 족쇄 가 된다. 그러므로 극복 불가능한 신체적 장애를 가지게 된 주체가 장애를 받아들이는 방법은 장애 이전 상태를 부정하면서 현 상태를 긍정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이다. 권혁이 군인으로 활동했던 시기를 “모두가 거짓”이었다고 회고하며 기존 남성성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 있다. 그러나 이는 주체적으로 남성성 구성이 불가능한 종속적 남성에게서 나타나는 현실도피에 다름 아니다. 권혁은 노동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에 가내에서도 가장의 권위를 내세울 수 없다. 가내 경제를 책임지는 실질적인 가장은 아내인 숙진이다. 숙진의 직업은 산파로 이 시기 산파는 전문교육을 받은 여성만이 종사할 수 있는 전문직의 일종이었다. 권혁은 신체적으로 우위에 있는 남성이지만 맹인이기 때문에 숙진을 힘으로 제압할 수 없으므로 자신의 남성성을 약화시키는 숙진을 육혈포로 위협한다. 그러나 총은 조준을 해야만 살상이 가능한 무기이다. 장님 권혁의 손에 들린 총은 특정한 인물을 겨냥하여 상해를 입히기는 어렵다. 권혁이 쏜 탄환은 딸 애연을 맞히고, 이에 망연자실한 그는 목숨을 끊으려 하지만 탄환이 떨어져 자살에 실패하며 막을 내린다. 
가정을 수호해야 할 남성은 오히려 자신의 혈육에게 상해를 입힘으로써 가부장의 권위를 스스로 훼손시킬 뿐 아니라 목숨을 끊는 것도 허락받지 못하면서 주체성을 상실한 남성의 적나라한 일면을 드러낸다.

 

윤백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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