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품해설
'사랑의 발명'은 영국의 고전 학자이자 시인인 하우스만의 생애에 기초를 둔 톰 스토파드의 최근 작품으로서 대단히 문학적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이 극은 꿈같은 환상의 세계에서 행동이 진전된다. 늙은 하우스만과 함께 스틱스 강가에서 출발하여 하나의 꿈으로 시작되면서, 극은 시간과 공간, 지상계와 지하 계, 리얼리티와 희랍 신화 및 등장인물 /관객 /화자 등 경계 넘나들기 기법에 의해 시간이 역순환하며, 공간이 자유자재로 이동한다.
우리는 이 극에서 젊은 시절의 하우스만과, 방금 죽었거나, 죽음을 준비하고 있는, 죽어가는 것을 꿈꾸고 있는 77세의 늙은 하우스만을 만날 수 있다. 또한 친구들인 폴라드와 잭슨, 월터 페이터, 존 러스킨, 마크 패티슨, 포스트게이트, 벤자민 조웨트 같은 옥스퍼드 출신의 명사들, 오스카 와일드 뿐 아니라 헨리 라보쉐, 스테드, 프랑크 해리스, 제롬 케이 제롬 같은 당대의 문인들도 우리는 만나게 된다.
삶의 최후의 밤에 하우스만은 자기가 죽는 꿈을 꾸는데, 그 꿈은 맨 처음 스틱스 강둑으로 그를 인도한다. 신화 속의 사공인 케론이 하우스만을 지하계로 싣고 가기 위해 도착하자, 꿈의 여행이 시작된다. 이 여행에서 늙은 하우스만은 옥스퍼드에 입학허가를 받은 지 얼마 안 되는 한 젊은이로서의 지난 시절의 자기 자신인 젊은 하우스만을 만나게 되며 동시에 그 시절 자신의 아릿한 사랑의 회한과 통증을 추회한다.
세 가지의 다소 관련 있어 보이는 배 여행 이미지와 함께, 옥스퍼드대학에서의 노 젓기에 대한 특별한 언급, 하우스만과 그의 동료들의 중간고사에 대한 언급, 초등교육 시스템 등에 대한 촌평 등도 이 극에서 접할 수 있다. 체르빌에서의 옥스퍼드 학부생 노젓기, 영혼들을 최종 목적지까지 실어 나르는 지하계의 뱃사공 케론과의 조우, 오스카 와일드가 투옥되던 곳인 레딩골을 지나가며 저널리스트 겸 소설가인 제롬 케이 제롬과 그 친구들이 보여주는 노 젓기는 다소 관련 있어 보이는 상징들로 나타난다. 그 외에도 옥스퍼드 교수들과 런던의 인기 있는 출판사 스타들 간의 관련 있는 논쟁들이 반복적으로 나온다. 특별히, 제이 케이 제롬의 유머 소설인 r배위의 세 남자」는 이 극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스토파드는 이 극에서 그 당시 옥스퍼드대학의 다양한 학파 간 사상논쟁들을 재현해 보인다. 이를 테면, 고딕에 대한 러스킨의 존중, 르네상스에 대한 월터 페이터의 감탄, 고전교육에 대한 벤자민 조웨트의 강조, 모세 잭슨에 대한 하우스만의 감히 형언하기 어려운 사랑의 감정 등이 그것이다. 늙은 하우스만과 젊은 하우스만의 만남으로 절정에 이르는 제 1막에서 우리는 고전 교육의 목적, 원문 비평의 가치, 시의 위력 등에 관한 토론 을 접하게 된다. 제 2막에서는 특허청 상품등록 신청서들을 검토하는 하우스 만과, 전기 계량 점검원인 모세 잭슨, 형법 수정안 통과에 모종의 영향력을 행사하는 옥스퍼드의 파워브로커들과, 런던의 저널리스트인 핸리 라보쉐, 스테드, 프랭크 해리스 등이 등장한다. 여기서 형법 수정안이란 오스카 와일드가 동성애자란 이유로 유죄판결을 받아서 1896년 징역 2년의 형을 받은 그 법안을 말한다.
이후, 젊은 하우스만은 극에서 희미해져가고 '슈롭셔젊은이'를 써서 그 당시 가장 중요한 고전학자가 된 늙은 하우스만 에게만 집중적으로 초점이 모아진다. 이 극의 종반에 접어들면 늙은 하우스만이 오스카 와일드를 만나게 되는데 이 두 사람들은 공히 동성애자이자, 옥스퍼드 대학에서 고전교육을 받은 빅토리아 시대 시인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이 부분에서 와일드와 하우스만은 각각 상대방의 삶의 방식을 비교한다. 와일드는 알프레드 더글라스 경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추구하며 자기 개인적 삶은 포기하기로 결정하여, 그만 곤경에 빠지게 되고 급기야 해직 당한다. 그와 반대로, 하우스만은 자신의 사랑에 대한 추구 대신에, 존경받는 시인이자 학자로서의, 캠브리지 대학교수직을 선택한다.
하우스만의 모세 잭슨에 대한 동성애적인 대답 없는 사랑, 학문 정신에 대한 보다 더 충만 된 하우스만의 정열, "슈롭셔 젊은이"를 쓴 염세주의적 시인이자 동시에 라틴 교재에 대한 광적인 꾀 까다로운 편집자로서의 하우스만의 양면성 등에 대한 연극적 재현이 이 극의 중심 내용이다. 우리는 스토파드의 위트, 박식, 천부적 재담, 연극적 재능, 교묘하게 얽혀진 그물 속에서 각각 별개의 요소들을 뒤섞는 재능으로 지적 토론을 해내는 능력, 나아가 관객을 현혹시켜 눈멀게 하는 번갯불 같은 광채들을 발견할 수 있다. 하데스나 엘리시움에서의 내세에 대한 농담, 동성애의 문제 등은 물론이거니와, 자신의 성적 본능을 억누르는 하우스만 같은 사람과, 악명 높게도 그 동성애에 탐닉한 오스카 와일드 같은 사람과의 차이점과, 그 두 사람 모두 결국엔 슬픔에 도달하기는 매한가지인 데, 어느 것이 보다 더 큰 슬픔이냐, 아니면 더 나은 슬픔이냐는 것이 핵심 논쟁거리가 된다.

전반적으로, 탐 스토파드는 흥미롭게도 늙은 하우스만의 스스로 억제된 삶에 대한 비판을 위한 대변자로서 와일드를 이용하면서 하우스만의 애처로운 동성애적 사랑 이야기를 '발명' 하여 작품으로 형상화시키고 있다. 극중 와일드는 늙은 하우스만의 고상하고 안정된 표면적 삶을 의도적 기만과 텅 빈 허접 쓰레기라고 조롱한다. 1998년 어느 인터뷰에서 스토파드는 이 대조적인 두 사람의 삶을 가리켜 ‘ 하우스만은 지적으로는 아니지만 정서적으로는 적어도 실패한 삶을 산 사람이었다. 비록 와일드가 불길에 휩싸여 추락하며. 수치스럽고 애처롭고 부적응적인 가난에 찌든 비참한 모습으로 생을 끝내긴 했지만 오히려 와일드가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라고 평가했다. 이것은 하우스만의 정서적 삶에 대한 비판이며, 자기 자신에 대한 정직성의 문제에 바탕을 둔 작가 스토파드의 인생관을 엿볼 수 있게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시종 침묵으로 일관된' 하우스만의 삶에 대한 와일드의 비판은 늙은 하우스만의 삶의 궁극적 비극성에 대한 함축적 의미 속에 간결하게 나타난다. 친구들을 배신하는 것은 사랑에 관한 문제에서는 사소한 것이지만, 자기 자신을 배반하는 것은 평생 두고 후회하는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와일드는 하우스만이 마음속 깊이 간직한 동성애적 정열에 스스로 진실하지 못하기 때문에 '아주 수치스럽고 겁쟁이고 순종적'이라고 25년간의 라틴어 교수로서의 하우스만의 공식적인 고상한 삶을 훼손시킨다. 여기서 아이러닉하게도 와일드는 자기 스스로를 사랑의 그 '발명된' 속성에의 신봉자라고 묘사한다.
늙은 하우스만과 와일드는 이 극에서 비록 사랑과 인생에 대한 그들의 방법은 서로 상반된 경향으로 지배되긴 하지만, 발명이 라는 이름의 공통분모를 공유하고 있다. 하우스만의 고전학문에 대한 헌신은 자기 친구에 대한 평생에 걸친 사랑에 의해서 역설적으로 고양된 것이다. 비록 '진리의 열정이 모든 인간적 열정 중에서 가장 미약한 것' 이라는 걸 알면서도, 젊은 하우스만은 '고전 원본의 회복이야말로 그 무엇보다도 가장 최우선적 임무' 라고 확고하게 믿기까지 한다. 이 진술의 아이러니는 그 자신도 궁극적으로 자신의 정서적 진실을 억누르는 하나의 기만적 생을 살 것이기 때문에 그 자신이 예외가 아니라는 점이다. 늙은 하우스만은 당대 빅토리아 사회의 두 가지 상반적인 성향을 지닌 모순적 존재이지 않을 수가 없다. 고대 원본의 정확한 판본을 회복하려는 그의 시도는 세상의 주요흐름에 거스르는 기능을 하고 있음을 우리는 여기서 짐작할 수 있다. 우리가 무시할 수 없는 것은 자신의 사랑을 잭슨이 거절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잭슨을 향한 늙은 하우스만의 변함없이 평생에 걸친 고정된 응시는 고전 원본의 '신뢰할 만한' 판본을 고집하는 그의 성벽과도 관련이 있다는 점이다. 사실, 정확한 판본을 찾으려는 늙은 하우스만의 성벽은 우리가 '삶의 의미에 대한 분실된 육필 원고 본, 우리가 그것을 무의미하게 만들어 버린 개악들로부터 되찾을지도 모를 그런 육필 원고 본을 갖지 못한다'는 자신의 인생에 대한 철학적인 고찰로부터 또한 이해되어 질 수도 있다. 따라서 늙은 하우스만에 관한한 타인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가 잭슨에 대해 품었던 사랑의 권위적인 판본에 대한 하나의 '개악된 교정본' 일 따름이다.

동성애에 대한 빅토리아 사회의 불관용적인 태도 앞에서 늙은 하우스만이 부분적으로 고대의 애정시를 통해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자신의 동성애를 고대의 그리스와 로마 사회에서처럼 정의하려는 것이다. 사랑의 정의가 고대 고전작가들의 육필원고처럼 오히려 개악되었다고 확고하게 그는 믿고 있다. 아이러닉하게도 늙은 하우스만이 와일드의 삶을 '연대기적 실수' 라고 비난할 때 고대 그리스인들과 로마인들이 했던 것처럼 자신의 동성애를 당대의 빅토리아 사회가 받아들여주기를 그 자신도 원하기 때문에 그와 같은 연대기적 실수로 자신의 삶도 또한 얼룩져 왔다는 것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다. 자신의 학문 세계를 넘어서는 그 영향력을 발휘할 수가 없는 그의 투쟁적인 학문에의 정진은 단지 빅토리아시대의 '요란한 바다를 배경으로 하는 하나의 모래 성'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결국 그의 동성애에 대한 정확한 정의 (인식)에의 추구는(이것은 타자의 인정, 즉 사회의 인정을 그가 추구하는 것임을 나타낸다.) 불가피하게 와일드의 의식적이고 의도적인 연극과 달리, 사랑의 발명이라는 그 자신의 무의식적 연극인 것으로 판명된다.
오스카가 자신의 성(sexuality)을 페이터의 미학 운동의 열렬한 복음을 자기만의 현란한 방법으로 문학화 함으로써 문학적 찬양을 하는 것과 똑같이, 그렇게 하우스만은 시와 고전 학문 속에 그것을 고양시킴으로써 모세 잭슨을 향한 자신의 커다란 초대받지 못한 열정을 이상화시켰다. 자신만의 방법으로 제각각 '사랑'을 발견했던 것이다. 와일드의 공개 선전 포고된 동성애와 제멋대로인 우상타파 적 인생관은 당대 사회의 기대치에 부합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이른 바 '신사' 에 대한 사회적 악몽으로 작용한다. 그와는 반대로 하우스만은 비교적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인물로서의 삶을 이끌어 간다. 그러나 늙은 하우스만이 그 자신을 하나의 라틴교수로 동일시할 때는 또한 욕망의 원인과 효과로 기능하기도 한다. 늙은 하우스만의 경우, 존경받을 수 있는 라틴교수가 된다는 것은 자신의 개인적 정서적 삶을 사회적으로 성공적으로 억압 하는 것을 의미한다. 주지하다시피, 옥스퍼드 시절 장래가 촉망되는 고전학도였던 하우스만은 제때에 대학 졸업을 하지 못하고 런던 특허청 사무실 공무원을 역임했다. 런던에서 옥스퍼드 대학 친구인 모세 잭슨에게 그 당시엔 금기시 여겨졌던 동성애적 사랑을 느꼈지만 잭슨에게서 거절당했다. 그 후 하우스만은 런던 칼리지의 라틴어 교수가 되었고, 동성애자란 이유로 여론의 지탄을 받던 오스카 와일드가 재판받던 중에, 그의 최초 시집인 "슈롭셔 젊은이"를 출판했으며, 그 다음엔 캠브리지 대학에서 라틴어 과의 벤자민 홀 케네디 교수가 되어 프로퍼티우스와 마닐리우스의 작품들을 번역했다.
재판과 투옥 그리고 망명으로 점철된 와일드의 극적인 요소가 넘치는 짧은 삶은 후배 작가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소재가 되었지만, 침묵과 명예로 일관된 하우스만의 삶은 이와는 대조적으로 세인의 눈길조차 끌지 못하는 평범한 삶으로 알려져 왔다. 톰 스토파드는 이러한 표면적 일상 속에 감춰진 하우스만의 치열한 내적 격정의 기록인 일기 속에서 '두 인격의 사나이’ 로서 살아야 했던 하우스만의 생애에서 극적인 요소를 발견하고 이 극에서 그의 삶을 재구성하여 발명해내고 있는 것이다.
하우스만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거의 모든 영국병사들의 품안에 간직되어 애송되던 1권의 염세적 시인 "슈롭셔 젊은이"란 시도 썼다. 이 시는 농사일을 해야 하는 환경 속에서 짧은 생애의 비극을 연출하고 있는 불운한 젊은이들에 관한 이야기로서, 자연은 아름답지만 무심한 것이며, 우리가 그것을 계속 즐기는 동안만 즐길 수 있는 것이고, 사랑, 우정, 환락은 지속될 수 없고 배신이나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당연하지만, 역시 마찬가지고 시간이 있는 동안은 즐겨야 한다는 것이다. 이 시의 뒤틀린 역설 적 어조는 때로 멜로드라마로 떨어지기도 하고, 그 극기주의는 이따금 신파조로 보이기도 하지만, 하우스만이 구사하는 운율은 그것이 최고의 경지에 이를 때 차분하고 신랄하게 달관한 지혜의 토운을 울리기도 한다. 하나의 가상된 인물을 통하여 정서를 투영시킴으로써 자기연민을 피하고 있으며, 그 결과 일인칭으로 된 시조 차도 거리를 두고 있는 듯이 보이게 된다. 이 시는 이 극의 주인공인 하우스만의 자멸적인 정서적 감금에 가까운 그의 세계관과 애정관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대표작이다.

이 극의 형식적 구조는 주로 늙은 하우스만에게 주로 집중된다. 늙은 하우스만은 77세로 이블린 널싱 홈에서 '사라져 가버린 과거와 사라져가고 있는 현재' 사이에 걸쳐있는 삶에 갇혀 있다. 하데스의 스틱스에서 케론을 만나면서, 그는 자신의 '좋았던 지난 시절(good old days)을 찬미하며, 필름처럼 자기 앞에서 나타나는 자신의 고통스런 오랜 슬픔들을 재발견한다. 자기의 과거와 회상들의 뒤섞인 진열의 한 복판에서 그는 자신의 젊은 자아인 젊은 하우스만, 즉 18세에서 26세에 이르는 하우스만을 만난다. 하지만 그는 아이러닉하게도 첫눈에 자신의 젊은 자아를 알아보지 못한다. 늙은 하우스만이 옥스퍼드대학 학생이었을 때, 젊은 하우스만, 알프레드 폴라드, 모세 잭슨은 '3총사'들처럼 모여 다니곤 했다. 후회와 연민으로 가득 찬 동일한 말들의 반복 속에서 그의 과거와 회상들은 내밀하게 자기 친구 잭슨에 대한 늙은 하우스만의 대답 없는 평생에 걸친 사랑의 베일을 벗긴다. 동시에 '발명'이란 개념에 대한 유희를 통해 이 극은 독자/관객으로 하여금 극 자체 뿐 아니라, 늙은 하우스만의 삶과 그 자신의 복잡한 성격을 하나의 꿈결 같은 회상극과 자기 패러디 적 소설로 이해하게 만든다. 케론이 늙은 하우스만을 만나기 전에 '각각 별개의 두 사람' 으로, '시인 한 사람과 학자 한 사람' 을 예상했었다고 말하는 것은 늙은 하우스만의 모순적 삶에 대한 중요한 계시이다. 시인은 정서적 세계에서 살며 상상력으로 번창하는 반면에, 학자는 이성의 세계에서 살며 사실적인 것으로 번창한다는 일반적 가설에 케론의 기대가 의존하고 있음도 알 수 있다.
한 사람이 시인과 학자를 겸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젊은 하우스만이 묻자, 늙은 하우스만은 단호하게 "시적 감상은 학문 정신에 위험하다"고 선포하듯 말한다. 그렇지만 케론이 그 두 사람이 곧 한 사람인 늙은 하우스만이라는 걸 인식한 이후, 늙은 하우스만은 자기 자신을 하나의 분리된 주체로서 모순적 존재인 그 스스로를 복잡한 모순의 화신 이라고 폭로한다. 연극적 세계와 현실에서 하우스만의 삶의 아이러닉하고 모순적 양상을 시사 하는 대목이다. 하우스만은 학자로 서의 자신의 활약상은 일종의 과학자의 그것과 같다고 계속 주장한다. 고전 텍스트의 신뢰할 수 있는 각색 본들의 회복에 하나의 불변하는 논리를 제공하는 사람으로서 과학자를 뜻하고 있다. 이 단호함은 그의 사생활에 반영되는데 그는 한때 자신의 동료 남학생이던 모세 잭슨에 대한 평생에 걸친 사랑에 접근하기를 거부하기도 했다. 모든 그의 정서적 삶은 그의 시집인 "슈롭셔 젊은이" 속으로 들어가게 되고, 아이러닉하게도 그는 이제, 그의 학문 때문이 아니라, 그것 때문에 훨씬 더 기억되고 있다.
이 극은 다충 적 언어유회로 되어 있다. 표면적으로 그것은 기원전 사랑시를 발명했던 로마시인들을 언급하듯이 하우스만의 고전학문과 하우스만 자신의 대다수 운문의 실제 내용을 언급한다. 플라토가 사랑을 묘사할 수 있기 전에 사랑 받는 연인이 발명되어 져야 했다. 우리 사랑의 대상을 발명해 내는 것 외에도 사랑의 행위를 통해 우리 자신을 또한 발명하기도 하며 우리가 사랑하는 그런 수준의 사람이 '된다. (특히, 우리가 어떻게 사랑하느냐의 방법에 관한)고 작가는 암시한다.
이 극에서 '발명' 이라는 단어의 흥미 있는 양상은 그 단어가 '인쇄술의 발명' 이나 '사랑의 발명' 같은 추상적 개념이기도 하며 동시에 구체적 물질에도 사용된다는 점이다. '찾아내기' 라는 의미의 라틴어근의 사전적 정의에서 그것은 상상력의 발휘로 얻어지는 창조되어지는 행위나 사려, 즉 그릇된 진술로서의 위조된 그 무엇으로 정의된다. '발명'이라는 단어의 정의는 창조, 사기(기만), 연기하기(연구하기) 같은 것들을 망라하는 개념이다. 늙은 하우스만은 사랑을 와일드 같이 한 줌의 얼음 조각' 이라고 정의한다. 즉 사랑은 어린애들 손 안에 있는 얼음 같은 것이라고 소포클레스가 말했다고 전하는 와일드의 말처럼. 결국 사랑의 불결하고 차가운 속성을 늙은 하우스만이 인식하고 있는 것은 책슨을 향한 자신의 억압되고 고통스런 원치 않는 사랑을 생생하게 배반한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늙은 하우스만의 사랑의 발견이라는 개념을 정당화시켜주는 것도 또한 바로 와일드이다. 사랑의 발명이라는 관점에서 극중 와일드가 선포하는 것은 하나의 특별한 신기루로서 사랑은 기본적으로 기만이며, 절대적으로 타자 (또는 타자에의 인식)와는 불가분의 관계이라는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사랑받기를 소망하는 것으로서 상대방의 반응으로부터 완전하게 자유로울 수 없다. 모든 욕망, 욕망들 중에서도 심지어 가장 순수한 욕망조차도 타자에 의해 인정받고자하는 하나의 욕망이다. 늙은 하우스만의 잭슨에 대한 사랑은 거절당했기 때문에 잭슨에 의해서 '사랑받고자' 하던 그의 소망은 충족될 기회를 영원히 상실 당하게 되는데 이것은 궁극적으로 인간 실존의 '모든 급진적 열망' 에의 결핍을 낳게 된다.
실제로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늙은 하우스만이 잭슨에 대한 그의 사랑을 고백하기를 '거절'한다는 것이 아니라 잭슨이 늙은 하우스만의 사랑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는 것이다. 잭슨에 대 한 하우스만의 사랑이 갖고 있는 문제적 측면은 비록 잭슨이 결코 자신의 애정을 되돌려 주진 않을지라도 자기가 평생 동안 잭슨에 대한 사랑을 갈망한다는 것이다. 하우스만은 잭슨이 남성들 간의 애정관계를 '짐승 같은 짓' 이라고 여긴다는 것을 한번 언급했기 때문에, 동성애에 대한 잭슨의 태도를 충분히 하우스만은 알고 있는 게 확실하다. 따라서 늙은 하우스만은 자신의 사랑에 대한 잭슨의 거절과 동성애에 대한 사회의 엄격한 편견 때문에 '커밍아웃' 하는 것을 사실상 거부한다. 잭슨에 대한 평생에 걸친 자신의 열정이 금지되고 거절당한다는 이중의 제약 아래에 처해 있음을 지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상황 하에서 와일드가 경멸적으로 비판하는 이른바. '소심'과 '굴종’적인 늙은 하우스만의 태도는 우리가 비난하기보다는 오히려 동정할 수 있는 하나의 자연스런 반응일 수 있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스토파드가 '두 인격의 사나이'라고 정의한 하우스만의 복잡한 태도는 그의 사회적 존재의 모순적 성격에 대한 이해를 위하여 다각적 관점으로부터 조사해 볼 가치가 있다. 이 극에서 늙은 하우스만이 자신의 고전학문을 통해서 추구하고자 했던 것은 '고대 작가들이 실제로 썼던 것을 그대로 원상회복시키는 것' 이다. 폴라드와 잭슨과 함께 있는 자신의 젊은 날의 분신을 목격하면서 늙은 하우스만이 하데스의 케론 앞에서조차 자신의 충족되지 못한 사랑으로부터 나온 한탄을 표출할 때 부분적으로 포착될 수 있다. 극 전편을 통해서 늙은 하우스만은 절망적으로 거의 독백조로 세 번씩이나 그러한 대사를 외친다. 그 애처로운 절망은 그가 스틱스 강가에서 "텅 빈 해안가, 발아래 저리도 무심하게 부딪치는 바닷물과 함께 나 홀로 이렇게 서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라고 말하는 마지막 대사에서 냉소적으로 반향 되어 맴돈다. 빅토리아 시대의 라틴 교수인 늙은 하우스만에겐 잭슨에 대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환상으로 변형되고 포장되어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이 극에서 잭슨의 이미지에 대한 무대 지시문은 완전히 늙은 하우스만의 갈망과 회한을 한 캡슐로 포장한 것이다.
이 극의 형식적 구조는 주로 늙은 하우스만에게 주로 집중된다. 늙은 하우스만은 77세로 이블린 널싱 홈에서 '사라져 가버린 과거와 사라져가고 있는 현재' 사이에 걸쳐있는 삶에 갇혀 있다. 하데스의 스틱스에서 케론을 만나면서, 그는 자신의 '좋았던 지난 시절(good old days)을 찬미하며, 필름처럼 자기 앞에서 나타나는 자신의 고통스런 오랜 슬픔들을 재발견한다. 자기의 과거와 회상들의 뒤섞인 진열의 한 복판에서 그는 자신의 젊은 자아인 젊은 하우스만, 즉 18세에서 26세에 이르는 하우스만을 만난다. 하지만 그는 아이러닉하게도 첫눈에 자신의 젊은 자아를 알아보지 못한다. 늙은 하우스만이 옥스퍼드대학 학생이었을 때, 젊은 하우스만, 알프레드 폴라드, 모세 잭슨은 '3총사'들처럼 모여 다니곤 했다. 후회와 연민으로 가득 찬 동일한 말들의 반복 속에서 그의 과거와 회상들은 내밀하게 자기 친구 잭슨에 대한 늙은 하우스만의 대답 없는 평생에 걸친 사랑의 베일을 벗긴다. 동시에 '발명'이란 개념에 대한 유희를 통해 이 극은 독자/관객으로 하여금 극 자체 뿐 아니라, 늙은 하우스만의 삶과 그 자신의 복잡한 성격을 하나의 꿈결 같은 회상극과 자기 패러디 적 소설로 이해하게 만든다. 케론이 늙은 하우스만을 만나기 전에 '각각 별개의 두 사람' 으로, '시인 한 사람과 학자 한 사람' 을 예상했었다고 말하는 것은 늙은 하우스만의 모순적 삶에 대한 중요한 계시이다. 시인은 정서적 세계에서 살며 상상력으로 번창하는 반면에, 학자는 이성의 세계에서 살며 사실적인 것으로 번창한다는 일반적 가설에 케론의 기대가 의존하고 있음도 알 수 있다.
한 사람이 시인과 학자를 겸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젊은 하우스만이 묻자, 늙은 하우스만은 단호하게 "시적 감상은 학문 정신에 위험하다"고 선포하듯 말한다. 그렇지만 케론이 그 두 사람이 곧 한 사람인 늙은 하우스만이라는 걸 인식한 이후, 늙은 하우스만은 자기 자신을 하나의 분리된 주체로서 모순적 존재인 그 스스로를 복잡한 모순의 화신 이라고 폭로한다. 연극적 세계와 현실에서 하우스만의 삶의 아이러닉하고 모순적 양상을 시사 하는 대목이다. 하우스만은 학자로 서의 자신의 활약상은 일종의 과학자의 그것과 같다고 계속 주장한다. 고전 텍스트의 신뢰할 수 있는 각색 본들의 회복에 하나의 불변하는 논리를 제공하는 사람으로서 과학자를 뜻하고 있다. 이 단호함은 그의 사생활에 반영되는데 그는 한때 자신의 동료 남학생이던 모세 잭슨에 대한 평생에 걸친 사랑에 접근하기를 거부하기도 했다. 모든 그의 정서적 삶은 그의 시집인 "슈롭셔 젊은이" 속으로 들어가게 되고, 아이러닉하게도 그는 이제, 그의 학문 때문이 아니라, 그것 때문에 훨씬 더 기억되고 있다.
이 극은 다충 적 언어유회로 되어 있다. 표면적으로 그것은 기원전 사랑시를 발명했던 로마시인들을 언급하듯이 하우스만의 고전학문과 하우스만 자신의 대다수 운문의 실제 내용을 언급한다. 플라토가 사랑을 묘사할 수 있기 전에 사랑 받는 연인이 발명되어 져야 했다. 우리 사랑의 대상을 발명해 내는 것 외에도 사랑의 행위를 통해 우리 자신을 또한 발명하기도 하며 우리가 사랑하는 그런 수준의 사람이 '된다. (특히, 우리가 어떻게 사랑하느냐의 방법에 관한)고 작가는 암시한다.
이 극에서 '발명' 이라는 단어의 흥미 있는 양상은 그 단어가 '인쇄술의 발명' 이나 '사랑의 발명' 같은 추상적 개념이기도 하며 동시에 구체적 물질에도 사용된다는 점이다. '찾아내기' 라는 의미의 라틴어근의 사전적 정의에서 그것은 상상력의 발휘로 얻어지는 창조되어지는 행위나 사려, 즉 그릇된 진술로서의 위조된 그 무엇으로 정의된다. '발명'이라는 단어의 정의는 창조, 사기(기만), 연기하기(연구하기) 같은 것들을 망라하는 개념이다. 늙은 하우스만은 사랑을 와일드 같이 한 줌의 얼음 조각' 이라고 정의한다. 즉 사랑은 어린애들 손 안에 있는 얼음 같은 것이라고 소포클레스가 말했다고 전하는 와일드의 말처럼. 결국 사랑의 불결하고 차가운 속성을 늙은 하우스만이 인식하고 있는 것은 책슨을 향한 자신의 억압되고 고통스런 원치 않는 사랑을 생생하게 배반한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늙은 하우스만의 사랑의 발견이라는 개념을 정당화시켜주는 것도 또한 바로 와일드이다. 사랑의 발명이라는 관점에서 극중 와일드가 선포하는 것은 하나의 특별한 신기루로서 사랑은 기본적으로 기만이며, 절대적으로 타자 (또는 타자에의 인식)와는 불가분의 관계이라는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사랑받기를 소망하는 것으로서 상대방의 반응으로부터 완전하게 자유로울 수 없다. 모든 욕망, 욕망들 중에서도 심지어 가장 순수한 욕망조차도 타자에 의해 인정받고자하는 하나의 욕망이다. 늙은 하우스만의 잭슨에 대한 사랑은 거절당했기 때문에 잭슨에 의해서 '사랑받고자' 하던 그의 소망은 충족될 기회를 영원히 상실 당하게 되는데 이것은 궁극적으로 인간 실존의 '모든 급진적 열망' 에의 결핍을 낳게 된다.
실제로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늙은 하우스만이 잭슨에 대한 그의 사랑을 고백하기를 '거절'한다는 것이 아니라 잭슨이 늙은 하우스만의 사랑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는 것이다. 잭슨에 대 한 하우스만의 사랑이 갖고 있는 문제적 측면은 비록 잭슨이 결코 자신의 애정을 되돌려 주진 않을지라도 자기가 평생 동안 잭슨에 대한 사랑을 갈망한다는 것이다. 하우스만은 잭슨이 남성들 간의 애정관계를 '짐승 같은 짓' 이라고 여긴다는 것을 한번 언급했기 때문에, 동성애에 대한 잭슨의 태도를 충분히 하우스만은 알고 있는 게 확실하다. 따라서 늙은 하우스만은 자신의 사랑에 대한 잭슨의 거절과 동성애에 대한 사회의 엄격한 편견 때문에 '커밍아웃' 하는 것을 사실상 거부한다. 잭슨에 대한 평생에 걸친 자신의 열정이 금지되고 거절당한다는 이중의 제약 아래에 처해 있음을 지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상황 하에서 와일드가 경멸적으로 비판하는 이른바. '소심'과 '굴종’적인 늙은 하우스만의 태도는 우리가 비난하기보다는 오히려 동정할 수 있는 하나의 자연스런 반응일 수 있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스토파드가 '두 인격의 사나이'라고 정의한 하우스만의 복잡한 태도는 그의 사회적 존재의 모순적 성격에 대한 이해를 위하여 다각적 관점으로부터 조사해 볼 가치가 있다. 이 극에서 늙은 하우스만이 자신의 고전학문을 통해서 추구하고자 했던 것은 '고대 작가들이 실제로 썼던 것을 그대로 원상회복시키는 것' 이다. 폴라드와 잭슨과 함께 있는 자신의 젊은 날의 분신을 목격하면서 늙은 하우스만이 하데스의 케론 앞에서조차 자신의 충족되지 못한 사랑으로부터 나온 한탄을 표출할 때 부분적으로 포착될 수 있다. 극 전편을 통해서 늙은 하우스만은 절망적으로 거의 독백조로 세 번씩이나 그러한 대사를 외친다. 그 애처로운 절망은 그가 스틱스 강가에서 "텅 빈 해안가, 발아래 저리도 무심하게 부딪치는 바닷물과 함께 나 홀로 이렇게 서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라고 말하는 마지막 대사에서 냉소적으로 반향 되어 맴돈다. 빅토리아 시대의 라틴 교수인 늙은 하우스만에겐 잭슨에 대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환상으로 변형되고 포장되어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이 극에서 잭슨의 이미지에 대한 무대 지시문은 완전히 늙은 하우스만의 갈망과 회한을 한 캡슐로 포장한 것이다.

톰 스토파드
'어둠 속에서 우리를 향해 달려오는 달리기 선수로 보여 지긴 하지만 결코 우리 곁에 가까이 다가오지는 않는' 잭슨의 이미지는 도저히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곳, 무모하게 괴롭히며 유혹하는 그런 객관적 대상물로 보여 진다. 자연히 늙은 하우스만은 타인의 이목을 의식할 수밖에 없으며, 최소한 타인의 의견을 무시할 수 있는 와일드 같은 우상 타파 자는 결코 될 수 없다. 늙은 하우스만은 기본적으로 사회에서 한 남자로서, 한 인간으로서 기능하기 위해 타인의 인식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다. 타인의 인식에 그가 집착하는 것은 자기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비판적 영향으로부터 추적될 수 있다.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누이동생 케이트와의 대회는 자신이 어머니를 여윈 것과 그것이 자신의 영혼에 끼친 각인된 영향들을 자기 사랑의 깊이가 암시하고 있다. 늙은 하우스만은 자기의 죽은 어머니를 위한 시를 써서 출판했는데 그 책을 출판했던 출판사는 와일드가 '불가리아에서 일어난 터키인의 방화사건'에 관한 시를 써서 출판한 회사이기도 하다. 자기 어머니의 죽음의 사건은 그가 '소망되어지고 사랑받아지는' 대상의 상실을 의미한다. 그녀의 죽음은 미묘하게도 타자(타자의 인식)의 상실을 의미한 다. 따라서 젊은 하우스만에겐 어머니 죽음 이후 그 어머니의 자 리를 사회가 대신했던 것은 자연스럽다. 그리고 타자의 인식을 얻는 방법들 중 하나는 사회가 열렬히 찬양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하우스만이 고전 학문을 공부하는 고전학자 이자 라틴어로 된 시의 번역가나 또는 편집자이기 때문에, 이 극에는 군데군데 많은 라틴어구들이 나온다. 스토파드는 이 극 전반에 걸쳐 희랍어와 라틴어를 사용하는데 관객을 소외시키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이 언어들이 이 등장인물들의 세계를 이루는 기본적인 부분이기 때 문이다. 등장인물들이 주고받는 라틴어 부스러기들은 다소 어리둥절하게 할 수도 있지만 통상 라틴어는 독자를 수용하는 방식으로 제시된다. 스토파드는 거의 항상 극 중에서 이러한 라틴어나 희랍어를 인용할 때는 미리 직접적으로든지 아니면 바로 직후에든지 번역하여 준다. 따라서 희랍어나 라틴어가 이 극을 이해하고 감상하는데 하나의 걸림돌이 되는 게 아니라, 이 언어들이 세계의 일부가 된다는 점이 우리에게는 중요한 것이다. 하우스만과 옥스퍼드 책임교수인 벤자민 조웨트는 그 분야의 전문가일 뿐 아니라 선두주자이어서 그들이 인용하고 있는 희랍어와 라틴어는 배우들 이 필요로 하는 지식을 제공해 준다. 발음과 의미뿐 아니라, 운율, 발음, 일반 규칙 등이 그것이다. 고전 학문이나 라틴어를 안다는 것은 빅토리아 시대의 인간에겐 하나의 특권이었다. 늙은 하우스만이 라틴어 교수가 되기로 선택하는 것은 타자의 인정을 받고자 하는 내밀한 욕망에 의해 영향 받은 그의 영특함의 소치일 지도 모를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제1막 첫 부분에서 '맨 아래 에서 맨 위까지 단추가 채워진 검은 상의를 입고 새로운 검은 부츠를 신은' 이라고 묘사된 늙은 하우스만의 외관상 이미지는 상징 적이긴 하나 코믹하게도 사회적 예의범절의 질식할 듯 숨 막히는 무게 아래 통제된 한 라틴어 교수의 덕망 있는 이미지를 내포하고 있다. 동시에 그 이미지는 그의 단정하고 흐트러짐 없는 외모 이면에 자기 친구인 잭슨에 대한 억압된 열정과 번민을 위장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머릿속에서는 고전주의이고 심장에서는 낭만주의인 하우스만의 모순적 존재, 분열된 주체, 생각과 존재, 행위 사이의 간격 등은 잭슨에 대한 그의 애처로운 사랑의 절규에 나타 나있다. 동성애 때문에 공개적으로 와일드를 비난하고 처형하는 빅토리아 사회 풍토에서 하우스만의 '소심함과 찬사' 에 기인한 고대연애시의 '발명된' 세계에서만 오로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극 속에서 작가이자 저널리스트인 해리스는 남색이란 그리스와 로마의 '운동장과 전쟁터의 문화' 라고 지적한다. 편집자이자 저널리스트인 스테드는 '19세기의 런던은 그리스와 로마가 그랬듯이 패망으로 몰락하는 그릇된 에로티즘의 심연으로 전락하는 징후들을 보여준다.' 고 비난하기도 한다. 여기서 이 두 사람은 공히 와일드의 공개적인 동성애를 겨냥하여 비난하게 된다. 인생에 대한 와일드의 즉흥적이고 변덕스런 우상타파 적 삶의 방식과, 피상적으로는 사회적 기대에 부합하려고 애쓰는 소위 '신사'의 자기 분열적 기만에 대한 사회적 수용의 방식을 대조시키기도 한다. 에로스를 거부함으로써 하우스만은 와일드의 육체적 투옥보다 훨씬 더 자멸적인 정서적 감금으로 자기 자신을 저주한다. 마치 죽은 것처럼 행동함으로써 그는 결코 자기 자신의 진정한 삶을 살아보지 못한다. 하우스만은 빅토리아 사회의 한 라틴 교수이기를 선택하기 때문에 교묘하게도 그의 고통스런 심리적 상황보다는 동성애적 갈망은 출구 없는 유폐를 당한다. '성적 도착증' 으로 여 기는 사회적 개념의 한가운데서 하우스만이 선호하는 것은 자신 의 고전학문의 세계 속으로 자기 친구에 대한 동성애적 열정을 숨기는 것이다. 반면에 그의 시선은 죽을 때까지 잭슨을 향해 고정된다. 이와 같은 집요하게 고정된 웅시는 하우스만이 고전 원문에 대한 믿을 만한 판본에 집착하는 성벽과도 관련된다. 실제로 정확 한 판본을 찾으려는 하우스만의 집착은 무의미한 난센스로 바뀌어 버린 개악들로부터 소실된 육필 원고 본에의 심오한 철학적 탐색에 탐닉하는 것 또한 그 집요한 사랑의 집착과 동일한 뿌리를 두고 있다.
하우스만의 경우, 잭슨이외의 타인을 사랑한다는 것은 잭슨에 대한 그의 사랑의 권위적 판본에 대한 '개악 판본’일 수 있는 것이다. 결국 동성애에 대한 빅토리아 사회의 편협한 태도들에 앞서 하우스만은 고대 연애시를 통해 부분적으로 시도코자 하는 것은 그의 동성애적 사랑을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에서 정의되어진 대로 정의하려는 것이다. 사랑에 대한 정의가 고대 고전 작가들의 원고들처럼 개악되었다고 그는 단호하게 믿는다. 그는 고대의 고전적 연애시도 영웅들에 대한 찬미 대열 위에 자신의 사랑을 치환 시켰다. 잭슨을 '내 가장 위대한 친구이자 동료' 라고 칭하면서 그는 정열적으로 테세우스와 피리토스의 고대 연애 시에서 남성간의 애정 관계를 '고대 세계의 기사도적 미덕의 이상'이라고 찬양한 다. 더욱이 그는 반복적으로 호레이스와 리구리누스, 테세우스와 피리토스, 아킬레스와 패트로클루스 등의 남성 사이의 애정관계들을 반복적으로 찬미한다. 궁극적으로 그의 찬미는 단지 자기 친구 잭슨에 대한 자신의 자제된 사랑으로 대치 또는 환치되는 결과일 뿐이다 그 대치와 환치에도 불구하고 하우스만은 그 불행을 비껴나가진 못할 것임을 인식하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원치 않는 사 랑의 고통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극 말미에서 늙은 하우스만은 자신의 전 생애의 본질은 '죽은 것도 꿈꾸는 것도 아닌, 오히려 짧지 않는 기간 동안 그 둘 사이 즉 사실과 픽션의 사이에 걸쳐 존재 한다' 고 고백한다. 이 진술은 신비롭게도 자기 삶의 복잡성을 자의식 적으로 빗대어 말하고 있다. 고대 애정 시에 나타난 남성간의 우정이 갖는 기사도적 이미지에 대한 늙은 하우스만의 집착은 빅토리아 사회의 일반적 편견들에서 자기 자신의 사라지지 않는 고민과 심리적 작용을 펼쳐보여 준다. 고대 세계의 연애 시와 자기 자신의 시는 그의 후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심리적 부활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것들은 그 주체로 하여금 내면적 현실과 외부적 현실간의 갈등을 대처해 갈 수 있게 허용해준다. 더욱이 그는 시인과 학자라는 '서로 별개의 사람'으로 작용할 뿐 아니라, 또한 '가죽 장화를 신고 적절히 의상을 잘 차려 입은' 신사처럼 고대 세계의 동성애적 시에 대한 은밀한 열망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늙은 하우스만이 정신적 죽음을 겪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고전 학문과 자신의 시를 통해 자신의 정신적 부활을 그는 스스로 연기하고 있다. 이 모든 것과 관련하여 하우스만은 결국 자신을 '요란한 바다를 배경으로 서 있는 모래성' 에 비유한다. 이런 점에서 자신의 정신적 부활을 위한 과도기적 대상물을 갖고 놀면서 발명의 개념에 대한 작가의 유희를 통해 창조된 이 극 자체가 픽션의 조망으로부터 늙은 하우스만의 사랑의 발명을 위한 완벽한 위장으로서 기능한다고 볼 수 있다. 늙은 하우스만은 궁극적으로 비록 그가 대치와 환치를 통해 자기 사랑을 발명했긴 했을지라도 죽음에 임박한 한 금욕주의자로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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