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이가 8년째 앓아 누워있는 광식은 고층건물의 유리창을 닦는 남자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고 다 잘될 거라고 말하지만 남자는 보란 듯이 광식의 앞에서 줄을 끈고 13층에서 떨어져 죽는다. 광식은 곧바로 자기 아이의 인공호흡기를 끈는다. 정애는 유리창 닦는 남자를 만나지만 그가 자신의 남편인 광식인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정애와 남자는 한편으로는 서로를 할퀴며 한편으로는 위로를 해 준다. 광식은 산동네의 재개발 지역으로 가서 폭력을 휘두르며 남자의 아이를 죽게 만들고 한편으로는 자본으로부터의 폭력을 당한다. 모든 등장인물들은 얽히고 얽혀서 자신과 타인도 구별하지 못하며 꿈과 현실조차 구별하지 못한다. 일련의 사건들은 어쩌면 모두 꿈일 수도 있고 모두 현실일 수도 있다. 하루저녁의 끝은 절대 오지 않을 것 같다. 「블랙홀」에서의 등장인물들이 그러한 혼란을 겪는 이유는 현실의 가혹함으로 인해 마비되어버린 감각의 상실 때문이다. 그러나 블랙홀에서조차 빛은 빠져나갈 수 있는 것처럼 등장인물들은 가느다란 빛으로 인생의 블랙홀을 빠져나간다. 뉴스의 토막기사였던 한 아이와 그 부모의 이야기는 한 동한 블랙홀에 빠져서 빠져나오지 못하다가 이렇게 정리되었다.
사실 연극 자체는 이것이 과거/현재/미래가 서로 뒤섞여 있어서 내용구성이 쉽지 않은 극이다. 이 연극의 독특한 점은 절정과 해소가 계속 반복적인 변주로 이어진다는 점에 있다. 정말 교과서에서나 배우는 기승전결식의 연극과는 거리가 멀었죠. 충격과 감동으로 눈물을 흘리다보면 어느 새 다시 극이 연결되고 다시 곧 충격과 감동을 이끌어낸다. 독특한 방식이었습니다. 무대 배치나 도구들이 특히 인상적이었으며, 극의 효과를 극대화했다. 유리창 닦이 남자는 극의 중요한 인물인데, 대사가 하나도 없었음에도 행동만으로 그 모든 긴장감을 불어넣었다는 게 참 좋았다. 다만, 병원에서 비슷한 상황에 있는 부부들을 끼워넣은 것은 다소 산만하게 느껴졌다. 아마도 비슷한 상황에 처한 인간성 상실을 더 극대화하고 싶었던 모양인데, 극의 긴장감을 해치는 듯 했다. 끝났겠다 싶으면 다시 시작하고, 끝났다 싶으면 다시 절정에 이르는 이런 방식은 제겐 낯설은 것이었음에도 정말 연극계의 새로움이란 이런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손탁이었나요? 감수성의 변이와 형식실험만 남았다는 말이 와 닿는 부분이었지요. 특히 이 연극의 내용은 사실 빈민촌 철거와 병석에 오래 누운 아이를 죽임 등 에 관한 것으로 어찌보면 굉장히 진부한 소재이며,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고전적인 소재'임에도 형식실험을 통해 현대적인 감동과 절정을 이끌어 낸 점이 좋았습니다.

■ 당선소감 “수술후 벅찬 소식… ‘이런게 인생이구나’ 느껴”
갑자기 배에 기형종이 생겨 수술을 받게 되었고 수술 직후 당선 소식을 들었다. 통증과 전신마취 후의 몽롱함 속에서 들은 가슴 벅찬 소식이었다.‘이런 게 인생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몇 년 전부터 나는 ‘대전여민회’라는 여성운동단체의 연극 소모임 ‘돼지꿈’에서 활동을 해 왔다. 다양한 계층의 수많은 여성 문제를 연극으로 만들어 공연을 하면서 ‘연극’이라는 것이 사람의 다친 마음을 치료해주고 닫힌 마음을 열어주는 최고의 약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간호사로서 막연히 연극에 대한 동경만 가지고 있던 나를 연극판으로 이끌어주고 몇 년을 한결같이 믿어준 대전여민회의 언니와 동생들 그리고 진연 언니에게 가장 먼저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나와 같이 몇 년을 울고 웃으며 연극을 했던 모든 돼지꿈 단원들과도 술 한 잔 하면서 기쁨을 나누고 싶다. 정말 소중한 사람들이다. 단 몇 평의 무대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매력적인 공간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신 김상열 교수님께도 감사를 드린다. 부모님, 대전대의 모든 교수님들과, 같이 스터디했던 동료들, 그밖에 작품을 열심히 읽어주고 평을 해주고 격려를 아끼지 않아 주었던 모든 분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마지막으로, 지금도 해결되지 않은 병마와 싸우고 있는 환자와 그의 가족들에게 위로의 말과 함께 개인이나 가족의 병이 아닌 사회의 병으로 인식해 같이 치료할 날을 바라며 당선 소감을 마친다.

김미정
1971년 대전 출생
충남대학교 간호학과 졸업, 대전대 문예창작대학원 수료
대전여민회 문회위원장(연극모임 ‘돼지꿈’ 연출 및 극작 활동)
■ 심사평 “꿈·현실 넘나들며 존재의 불가사의 부각 돋보여”
신춘문예에도 유행은 있는가 보다. 올해 응모작들도 예외는 아니어서 심사를 하면서 그 작품이 그 작품 같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다른 말로 하면 개성 있는 작품이 눈에 띄지 않았다는 말이다. 자의식과 관념이 과잉되어 작가 본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작품들, 고통의 아우성만 보여주고 고통의 근원을 성찰하지 않으려는 엄살과 감상(感傷)덩어리의 작품들, 무뇌아적 형식실험에 진부한 소재를 안이하게 결합한 작품들, 존재의 배를 가르고 내장을 꺼내 보이려는 도살의 욕망은 보이나 존재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나 깨달음은 보이지 않는 작품들 등.
개성이나 독창성의 기준을 떠나 극작의 기본기를 중심으로 작품을 선별하려고도 해보았으나 단편희곡이 지녀야 할 덕목을 지닌 작품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사소한 소재를 의미심장하게 구성해내는 능력, 압축적이면서 오랜 울림을 줄 수 있는 내공, 존재의 심연을 깊고 섬세하게 응시하는 통찰력을 지닌 신인을 만날 수 없었다. 정말 심사를 하는 입장에서 독창성보다 기본기에 충실한 신인을 기대했다. 그 이유는 대개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작가들이 등단과 함께 사라져가는 경우가 너무나 허다하기 때문이다. 등단은 시작일 뿐이다. 그런데 시작과 동시에 끝을 내다니. 참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김미정의 작품과 박재원의 작품이 최종적으로 거론되었다.
박재원의 희곡은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서라운드(surround), 다시 말해 삶의 조건에 대한 성찰이 엿보인다는 점에서 좋은 평을 받았다. 그러나 형식이 지나치게 단순하고 삶의 조건에 대한 중심인물의 대응이 자폐적이라는 지적 또한 면할 수 없었다. 김미정의 ‘블랙홀’은 공간, 인물, 사건의 혼재와 병치, 꿈과 현실의 넘나듦을 통해 존재의 불가사의한 면을 부각시켰다는 점에서 좋은 평을 받았다. 무엇보다 연극 공간의 활용과 극적 이미지의 연결이 돋보였고 무거운 소재를 다루는 와중에도 코믹함을 잃지 않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 김철리 김태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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