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장정일 '너희가 재즈를 믿느냐'

clint 2018. 4. 10. 21:13

 

 

「너희가 재즈를 믿느냐」는 이 질펀한 혼돈의 시대에 지쳐버린 우리의 모습을 희화적으로 묘사한다. 후기 산업사회에서 인간 관계와 사회 권력구조를 풀어보는 가장 효율적인 도구로 자라 버린 성을 평범한 샐러리맨 심진래의 일상의 모든 면을 조명하는 프리즘처럼 사용해서 풀어 가는 공연은 우리시대의 종말론적 암울함을 비쳐준다. 이제는 기존의 성모랄을 깨뜨리는 성의 범람 속에 마침내 성을 우상화하는 사교(邪敎)집단 재즈까페에서 구역질을 하며 도망치듯 빠져나와 하나님을 부르는 심진래의 절규가 이 시대가 지르는 비명처럼 울려온다. 장정일이 본인의 소설을 희곡으로 각색한 것을 다시 연출 황동근이 나름대로 무대화한 공연에서 원작에 함몰되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연출의 독자적인 시각이 뚜렷하게 부각되는 점이 좋다.       

지난번 혜화동 1번지에서 「육체의 풍경」으로 조촐하지만 힘있는 공연을 올려서 깊은 인상을 남겼던 황동근의 특성이 「너희가 재즈를 믿느냐」에서 좀더 큰 스케일로 단단하게 여물어가는 것 같다. 남녀의 생물학적 기호가 마주보도록 한 무대를 상하로 이분해서 다양한 공간을 만들고 또한 권력의 역학을 시각화한 무대 사용이 효과적이다. 배우들에게서 고른 연기를 창출해 낸 연출의 통제력이 돋보이고 그 가운데서도 심진래 역의 김승철의 연기가 눈에 띈다.

 

 

 

 

<가시와 비가시의 대화, 장정일>- 이강백
장정일은 만나 보면 참 예의 바른 사람이고 커피를 마셔도 후루룩 소리를 절대 내지 않는 사람이에요. 목소리가 사근사근하고 높지 않아요. 그런데 글은 어찌나 에로틱하게 쓰는지 심지어는 '나는 어린 시절에 아버지가 죽기를 얼마나 갈망했는지 모른다. 아버지가 죽은 날 자기는 축제였다'는 등의 지독한 말을 '일기'라고 발표하니까 굉장히 괴상한 사람으로 비칩니다.<내게 거짓말을 해봐>를 읽으면서, 사람한테 그렇게 못된 짓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만나 보면 얼마나 조용하고 깍듯이 예의를 지키는지 사람을 다시 보게 되요. 제 마음 속에서 대단한 천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만나본 천재 중의 한 명이지요. 장정일은 시집<햄버거에 관한 명상>으로 김수영 문학상을 받은 시인이자 소설가지만, 극작가로서도 기가 막힌 작품을 쓴 게 있습니다. 동아일보 신춘문예에<실내극>이라는 희곡으로 당선했는데, 저는 이 작품을 대한민국 희곡 가운데 다섯 손가락 안에 꼽습니다. 장정일 문학 전집 속에 희곡집이 있는데 거기에 첫 번째로 실려 있습니다.
첫 장면에서 노크 소리가 딱딱 들리지요. 안에 있던 어머니가 "들어와." 하니까 아들이 들어옵니다. 뭔가를 훔쳐서 절도범으로 감옥살이를 하고 오는 거에요. 아들은 어머니한테 묻습니다. "아니, 내가 그렇게 많이 훔쳐다 놓고 갔는데, 그 돈을 다 썼어요?" "또 벌어 와야 된다"고 어머니가 말합니다. 아들에게는 애인도 있었습니다. "걔가 니가 감옥에 가자 며칠 있다 슬그머니 가더라." 참으로 가슴 뭉클한 삽화죠.
이윽고 아들은 뭔가를 훔쳐 가지고 돌아옵니다. 그러면 어김없이 형사가 잡으러 옵니다. 감옥에 갔다가 만기로 형을 마치고 나오고, 또 훔치러 갔다가 훔쳐다 놓고 잡혀갑니다. 그렇게 왔다갔다 할 때마다 시간이 가는데, 나갔던 사람이 금방 오는데도 그 찰나에 시간은 가는 거에요. 5년, 10년, 15년…. 그런데 장정일의 기가 막힌 점은 다음과 같은 데 있습니다. 가시적 공간이라는 무대가 있고, 비가시적 공간인 감옥이 우리 관객의 머리 속에 보입니다. 우리는 흔히 집은 편안하고 행복하고 안정된 곳이라고 생각하지요. 그래서 연극 속에서 아들이 감옥에 갈 때마다 얼마나 쓸쓸하고 외롭고 힘들고 지옥 같을까 마음 아파하지요. 그런데 천만에요. 극이 진행되는 동안 우리들의 고정관념이 깨지면서, 이게 역전되고 맙니다. 왜냐하면 감옥에 가면 오히려 잡아가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가장 안정적이고 공짜로 먹여주기까지 하니 훔칠 일이 없어지니까요. 반대로 가난한 집으로 돌아오면 끊임없이 뭔가를 훔칠 궁리를 해야 하고, 막상 훔쳐서 가난과 굶주림을 면하고 나면 누군가 잡으러 올까봐 불안해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집이라는 공간과 감옥이라는 공간이 완전히 역전되는 셈입니다. 이게 바로 장정일의 천재적 발상입니다. 장정일의<실내극>에 나오는 장면 하나를 소개하지요. 한번은 아들이 어머니와 함께 도둑질을 하러 나섭니다. 그래서 훔쳐 오지요. 훔치는 과정에서 지문을 남기고 일부러 주민등록증까지 남겼는데, 막상 형사들은 들이닥치지 않습니다. 형사들이 잡으러 오지 않으니까 모자는 불안해집니다. 빨리 잡아갈수록 덜 불안하니까, 온갖 지문을 남기고 했는데 예상 밖으로 추적의 발걸음이 더디었던 거죠. 그러다가 형사가 들이닥치니까 어머니와 아들은 뛸 듯이 기뻐하며 만세를 부릅니다. 그런데 "드디어 왔다!" 하는 순간, 찾아온 형사는 아들을 잡아가지 않고, 돌연 그 자리에서 어머니를 쏴서 죽여 버리죠. 이렇게 되니, 아들만 잡혀가고 어머니가 쓸쓸하게 아들을 기다리던 집이라는 구조가 그만 깨지게 되지요.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집으로 돌아와서, "하늘에 계시는 우리 어머니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하고 기도하지요. 어머니가 형사한테 사살당하고 혼자 쓸쓸하게 돌아와서 기도를 하는데, 기가 막힌 패러디에요. 그 흔한 주기도문을 패러디해서 이렇게 외는 겁니다. 똑같은 기도문인데도 얼마나 패러디를 잘 했는지 모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어머니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어머니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집에서 살면 도둑질을 얼마나 많이 해야 되고, 얼마나 많이 잡혀가야 되고, 얼마나 많이 불안해해야 하는지 모르는데, 다 일용할 양식 때문에 그렇다는 거죠. 교회의 목사가 말할 때보다 이 기도문이 훨씬 더 절실하고 기가 막혀요. 신을 지독하게 모독하면서도 그 속에서 인간에 대한 슬픔, 고독을 은연중에 표출해 보여주고 있지요. 가시적 공간과 비가시적 공간을 활용할 뿐만 아니라, 모든 의미의 패러디를 통해, 즉 감옥이 얼마나 행복한 곳이며 거기에는 누가 잡아가지도 않는 곳이라고 설파하죠. 하지만 오히려 역설적으로 우리네 삶이 얼마나 불안한 곳이며 가식에 차 있는가를 말해주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