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 개발 연구소의 김 팀장과 주진우. 회사 근처에서 발생한 원자력 발전소의 폭발로 벌써 한 달 째 고립 생활을 하고 있다. 사방은 방사능 노출에 의해 나뭇잎이 말라죽고, 전기 공급까지 끊겼다. 죽은 도시. 그 속에서 그들은, 살아 남기위해 회사의 매뉴얼과 상사의 지시에 따라 쉽게 끝나지 않을 고립의 시간을 견딘다. 그들의 공간에는 그들을 외부의 세계로 연결하는 문이 있다. 그러나 그 문을 열면 죽는다. 김 팀장의 믿음에 의해 문은 더욱더 견고한 벽이 되어간다. 신입사원 주진우는 이 상황이 혼란스럽다. 무한히 연장된 시간, 그 속에서 창밖의 풍경은 이상하게도 마른 나뭇잎 외에는 아무 변화가 없기 때문이다. 주진우의 눈에는 존재할 리 없는 외부인의 모습이 보이기 때문에…. 정말 내가 믿고 있는 것이 사실일까? 정말 원자력 발전소가 폭발되었나? 더욱 더 혼란스러워진 주진우. 그러나 김팀장은 주진우가 보는 것은 신기루라고 말한다. 의심은 자기를 파괴하는 병이므로 매뉴얼, 규칙, 지시에 따라야 생존할 수 있다고. 매뉴얼을 무시하고 밖으로 나가는 순간 우리는 모두 죽게 된다고. 시간이 흐른다. 한 달 후. 여전히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문은 닫혀 있고, 창밖의 풍경에는 아무런 동요가 없다. 먹을 것은 바닥나고 폭발사고에 대한 기억도 차츰 흐려진다. 그러던 어느 날. 닫힌 문 뒤로 노크소리가 들린다. 아니라고 부정할수록 강도를 더해 문 저편에서 들려오는 노크소리... 그것은 실존하는 소리인가? 아니면 환청? 혹은 구원자인가? 역시나 신기루일까? 노크소리는 계속되고 김 팀장과 주진우는 혼란에 빠져드는데...
고사枯思 : 말라버린 생각, 길들여진 머리.
고사枯思는 현대 수많은 정보들 속에 조정되고 있는 현대인의 운명을 그리고 있다. 허구화된 사실과 정보를 급속히 개인의 삶으로 받아 드리고, 인정해 버리는 등장인물의 모습을 통해 잘못된 진실에 노출되고 세뇌 당하는 현대인의 자아상을 그려 보인다. <고사>는 보이는 것이 진실인지, 믿는 것이 진실인지에 대하여 생각해보게 만드는 작품이다. 진실을 대하는 자세에 대한 깊은 성찰이 이 연극에 담겨져 있다.
김팀장은 7년 재수 끝에 늦깎이 신입사원으로 입사했으면서도 한 달간 칼 퇴근을 하는 주진우가 거슬리고 주진우는 7년간 기다려준 여자 친구에게 프러포즈하러 가려는 자신에게 야근을 강요하는 김 팀장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렇게 처음부터 갈등을 가졌던 두 사람은 같은 공간에서 한 달간 있으면서 교감을 가지고 서로 이해하게 된다. 김 팀장과 주진우는 상대를 이해하면서 상대방에게 너무 많이 들어가서 교감을 가진 후 두 사람의 입장이 교체된다. 한 사람만 상대방의 의견 속으로 들어갔으면 의견일치를 보았을 것인데, 두 사람 모두 변하여 또 다른 입장에서 의견 충돌이 생긴 것이다. 일종의 인과관계의 모순이다. 연극에서 연구소로부터 외부로 통하는 문은 김 팀장의 믿음에 의해 견고한 벽이 된다. 보이는 문이 믿음이 만들어낸 벽이라는 것을 거부하던 주진우는 벽의 추종자가 되고, 김팀장은 문을 나서면 새로운 희망이 생길 것이라는 주진우의 마음이 된다. 김팀장과 주진우의 입장변화는 한정된 공간에서 특정한 상황에서만 나타나는 일은 아니다. 우리가 살면서 대부분 초심을 기억하지 못해서 그렇지, 잘 살펴보면 초심과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을 수도 있다.
다만, 김팀장과 주진우는 짧은 시간 동안에 관객들이 지켜보고 있기 때문에 그 변화와 교체를 알아볼 수 있는 것이고, 실제 우리의 삶은 상대적으로 긴 시간 속에서 지켜보는 제3자도 같이 변하기 때문에 진실을 대하는 자세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바로 느껴지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고립된 공간에서 한정된 식량으로 구조를 기다리는 것은 영화 <마션>을 떠오르게 한다. 한정된 식량을 아껴 먹으며 버티고, 동료의 물품 속에 숨겨둔 음식을 찾아내어 기쁨을 누리는 것도 <고사>와 <마션>의 공통점이다
김민정 작가는 2014년 전 국민을 뜨겁게 달구었던 영화 <해무>의 원작자로서 <가족의 왈츠> <십년 후> <나! 여기 있어> <이혈> 등 인간의 심리와 내면에 정통한 다양한 형식의 희곡을 집필 발표하고 있는 한국의 대표 극작가중 한 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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