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햇빛 상자'는 어머니가 아이를 방에 가두고 외출했다 집에 불이 나면서 아이가 숨진 사건을 소재로 한 정서원의 창작극.
정란은 남편과 7살 난 딸을 둔 전업주부. 그러나 남편이 사업실패로 자살하자 딸 누리와 지하 단칸방에서 생활하며 닥치는 대로 일을 한다. 그러던 중 엄마가 직장에 나간 사이 방안에 갇혀 있던 누리는 화재로 목숨을 잃는다. 그후 3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정란은 딸의 죽음에 대한 자학과 강박관념에 싸여 생활하게 되며 결국 누리의 환영과 대화를 통해 삶에 대한 의지를 되찾는다.

줄거리 상세
정란은 남편과 7살난 딸을 두었던 전업주부였다.그러나 남편이 사업실패로 자살을 하자 딸 누리와 지하 단칸방에서 생활하며, 빚과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했다. 그러나 직장에 나간 엄마를 기다리다 누리는 화재 로 인해 죽고만다.엄마가 딸을 보호하기 위해 방을 잠근 것이 화근이었다. 그리고 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누리가 죽고 나서 정란은 건물청소부로 삶을 이어간다. 얼핏 그녀의 삶은 누리가 죽기 이전과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녀가 집에 돌아오는 순간부터 달라진다. 그녀는 밖의 평범한 생활과는 달리 집안에서는 항상 죽은 누리와 삶을 공유 한다. 누리의 죽음에 대한 자학과 누리의 엄마로서만 존재해야 한다는 그녀의 강박관념은 계속되는 환영 에 쫓기게 하고, 어느 누구도 아니고 바로 자기자신을 위해서 살 아야 한다는 친구 선주의 충고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나 죽은 누리의 환영은 말한다. 자신을 안아줄 수도 없으면서 놓아주지도 않는 엄마가 원망 스럽다고. 그때야 비로소 정란은 죽은 누리에게 자신의 마음 속 깊이 묻어 두었던 자신에 대한 원망을 누리에게 털어 놓는다. 정란은 누리와 화해를 하는 것이다. 이제 비로소 정란은 아침이 오니 까 눈을 뜨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눈을 뜨니까 아침이 오는 것이 라고 외치고 싶어진다. 그리고 삶은 살아지는 것이 아니라 살아야 한다는 것도 깨닫게 된다.

이승희 - 드라마투르기
<햇빛상자>가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던 것은 아주 우연한 계기로부터 비롯되었다. 지난 가을 이러저러한 여담 중에 작가의 근황을 묻는 연출자에게 <겨울에 두고 온 작은새>라는 작품에 대하여 이야기해주었다. 그 작품의 소재는 때마침 연출자의 뇌리 속에서 떠나지 않고 있었던, 그야말로 '작은'였다. 이런 '필연적인 만남'으로 시작된 이번 작품이 <햇빛상자>로 태어나기까 지는 몇 가지의 과정과 단계가 필요했다. 우선 원작이 방송대본이라는 점, 그래서 이를 연극적 상상력으로 재구성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 작업이 연극대본을 처음 써보는 작가로서는 무척 부담되는 일일 수 있었다. 그렇지만 평소에 영상과 연극의 만남에 관해 관심이 깊었던 연출자는 그러한 부담스러운 상황을 오히려 새로운 시도를 창출하는 에너지로 삼았고, 그에 따라 작가는 3차원과 2차원의 다른 질감을 서로 충돌시키면서 또다른 제3의 의미를 생산해내는데 주력할 수 있었다. 문제는 실제 무대에서 얼마만큼 영상이 연극적 상상력을 차단하지 않으면서 그 효과를 극대화하여 새로운 시도로서 값하는가에 있다고 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사회면에 아주 가끔 실리는 '일상화된 사건'을 연극화한다는 것,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고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라는 아주 기본적인 문제에 대한 합의가 필요했다. 원작에서 처음으로 조정된 것은 정란(엄마)과 누리(딸)를 대등하게 다뤄보자는 것이었다. 누리를 죽음으로 몰아간 상황에 대하여 누리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감정과 이해들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그것은 곧 정란에 대한 원망이 너무나도 부당한 세계에 대한 분노를 표현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 우리들의 자화상을 그려보자는 것이다. 그리고 또다른 축으로서의 정란을 통해 사회적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강요된 모성' 이데올로기로 인한 절망감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로부터 해방 되어 삶을 긍정하고 싶어 하는 인간의 자연성을 보여 주고자 했다. 그러나 이러한 이중 초점은 주제의 산만함을 초래할 우려가 있어 여러 차례의 분석과 토론을 거쳐 정란을 작품의 중심으로 삼아 전개시키기로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정란이 처해진 절망의 상황을 강하게 환기하면서 존재의 이유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하자는 것이다. 이에 따라 누리는 정란이 잊을 수 없는 고통의 한가운데에 그녀가 불러낸 환영으로서 무대 위에 존재하고, 때로는 정란의 기억 한자락에 존재하는 캐릭터로 설정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러한 설정만으로는 애초에 의도했던 주제를 드러낼 수는 없다. 정란이 놓여진 절망적인 상황이 온전히 개인의 몫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회의 제관계와 얽혀 있는 가운데에서만 읽혀질 수 있다. 즉 정란이 그런 처지에 놓일 수밖에 없었던 외부적 상황이라는 것이 존재하며, 또한 '서방 잡아먹고 아이까지 잡아먹었다'는 사회적인 시선은 곧 정란 자신에게도 이미 내재화된 고통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누리를 현실로 불러내 상상적 동거를 꾀하는 정란 역시 이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강한 욕망을 가지고 있다.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는 자연에 대한 겸허한 자세까지는 아니더라도 산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존재 이유라는 점을 정란에게 환기시키고자 했다. 이를 위해, 정란을 자폐적인 공간 에서 이끌어내려는 그녀의 친구 선주를 등장시켜 정도차이는 있을 지라도 그녀와는 다른 삶을 대조시켜 보려고 했다. 그리고 바쁜 현대사회에 가쉽거리밖에는 안되지만 당사자에게는 엄청난 고통으로 다가오는 사회적인 시선, 그런 동시에 정란 자신의 내부적인 갈등을 드러내기 위해 비사실적인 세 장면을 구성하였다.
이제 문제는 마무리이다. 3년 동안 그렇게 살아온 정란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세상으로 나오는 계기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이 대목에서 어떤 성급한 결론을 보여줄 수 없다고 판단했다. 사람은 어떤 섬광같은 계시를 통해 대전환을 꾀할 수 있지만, 그것은 시간을 요하는 문제이다. 따라서 정란의 내면에서 들려오는 누리의 소리를 들으며 절망의 밑바닥에서 수면 위로 서서히 올라오기 시작하는 것으로 마무리짓기로 했다.
여기까지가 <햇빛상자>를 올리기까지 이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의 노고에 의해 구성된 것이다. 준비해온 의도는 의도대로 무대화 될 터이지만, 관객들은 이를 통해 자신의 삶에 대하여 환기하는 것, 그것이 이 공연의 궁극적인 목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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