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피에르 코르네유 '연극적 환상'

clint 2015. 11. 18. 16:01

 

 

 

 

 

 

〈연극적 환상L' Illusion comique〉은 코르네유의 여섯 편의 희극과 한편의 희비극, 그리고 한편의 비극에 이어 나온 작품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전에 보지 못했던 아주 독특한 형식을 보여 준다. 더구나 희극을 주로 쓰다가 〈메데이아〉같은 비극을 발표함으로써 비극으로 관심을 옮긴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낳던 차에 이렇게 새로운 형태의 희극을 선보인 것이다. 〈연극적 환상〉은 희극이라기보다는 희극과 비극이 함께 어우러져있는 '기괴한 작품'이다. 1막은 프롤로그라고 볼 수 있고, 이어지는 2, 3, 4막은 불완전한 희극이며, 마지막 5막은 비극이니까. 그래도 전체적으로는 희극으로 분류할 수밖에.

 

 

 

<연극적 환상〉은 다소 황당한 연애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규칙을 벗어난 이 새로운 시도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스타일과 인물들을 보면 이것은 전적으로 희극이다. 순전히 관객의 웃음을 자아내기 위해서 만들어진 장면도 여러 군데 있지만, 5막은 짧아 아리스토텔레스가 요구하는 웅장함을 갖추고 있지는 않지만 클랭도르와 이자벨이 연극배우가 된 사실을 아직 밝히지 않은 상태에서 마치 그들의 사랑 이야기의 연속처럼 보이는 연극을 하도록 설정한 것은 클랭도르의 아버지를 놀라게 하면서 반전의 묘미를 발휘하게 된다. 물론 관객도 놀라게 하고 말이다. 이 작품은 희극적 요소와 비극적 요소가 공존한다는 것뿐만 아니라 '시간의 일치' 와 '장소의 일치' 같은 규칙과 관련해 서도 이야깃거리를 안겨준다. 우선 장소의 일치는 대체로 지켜지고 있다. 알캉드르의 동굴 앞에서 그가 보여주는 환상의 세계를 보는 것이니까. 반면에 시간의 일치, 다시 말해 24시간 규칙은 잘 지켜지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시간을 초월한 이 모든 이야기가 사실은 공연이 지속되는 시간 내에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결국은 이 모든 이야기가 알캉드르가 보여 주는 마법의 세계에 속해 있으니까. 일단 마법사 알캉드르는 작가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리고 이 연극이 그의 마법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가 극을 무대에 올리는 책임자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겠다.

 

 

그리고 마타모르는 웃음을 주기 위해 들어간 인물로 보인다, 그와 같은 허풍쟁이 군인은 스페인, 이탈리아 연극에 감초처럼 등장하는 인물이다. 하녀 리즈는 여러 가지 문제제기를 하게 만드는 인물로 우선, 하녀인 그녀가 자신의 주인인 이자벨과 동일한 인물을 사랑하는 것이 이 그렇다. 자신의 욕망을 억제하고 희생적인 사랑의 길을 택하는 모습은 비장함마저 느끼게 하는데, 이런 점은 희극 속의 하인으로서는 조금 걸맞지 않은 감이 있는 것 같다. 이 작품에 이어서 발표된 〈르 시드Le Cid>에서도 이와 유사한 '양보하는 사랑'이 등장하며, 의 코르네유의 여러 작품에서 이와 비슷한 주제가 나타난다. 언뜻 자신의 욕망을 자제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런 양보 혹은 포기 행위에서는, 사랑하는 사람의 미래를 위해 공을 세운다거나 그 사람의 결혼 상대자를 골라준다거나 하면서 결국은 그 사람의 운명이나 인생을 지배하고자 하는 또 다른 욕망이 보인다. 또 리즈에게서는 클랭도르를 사랑하면서도 원망하고, 그를 포기하는 아픔과 그를 지배하는 달콤함을 동시에 느끼는 매우 복잡한 성격이 보인다. 이 작품은 모든 것을 불규칙하게 섞어놓는 데 목적이 있다. 인물의 성격도, 리즈의 성격도 그 일부라고 볼 수 있겠다.

 

 

 

 

 

마지막 부분에서 연극이라는 예술을 찬양하는 얘기가 나온다. 그 당시 연극은 리슐리외 경의 배려와 여러 이론가들, 그리고 배우와 관객의 관심과 호응 속에서 괄목할 만한 성장을 거두었다. 연극은 귀족과 왕의 관심까지 끌며 장안의 화젯거리가 되었고 단순한 구경거리를 넘어서 우리의 문화적 욕구까지 채워주는 장르가 되었다. 이는 궁극적으로 우리의 문화생활의 질을 향상시킬 것이다. 연극이라는 예술이 사회를 위해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다. 무대에 올려진 작품을 통해 관객들은 정치 토론을 벌이기도 하고 작품의 미적 완성도를 평가하면서 누구나 문예비평가가 될 수도 있다. 또한 잘 다듬어진 언어를 들으면서 언어를 순화할 수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눈앞에서 벌어지는 가상세계 속에 몰입한 관객들은 연극을 통해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감동을 맛보며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이다. 코르네유는 5막에 배우들이 연극을 하는 장면을 넣어, 이처럼 연극 속에서 다시 연극하는 장면을 보여주고 배우라는 존재를 극중 인 물로 설정한 것은 연극이라는 장르 혹은 배우라는 직업에 대해 일 종의 경의를 표시한 것이다. 연극 속에 연극하는 장면을 넣은 것은 연극은 현실이라는 생각에서다. 배우에게는 연기가 곧 그들의 현실이고 관객은 연극 속에서 현실을 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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