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 '채권자들'

clint 2026. 6. 29. 06:40

 

 

해변 휴양 호텔의 객실에 딸린 응접실이다. 
화가 아돌프가 작은 나체 여성상을 조각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옆에는 일주일 동안 방문 중인 새 친구 구스타프가 있다. 구스타프는 아돌프의 삶에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아돌프는 화가였지만, 구스타프의 설득으로 조각가가 되었다. 
아돌프의 아내 테클라는 지난 일주일 동안 집을 비웠다. 그 원인이, 아돌프는 그녀를 

"늙은 바람둥이"라고 부르며 이제는 요염하게 굴기엔 너무 늙었다고 말해 그녀를

화나게 했다. 아돌프는 아내 테클라 덕분에 많은 것을 배웠다고 생각했지만, 
구스타프에게 결혼에 대해 얘기하면서 자신의 행복에 대한 생각이 바뀌기 시작한다. 
그러다 아돌프의 불안감이 극에 달해, 구스타프의 표현으로 거의 간질발작을 일으킬 
뻔한다. 관객은 구스타프가 사실 테클라의 전 남편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하기 시작한다. 
두 남자는 끊임없이 그녀에 대해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테클라는 첫 남편 구스타프와 
헤어진 후, 자신을 모델로 한 소설을 썼는데, 그 소설 속 주인공을 바보로 묘사된다. 
테클라가 도착하자, 구스타프는 옆방에 숨어 엿듣겠다고 한다. 아돌프는 테클라를 

다루는 법을 배운 대로 아내의 속마음을 떠보려 한다. 아내가 바람을 피우는지, 

그리고 떠나기 전 자신에게 했던 말에 대한 복수를 하려는지 알아보려는 것이다.



테클라가 등장한다. 아돌프보다 연상이지만 미모에 세련미까지 갖춘 여인이다. 
테클라는 매력적이고 활기차게, 남편에게 추파를 던진다. 아돌프는 그녀의 매력에 
넘어가지 않으려고 애쓰지만 부인은 그를 자식을 대하듯 껴안고 어루만진다. 
그러면서 주위를 둘러보고 누군가 오지 않았느냐고 묻자, 그는 그런 일이 없다고 
시치미를 뗀다. 둘은 일상처럼 두 사람만의 색다른 육체접촉에 몰입하려 한다. 
그때 구스타프가 인기척을 내니, 여인은 놀라고, 아돌프도 당황해 밖으로 나간다. 
나간 사이에 구스타프가 모습을 드러낸다. 
여인은 그를 예사롭지 않게 대한다. 둘의 대화를 통해 그가 전남편임이 밝혀진다. 
그리고 구스타프가 아직도 여인을 잊지 못하고 있음도 느껴진다. 그녀도 전남편을 
사랑한다고 답한다. 근처에서 인기척이 난다. 구스타프가 살펴보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두 사람은 다시 사랑한다는 말과 함께 포옹도 한다. 
그때 신음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에 놀란 구스타프가 밖으로 뛰어나가 숨어있는 
아돌프를 데려온다. 그러나 그 상태가 심상치가 않다. 아돌프는 무대중앙에 쓰러져 
숨을 거둔다. 망연자실해 우는 테클라와 묘한 미소를 짓는 구스타프... 말한다.
"아, 그녀도 그를 사랑했구나. 불쌍한 사람."
막이 내린다.

 

 

 

이 작품은 남자와 여자를 채권자-채무자 관계로 빗대어 애정심리를 풀어나간다. 

현대연극의 아버지라 불리는 스웨덴 극작가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가 첫 번째 부인 

시리와의 애증관계를 투영했다는 작품이다. 등장인물은 화가인 아돌프와 그의 아내인 

소설가 테클라, 그리고 그녀의 전 남편인 구스타프 3명이다. 3막으로 이뤄진 이 작품은

맨 마지막 장면에 잠깐 세 명이 한꺼번에 무대에 나올 뿐 각 막에 두 명씩 출연한다.

두 등장인물 사이의 대화는 매우 밀도가 높다. 삼각관계이지만 멜로드라마가 아니다.

작품 속에는 부부로 살아가면서도 각자의 방식대로 사랑을 얻기 위해 '투쟁'하는

남자와 여자의 복잡미묘한 내면의 심리가 섬세하게 그려져 있다. 자신의 관점에서만

상대를 변화·종속시키면서 욕망을 채우려 하는 인물들의 모습이다.

결국 아돌프는 죽고, 테클라는 진정 사랑하는 이를 떠나 보내고,

구스타프는 사랑의 복수도 하지 못하고 사랑도 얻지 못한다.

 

 


<채권자들>은 스트린드베리의 자전적인 소재의 극이다. 스트린드베리는 3번 결혼했고, 첫 번째 부인 시리 본 에센은 배우였다. 시리가 스트린드베리와 만났을 때 그녀는 유부녀였고 배우로서의 야망을 가지고 있었다. 시리는 상류계급 출신 남작부인이었고, 스트린드베리는 스톡홀름의 몰락한 상인과 그 집 하녀 사이에서 태어나 불우한 성장과정을 겪었다. 시리는 스트린드베리와 결혼 후 배우가 되었고, 스트린드베리는 시리를 출연시키기 위해 <미스 줄리>를 썼다. <미스 줄리>는 시리를 주인공으로 초연되었다. <미스 줄리>의 초연은 혹평과 함께 막을 내렸으나 파리에서의 자유극장 공연이 엄청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켜 스트린드베리를 세계적인 작가로 탄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스트린드베리의 자연주의 비극 3편, <아버지>, <미스 줄리>, <채권자들>은 모두 스트린드베리와 시리의 애증에 얽힌 결혼생활을 그린 자전적인 작품들로, 독립심 강하고 창의적이고 예민한 예술가적 기질까지 닮은 두 사람의 '깊은 영혼 공동체"와 같은 격렬하고 파괴적인 결혼생활을 그리고 있다. 스트린드베리와 시리는 13년간의 결혼생활을 끝으로 증오의 대상이 되었으며, 스트린드베리 작품에 나타나는 여성혐오. 성의 투쟁. 병적 질투심의 동기가 되었다.   

 



<채권자들>은 <미스 줄리> 직후 연속해서 매우 빠른 속도로 2주 만에 집필된 작품이다. 당시 스트린드베리는 시리와의 이혼문제로 괴로워 하고 있었고, 외부와 단절하고 증오와 망상에 시달리는 끔찍한 상황이었다고 한다. <채권자들>은 1888년 쓰여졌고, 처음부터 여주인공 테클라 역할은 시리를 염두에 두고 쓰여졌고 실제로 시리에게 역할이 제안되었으나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다음해 덴마크의 젊은 여배우 나탈리아 라르센이 주연으로 공연되었다. 이 작품은 스트린드베리 스스로에 의해 "나의 가장 원숙한 작품"이라고 회고 되고 있다. 이 작품에서 스트린드베리가 새롭게 창조한 캐릭터인 테클라는 스핑크스, 메두사, 메디아, 페드라, 살로메 등 신화 속의 악녀나 마녀와 같은 강력한 여성인물의 계보를 잇고 있다. "뱀파이어 와이프" 테클라는 중년이다. 그녀는 나이듦에 대한 강박적인 두려움을 나타내는가 하면, 상냥함을 가장한 천박함이라는 이중성을 지니고 있으며, 자신의 성적매력을 손쉽게 이용할 줄도 아는 매우 현실적이면서도 파괴적인 마력을 지닌 성모와 같은 신성함과 동물적 야만성을 동시에 지닌 복합적인 캐릭터이다. 테클라는 마치 흡혈귀처 럼 남자들의 돈과 명예, 육체적 활력과 영적 지적 능력을 탐욕스럽게 빨아먹는 존재로 비유되고 있다. 테클라는 10살 아래의 젊은 애인 같은 남편 아돌프와 20살 가량 위의 나이든 남자인 전남편 구스타프에게 동시에 구애를 받고 있다. 테클라는 애욕과 질투, 분노, 의심, 증오, 복수 등 원초적이고 강렬한, 그러면서도 매우 현실적이고 현대적인 감정들을 대변하고 있다. 

 

 


스트린드베리의 숨 막힐 듯 압축된 단순하고 쉬운 듯하면서도 고도로 상징적인, 세 남녀의 엇갈리는 애증관계라는 지극히 일상적이고 대중적인 소재(전남편과 현재 남편이 한 여자를 두고 싸우는 전형적인 멜로드라마적 소재)이면서도 극단적인 감정의 분출과 자제력과 파괴력을 오가는 혼란스러우면서 아름다운 작품이다.   
스트린드베리는 왜 남녀간의 성의 대결, 혹은 사랑의 이야기에 '채권자'라는 비유를 끌어들였을까. 소유욕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망이다. 좋은 걸 보면 가지고 싶다. 아담과 이브와 뱀의 신화적 원형은 이에 근거한다. 또한 문화인류학으로 여자에 대한 교환(족외혼및 근친 상간 금지 법칙)과 사적소유는 가부장제의 출발점이자 자본주의 발달의 실질적인 토대였다. 여자는 남편의 소유물이고 가부장적 권위를 떠받드는 존재였다. 그런데 만일 여성이 그런 소유 관계와 계약 관계를 거부한다면? 남편의 종속물인 아내가 남편의 '명령'을 고분고분 따르지 않고 자신의 사적 소유물을 축적하기 시작해서 오히려 남편을 능가하게 된다면? 테클라의 도발은 문명의 계약관계를 근본에서부터 위반하고 있다. 테클라는 매우 위험한 문제적인 인물이다. 그녀는 남편이 하나가 아니라 둘이고, 끊임없이 다른 젊은 남자들에게도 사랑받고 싶어 하며 순수한 욕망은 통제할 수 없고 위험하다. 구스타프는 끊임없이 테클라에게 "당신은 위험한 여자야." 경고한다. 그럼에도 아돌프는 질투와 의심과 불안 속에서도 그녀를 신처럼 숭배한다. 아돌프는 고갈되고 정신적·육체적 파산상태에 이른다. 그렇다고 테클라가 승리자인 것도 아니다. 그녀 또한 전체적인 파산과 고갈과 몰락 속에 함께 있다. 테클라는 구스타프 아돌프 모두를 진정으로 사랑한다. 이 작품은 모든 사랑이 끝나고 냉정한 계산만 남은, 철저한 채권채무 관계로만 남은 남녀관계, 돈(자본)의 언어로 사랑을 정산하는 과정을 치열한 논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등장인물들은 논쟁을 벌이지 않는다 그들은 말을 곤봉처럼 사용할 뿐이다. 승자는 없다. 모두가 패자일 뿐이다.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