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어거스트 윌슨 '피아노 레슨'

clint 2015. 11. 14. 07:55

 

 

 

 

 

 

어거스트 월슨 (August Wilson)은 오늘날 미국연극의 가장 두드러진 현상 중의 하나다. 1984년〈마 레이니의 검은 궁뎅이(Ma Rainey's Black Bottom)〉 (이하<마레이니〉로 약칭함) 으로 브로드웨이에 데뷔한 이래<울타리 (Fences)>(1987),<조 터너의 왕래(Joe Turner's Come and Gone)>(이하<조 터너〉로 약칭함)(1988), 〈피아노 레슨(The Piano Lesson)>(이하〈레슨〉으로 약칭함)(1990) 등을 잇달아 발표하면서 그는 미국의 대표적인 극작가로 부 상했다
독일계 아버지와 흑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월슨은 자신을 철저히 흑인으로 규정한다. 그래서 작품도 미국 사회에서의 흑인경험에 대해서 만 쓴다. 현재 그는 1900년부터 지금까지, 즉 20세기의 각 10년대별로 미국 흑인들이 당면했던 가장 중요한 문제들을 극화하는 야심찬 순환 극을 추진하고 있다 앞에서 열거한 네 편의 연극적 연대기가 오늘까지의 결과이다
그런데 상기 네 작품들을 살펴보노라면, 미국의 역사학자 아서 슐레신저(Arthur Schlesinger Jr.)가 최근에 미국을 분열시키는 위험한 의식운동으로 지목한 다문화주의 (multiculturalism) 의 선봉에 월슨이 서 있음을 느끼게 된다. 슐레신저 교수의 경고는 비 앵글로 계 백인들과 비백인 소수민족들 사이에서 분출하고 있는 광신적 민족주의로 인해서 미국사회가 민족과 인종의 동화와 통합으로부터 이화와 분리로 전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월슨은 분명 다문화주의자다 지금까지 책으로 출판된 네 편의 희곡들 이 한결같이 흑인들을 향하여 백인처럼 되려는 노력을 포기하고 그들의 뿌리인 'Africanness'에서 개인과 집단으로서의 정체를 찾을 것을 강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월슨은 1960년대의 이마무 아미리 바라키(lmamu Amiri Baraka)처럼 과격한 분리주의자는 아니다. 분리주의는 모든 백인들 을 인종적 학대자들로 탄핵하면서 그들을 타도의 대상으로 삼는 폭력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극의 구성상 백인 인물들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클 수밖에 없다 그런데 윌슨의 작품에서는 백인 인물들이 사건의 변방에 머물거나 멀리 동떨어져 있기 마련이어서 그들의 존재는 중오와 타도의 대상이 될 만한 크기를 갖지 못한다.

 

 

 

1930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레슨>의 보이 윌리는 얼핏 지금까지의 주인공들과 사뭇 다르게 나타난다. 우선 그는 남부의 미시시피로부터 누이 버니스가 살고 있는 피츠버그로 올라오기는 했지만 이곳에 정착할 뜻이 전혀 없다. 그는 다만 새로운 모습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잠시 북행을 결행했을 뿐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보이 윌리가 농부로서 의 확고한 정체의식을 갖고 남부에서의 자립을 목표로 한다는 점이다. 이는 루미스나 리비의 남부탈출과 비교할 때 대단한 인식의 전환이며 발전이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 보이 윌리가 매입하고자 하는 토지의 성격과 그 자금조달방법에 있다 그 땅은 보이 윌리네 집안이 대대로 섬겼던 서터가의 후손이 현재 소유하고 있다. 따라서 이 땅을 산다는 것은 단순히 보이 윌리가 백인 지주들과 동등한 사회적 신분을 획득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과 조상들의 진정한 노예해방을 실현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보이 윌리는 그 동안 저축해 놓은 돈으로 매입자금의 3분 의 1을, 피츠버그로 올라올 때 트럭 한대 가득히 싣고 온 수박을 팔아서 또 3분의 1을. 그리고 나머지 3분의 1은 누이 버니스가 보관하고 있는 가보인 피아노를 팔아서 충당하려고 한다. 땅 살 돈의 3분의 2를 이 북부도 시에서 마련해야 하는 것이다 요컨대 보이 월리의 북행의 동기는 루미스 나 리비의 그것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이들 작품의 결론을 보면 이 북부의 산업도시들이 자기발견의 장은 됐을지언정 자기실현의 장은 되지 못했다. 등장인물로서의 목표가 자기발견에 있었던 루이스를 제외하고 나머지 리비, 보이 윌리, 트로이 등은 모두 대도시에서의 자기실현의 꿈을 좌절당한다. 리비는 자신의 음악세계를 지원해 줄 줄 알았던 백인사장으로부터 배반을 당하고 보이 월리는 피아노를 매각하는 데 누이의 동의를 얻지 못하며, 트로이는 흑인 최초의 청소차 운전사가 됐다는 정도의 작은 성취로 만족해야 할 형편이다. 이들의 실패는 월슨의 일관된 장소설정의 궁극적인 이유가 된다. 즉 자기실현이 가능한 유일한 환경에서 실패케 함으로써 작가는 자연스럽게 그 실패의 원인을 천착하면서 새로운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것이다. 실패한 세 주인공들은 모두 스스로를 백인과의 관계 속에서 상대적으로 인식한 채 또 다시 백인과의 관련 속에서 자기실현을 추구하다가 좌절당한다. 루미스가 자기발견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죠 터너라는 백인에 대 한 치욕의 기억을 떨쳐버리고 아프리카 선조듭과의 연대 속에서 새로운 정체성을 찾았기 때문이다 결국 북부의 산업도시는 월슨이 'Africanness'라 는 메시지를 전도하기 위해 선택한 필연적인 극적 장소라고 하겠다.<레슨>의 경우, 한 흑인 가문의 불행한 노예사가 새겨진 피아노를 팔아 백인으로부터 토지를 사려는 보이 윌리와 그것을 막으려는 누이 버니스와의 갈등이 중심행동이다, 버니스는 남편 크롤리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물어 동생 보이 윌리를 후려친다. 이후부터 극의 행동들은 급속도로 결말을 향해 치닫는다. 이른 공격점- 완만한 행동전개- 행동폭발- 결말로 이어지는 구성의 리듬을 극 전체적인 관점에서 조망해 보면, 행동의 방향과 주인공의 초목표가 확립된 이후의 1막의 완만한 진행은 2막에서 폭발하는 행동의 극적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의도적인 지연기법임을 알 수 있다.

 

 

 

윌슨의 작품들 중 대공항기를 배경으로 한<피아노 레슨>은 1930년대 미국 흑인들의 경제적인 어려움에 따른 고통스러운 삶과 정신적 혼란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특히 이 작품은 보편적인 극적 주제를 설정하여 흑인들뿐만 아니라 백인들로부터도 열렬한 호응을 받아 윌슨의 대표적인 성공작으로 꼽히고 있다. 비평가들은 흑인 언어에 대한 리듬과 억양은 물론 등장인물들의 방언과 구어 능력을 완벽하게 포착해 내는 작가의 극적 능력에 찬사를 아끼지 않고 있다. 리치(Rich)는 이 작품이 흑인들의 과거 역사에 대한 인식 과정을 인종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문제로 확장시켰다고 극찬하고 있다.
극은 이른 새벽녘 보이 윌리(Boy Willie)가 친구 라이먼(Lymon)과 함께 피츠버그 교외에 위치한 작은 아버지 도커(Doaker)의 집을 방문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오랜만에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남매간에 대화는 처음부터 냉소적이며 상대방을 자극하는 내용으로 이어지며 두 사람 사이에 갈등을 암시한다. 두 사람의 갑작스러운 출현에 대해 작은 아버지 도커와 함께 생활하고 있는 보이 윌리의 누나 버니스(Berniece)는 경계심을 갖는다. 그녀가 두 사람에게 북부에 온 이유를 캐물으며 언제 돌아갈 것인지를 다그쳐 묻자 보이 윌리는 싣고 온 수박만 팔면 남부로 되돌아갈 것이라고 응답한다. 버니스의 질문에 궁색한 답변을 하던 보이 윌리는 라이먼이 구석에 놓여있는 피아노에 관심을 보이자 자신이 북부에 온 본 피아노를 놓고 서로 다른 삶에서 비롯된 남매간의 갈등은 버니스가 목격했다고 주장하는 서터의 유령과 보이 윌리가 끌어 들인 옐로우 독의 혼령 문제로 인해 한층 더 복잡한 국면으로 접어든다. 단순히 남매의 감정에서 촉발된 극의 갈등은 이제 미국 흑인과 백인의 전체 역사 문제로 확장되어 간다. 실질적으로 옐로우 독의 혼령과 셔터의 유령은 흑인과 백인을 대리한 상징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다. 먼저 서터의 유령은 노예제도 하에서 육체적, 정신적으로 흑인들을 지배하던 남부 백인들의 상징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서터의 유령은 여전히 과거의 고통스러운 기억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미국 흑인들의 현실적인 굴레로 그들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극복해야 할 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옐로우 독의 유령은 백인들에게 굴복하지 않는 흑인 정신의 표상이라고 할 수 있다. 버니스의 남동생인 보이 윌리는 그 피아노를 팔아 남부에서 농지를 구입하여 소작농에서 벗어나 자작농이 되기 위해 북부에 온 것이다. 반면에 버니스는 피아노를 조상들의 땀과 피가 배어 있는 유산으로 여기고 금기시하며 절대로 팔 수 없는 물건으로 여긴다. 이처럼 조상의 유산인 피아노에 대해 각기 상반된 남매의 가치관이 이 극을 이끌어나가는 중요한 갈등 요인이 되고 있다. 피아노를 팔아 농지 구입 자금을 마련하려는 보이 윌리의 의도에 대해 남매의 작은 아버지인 도커는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버니스가 절대로 피아노를 팔지 않을 거라고 단언하고 나선다. 도커는 예전에 남매의 아버지인 형 보이 찰스(Boy Charles)와 함께 서터(Sutter)의 집에서 피아노를 빼내왔고 문제의 피아노를 자신의 집안에 보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피아노에 대한 조카 버니스의 집착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피아노를 보존하려는 버니스의 편을 들어 보이 윌리를 설득하려고 한다. 피아노에 대해 두 사람이 아래층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이층에서 버니스의 다급한 비명 소리가 들린다. 두 사람이 급히 이층으로 올라갔을 때, 그녀는 서터의 유령을 목격했다고 말하며 푸른 양복을 입은 채 양손으로 머리를 받치고 있는 서터의 모습을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또한 그녀는 서터가 보이 윌리의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봐서 그가 서터를 우물에 빠뜨려 살해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보이 윌리는 서터의 유령 소동을 그녀가 억지로 꾸며낸 이야기라고 일축하면서 서터를 죽인 것은 옐로우 독의 혼령들이라고 주장한다. 라이먼 역시 남부 흑인들은 서터를 죽인 것이 옐로우 독의 혼령이라고 믿고 있다며 보이 윌리를 옹호하고 나선다. 라이먼의 설명처럼 이 시기에 남부에서는 많은 백인 농장주들이 의문스러운 죽임을 당했다. 백인 농장주들은 대공황으로 인해 연방정부로부터 은행에 예금해 둔 돈과 재산을 몰수당하자 경제적인 어려움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하는 사례가 빈번하였다. 또한 이러한 어려움 때문에 그들은 흑인들을 더욱 가혹하게 억압하고 착취하다가 이를 견디다 못한 흑인들에게 살해당하기도 하였다(Edwards 21). 이처럼 윌슨은 대공황이 흑인들은 물론 백인들의 삶에도 큰 변화를 초래했으며 흑인과 백인들 사이에 더욱 복잡한 갈등을 불러일으켰다는 점을 역사적 사실로 밝히고 있다. 집안의 유령 소동을 버니스가 꾸며낸 자작극이라고 비난하는 보이 윌리의 주장에 대해, 버니스는 집안에 유령이 출현하는 것은 물론 그녀의 남편 크롤리(Crawley)가 죽은 것을 보이 윌리의 탓으로 돌린다. 더 나아가 그녀는 흑인 가정이 겪는 모든 불행이 가정에 대한 책임의식이 결여된 흑인 남성들 때문이라고 비난함으로써 남매간에 갈등은 점점 더 증폭되어 간다. 흑인 남성들에 대한 버니스의 이러한 비난은 이 시기에 경제적인 어려움을 견디지 못하고 자신의 호구지책을 마련하기 위해 일자리를 찾아 가족을 버리고 혼자 떠나버린 많은 흑인 남성들에 대한 항변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남성들 중에는 블루스 가수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는데 모든 이주 흑인들과 마찬가지로 그들 역시 목적지는 북부 산업도시였다. 1910년대 중반 본격적으로 일기 시작한 남부 흑인들의 북부 이주는 대공황으로 인해 1930년대에 들어와 그 숫자가 크게 감소한다. 특히 이 시기에는 북부로 이주했던 남부 흑인들이 남부로 재귀향하는 숫자가 늘어나기 시작하였다.4䍠̰윌 1930년대의 미국 흑인과 관련된 이러한 사회적 특징을 작품 속에서 등장인물들을 통해 구체적으로 나타내 보이고 있다. 흑인 남성들의 이러한 방황은 나머지 가족들에 대한 부양의 책임을 고스란히 여성들에게 전가시켰다. 대공황 이전에 대부분의 흑인 근로 여성들은 주로 백인 중산층의 가정부나 유모로 고용되었다. 그들은 남성들보다 상대적으로 안정된 수입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실직한 가장을 대신하여 가족을 부양하였다. 그러나 이들 역시 흑인 남성들처럼 대공황기에 중부 지방에서 이주해 온 백인 여성들에게 일자리를 빼앗기고 거리로 내몰리었다. 남편 없이 혼자 생활하는 버니스의 삶은 이 시기 힘든 흑인 여성들의 삶을 대변하고 있다. 와이닝 보이의 이야기에는 그 당시 남부에서 흑인들에게 적용되던 현실적인 법의 성격이 잘 나타나 있다. 미국 흑인들은 노예해방 이후에도 또 다른 굴레인 흑인 규제법(Black Codes)에 의해 여전히 자신들의 자유와 인권을 유린당했던 것이다.7 특히 이 시기에 부당한 법의 시행 자체도 문제이지만 법에 대한 백인들의 자의적인 해석이 더 큰 폐단이었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도커와 와이닝 보이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보이 윌리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땅만 소유하면 백인들과 동등해 질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이에 도커는 피아노에 얽힌 찰스(Charles) 집안의 비극적인 가족사를 통해 다시 한 번 보이 윌리를 설득하고 나선다. 도커의 이야기는 할아버지 파파 보이 윌리가 백인 농장주 서터의 노예로 살았던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파파 보이 윌리는 노예였지만 목수로서 뛰어난 조각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그는 노예로서는 드물게 주인에게 특별 대접을 받으며 마마 버니스(Mama Berniece)와 결혼하여 단란한 가정을 이루었다. 그러던 어느 날 농장 주인인 로버트 서터(Robert Sutter)가 자신의 아내 오필리아(Ophelia)에게 결혼 기념 선물을 주기 위해 노예와 놀랜더(Nolander)라는 백인이 소유하고 있던 피아노를 교환하기로 한 것이다. 보이 윌리와 버니스의 증조모인 마마 버니스와 당시 9살이었던 그녀의 아들 파파 보이 월터(Papa Boy Walter)는 피아노와 교환되어 가족과 헤어지게 된다. 세월이 흘러 오필리아는 피아노에 싫증을 느끼고 자신의 몸종이었던 모자(母子)를 그리워하며 급기야 병이 들어 자리에 눕게 된다. 아내의 요청에 따라 서터는 놀랜더씨에게 모자와 피아노를 다시 맞바꾸자고 제안하지만 거절당한다. 오히려 놀랜더씨는 모자(母子)가 너무 슬퍼하는 것을 보고 서터에게 그들의 남편과 아버지인 파파 보이스를 자신에게 팔라고 제안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다. 서터가 놀랜더의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해 버림으로써 재회를 바라는 챨스 가족의 꿈은 영원히 물거품이 되어 버린 것이다. 농지 매입에 대한 보이 윌리의 집착은 아버지처럼 흑인 소작인으로서 한계를 벗어나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려는 처절한 몸부림인 것이다. 또한 찰스 집안의 노예 역사는 모든 미국 흑인이 경험해야 했던 노예역사의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따라서 보이 윌리가 서터의 땅을 사서 자작농이 되는 것은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서 미국 흑인들이 자신들을 노예로 지배했던 백인들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쟁취하려는 상징적인 의미가 담겨져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단지 우리는 이 과정에서 과거역사를 올바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이 윌리의 결점으로 지적할 수 있다. 그러나 버니스는 보이 윌리와 달리 피아노를 절대로 팔 수 없는 신성한 물건으로 여긴다. 그녀는 피아노를 자신이 짊어져야 할 십자가로 받아들이고 있다. 과거 그녀의 삶은 폭력과 죽음의 그림자로 점철되어 있다. 아버지는 피아노를 찾아오다 불에 타 죽었고, 남편은 보이 윌리와 함께 목재를 훔치다가 보안관에게 살해되었다. 남편 없이 홀로 딸을 키우며 힘겹게 살아가는 그녀에게 피아노는 조상들의 고단한 삶과 관련된 고뇌를 되살아나게 하는 과거 유물일 뿐이다. 그녀는 아버지의 부재로 인해 고통스러웠던 어머니의 삶에 대해 피 맺힌 절규를 쏟아낸다. 우리는 버니스의 항변을 통해 그녀가 피아노를 팔지 않고 보존하려는 의도가 선조들의 유지를 받드는 것 보다는 오히려 어린 시절 그녀가 목격했던 어머니의 희생과 한 맺힌 삶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녀가 피아노를 연주한 것은 오로지 어머니를 위해서였다. 어린 시절 그녀는 남편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려는 어머니를 위해 피아노를 연주하곤 했다 그러나 어머니가 죽고 난 이후 그녀는 피아노가 남편 없이 청상으로 살다간 어머니의 혼령을 깨어나게 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피아노에서 손을 뗐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그녀의 행동은 그녀가 떨쳐버리려고 노력하는 과거의 고통스런 기억 속에 그녀를 가두어 버린다. 따라서 그녀 역시 피아노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는 과거로 더 깊은 여행을 떠나야 한다. 피아노에 대한 남매의 이러한 시각차에 대해 나델(Nadel)은 “버니스는 역사로부터 회피하고 싶어 하고, 보이 윌리는 그것을 제거하기를 원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버니스의 호소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보이 윌리는 백인 악기 상을 만나 피아노를 팔기로 흥정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와 또 다시 피아노를 꺼내려고 한다. 그가 라이먼과 함께 집안에서 피아노를 들어내려는 순간 버니스가 총을 꺼내 들고 두 사람을 가로 막으면서 남매의 갈등은 일촉즉발의 위기로 치닫는다. 갈등과 혼란스러움이 극에 달해 있는 순간 집안에 모여 있던 사람들 모두가 서터의 유령 소리를 듣는다. 에이버리는 성경을 암송하고 성수를 뿌리는 구마(驅魔)의식을 거행한다. 보이 윌리는 난로 위의 주전자 물을 뿌리며 에이버리가 집전하는 기독교 의식을 조롱한다. 이어 그는 서터의 이름을 부르며 이층 계단으로 올라가다 보이지 않는 강한 힘에 의해 뒤로 밀려난다. 에이버리가 주문을 외우고 있는 동안 보이 윌리는 서터의 유령과 처절한 싸움을 벌인다. 그는 강력한 힘에 의해 뒤로 나자빠지면서도 계속 서터의 유령과 맞선다. 유령의 광포한 힘에 놀란 에이버리는 더 이상 주문을 외우지 못하고 기독교 의식의 집전을 포기하고 만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윌슨은 유령 ?아내기에 실패한 에이버리의 나약함을 통해 윌슨은 미국 흑인에 대한 기독교 역할의 한계를 지적하고 있다. 오히려 그는 버니스가 과거 흑인에 대한 올바른 인식에 도달하는 과정을 통해 미국 흑인에 대한 구원이 아프리카의 과거 역사 속에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레슨〉에는 모두 다섯 곡의 노래들이 거의 생략 없이 사용되고 있으며 전부 흑인들이 미국생활에서 겪는 애환을 다루고 있다 첫 번째 노래는 1 막 2장에서 보이 윌리, 라이먼, 도커, 위닝 보이 둥의 합창곡인데, 농부가 대표하는 남부로부터 철도원이 대표하는 북부 산업도시에로의 이주라는 큰 맥락을 빌려서, 힘든 농사일을 싫어하는 라이먼이 여자와 기회를 찾아 피츠버그로 북행해온 사실에 촌평을 가한다. 두 번째 위닝 보이의 노래(1 막 2장)는 작품의 주제와 직결된다. 피아노를 팔아 백인과 동등한 농장주가 되는 것이 피아노 때문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뜻을 받드는 것이라고 보이 윌리가 우기자 그의 삼촌인 위닝 보이는 피아노를 치면서 이 자서전적인 노래를 부르는데, 그 주제는 백인들의 학대로 불행한 삶을 강요받는 미국 흑인들의 삶이어서, 보이 윌리의 계획에 반대하는 그의 입장을 대변 해준다. 극중에는 네 번째로 위닝 보이가 부르는 클레오싸 추모곡(2막 5장)도 사실은 피아노를 밖으로 내가려는 보이 윌리를 만유하기 위한 것임을 감안하면 위닝 보이가 부르는 두 노래의 의미와 기능은 자명해진다. 세 번째로 도커가 부르는 노동가(2막 1장)는 일찍이 마 레이니가 의미했던 바 힘겹고 외로운 삶에 위로가 되어주는 기능을 수행하면서 일 나가는 도커의 마음을 준비시켜준다.
이 극의 마지막 장면에서 버니스가 부르는 다섯 번째 노래는 일종의 초혼곡이다 서터의 유령을 쫓아내기 위해 버니스는 죽은 조상들의 혼을 부른다. 이 초혼 곡은 신통력을 발휘해서 애버리 목사의 축복이나 보이 월리의 완력으로도 물리칠 수 없었던 서터의 유령을 쉽게 몰아낸다. 이 노래는 앞의 노래들처럼 극의 행동을 지연시키지 않고 오히려 갈등을 해소하는 기능을 수행하면서 현실주의자인 보이 윌리에게 피아노가 상징하는 아프리카의 유산을 보존하는 것이 얼마나 귀중한 일인지를 깨우쳐 준다. "어이 누나…만일 누나하고 마레타가 저 피아노를 계속 치지 않는다면…명심해 둬…나하고 서터가 다시 나타날 거야.”
노래는 궁극적으로 아프리카라는 뿌리에서 정체를 찾게 해주기 위한 고안이다. 월슨은 두 가지 목적을 위해서 노래를 사용한다. 첫째, 흑인들 의 미국적 체험을 반영하기 위함이다 둘째. 그 체험을 수용하는 패턴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월슨은 바로 이 패턴을 'Africanness'의 중요한 속성으로 이해한다. 많은 노래들이 극의 행동을 지연시키고는 있지만, 또 한편으로 윌슨의 목적들을 충실히 만족시키면서 등장인물들의 정서를 고양시켜 준다. 따라서 노래로 인한 행동지체는 오히려 극적 효과를 높이는 강력한 구성기법이 된다. 이 이야기들 속에는 기독교에 대한 회의가 짙게 깔려 있다.

 

 

월슨은 참으로 다양한 종류의 이야기들을 극에 삽입한다. 로이드 리처드(Lloyd Richards}가 간파한대로 이 이야기들이 등장인물로 하여금 그날그날의 문제들을 직시할 수 있게 해주는 기능을 갖고 있다면”) 미국적 체험이 안겨준 개인적, 인종적 열등감과 피해의식을 배설함으로써 백인으로부터 해방된 진정한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하는 그들에게 이야기의 구술은 그 자체로 필요충분한 정당성을 갖는다.
미국 연극의 두드러진 현상으로 자리매김 되는 어거스트 월슨의 희곡들은 본질적으로 정치사회극이다 비록 그는 눈에 띠는 교훈주의는 피하고 있지만, 편견 심한 백인지배의 사회에서 흑인 들이 겪는 미국적 체험 가운데 “사회학적인 전형들을 풍부한 비유로 예리 하게 점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월슨의 극작가적인 역량은 그러한 현실참여적인 메시지의 참신함이나 강렬함에 있지 않다. 왜냐하면 그의 메시지는 60년대의 분리주의 와 70년대의 온건주의의 실패에 대한 당연한 반동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 문이다. 그의 재능은 오히려 'Africanness'의 발견과 회복을 최고 가치로 삼는 그의 문화민족주의에 걸맞게 자칫 진부에 빠지기 쉬운 전형적인 소재 들을 아프리카적인 구성과 양식으로 새롭게 탄생시키는 특유의 극작술에 서 더 확연하게 드러난다. 필자가 주제보다 구성을 통해 월슨을 접근해 본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