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의 첫 장면부터 대사 속에 나오는 인명과 과학용어가 머리를 복잡하게 한다. 상대성이론· 칼루자· 인플레이션 현상· 태양의 질량· 사차원의 기하학적 공간· 웜홀· 양자역학 등이다. 어렵게 인식되는 과학 얘기를 끌어들이긴 했지만 이 연극은 결국 우리의 삶을 이야기한다. 주인공은 여고 시절 엄마의 자살로 깊은 정신적 상처를 입고 방황하는 차연. 지병이 있었던 엄마는 늘 딸 앞에서 "지겹다! 사는 게 지겨워! 죽어버리고 싶어!"라는 말만 되풀이했고 차연은 그런 엄마가 자신의 고통만 알았을 뿐 자살을 통해 딸을 버렸다고 생각한다. 엄마가 죽은 후 어느 날 우연히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읽게 된 차연은 자신의 존재감을 느끼고 원인과 결과가 분명하게 연결되는 인과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물리학에 매달리게 된다. 차연은 자신의 존재감을 느끼기 위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읽으며 물리학 연구에 빠져든다. 그가 빠져든 과학적 가설은 평행우주이론. 공상과학영화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평행우주는 우리가 알고 있는 우주 외에 수없이 많은 우주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가설을 더욱 확대하면 여러 우주 공간에 동일인이 동시에 존재하며 한 공간 속 인물의 행동은 다른 공간 속 동일인의 행동에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작품은 이 같은 현대 물리학의 담론을 빌려와 "인간의 삶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라는 존재론적 질문을 던진다.
무대에는 두 개의 공간이 있다. 왼쪽은 물리학에 빠진 19세의 차연, 그리고 중년의 물리학과 교수이며 자살한 엄마의 애인으로서 그녀의 사후 차연의 보호자 역할을 자임한 우제 등 두 사람의 무대다. 오른편은 72세 노파인 차연의 공간. 치매증세가 있는 노파 차연은 거리에서 쓰러져 노숙자에 의해 경찰 지구대로 옮겨지나 자신이 누구인지를 증명해내지 못한다. 노파의 장면은 젊은 차연의 꿈속에서 나타난 것이며 젊은 차연의 장면은 노파 차연의 꿈속 얘기로 서로 독립적으로 전개되면서도 연결고리를 갖는다. 때로는 희미한 조명 속 젊은 차연의 동작을 밝은 조명 속의 노파 차연이 그대로 따라 하는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평행우주의 개념에서 비롯된 동작이다. 두 개의 공간은 장의 변화에 따라 번갈아 조명을 받으며 갇힌 삶을 살았던 차연의 고통과 절망감을 드러낸다.
극 중 긴장을 고조시키는 것은 우제와 차연 간 관계의 발전. 늘 우울하고 폐쇄적인 차연에게서 자살한 애인의 모습을 발견한 우제는 못다 한 사랑을 차연과의 성적 관계를 통해 보상받으려 한다. 이런 상황에 대한 차연의 대응심리는 매우 복잡하게 엉켜져 있다. 우제의 위선적이며 엄마처럼 자신을 버리는 듯한 태도에 차연은 분노하고 좌절하며 증오심을 드러낸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꿈에서 늙은 자신의 모습을 보는 등 삶 속에 나타나는 평행우주 가설의 입증을 위해 물리학자인 우제를 필요로 하고 옆에 붙잡아 두려 한다. 그러는 사이에 차연의 삶은 더욱더 나락 속으로 빠져들어 가고 "지겹다! 사는 게 지겨워! 죽어버리고 싶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던 엄마를 닮아가게 된다.
이야기의 구성이 잘 짜인 피륙처럼 치밀하고 정교하며 차연의 어두운 내면 심리를 드러내는 섬세한 대사가 돋보인다.
작품의 마지막에 노파가 차연을 낙엽 쌓인 정원으로 데리고 나가 "두려움을 극복하는 제일 좋은 방법은… 받아들이는 거야. 어서 밟아 봐. 이 낙엽을, 죽음을 온몸으로 느껴봐"라고 얘기하는 대목이 여운을 남긴다.
이여진은 서강대학교 신문방송학과 대학원 출신으로 2012년 경상일보 신춘문예 <소녀 프랑켄슈타인>으로 등단했다. <평행우주 없이 사는 법> <트라우마 수리공> <어느 물리학자의 낮잠> <토일릿 피플>을 발표 공연한 미모의 여류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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