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님」의 창작 배경을 살펴보기로 하자. 1946년 바젤 시립극장에서 연극배우로 일하고 있던 아내와 결혼한 뒤렌마트는 바젤로 이사를 했고. 그 즈음 취리히에서 바젤 시립극장 연극 감독의 연출 아래 「씌어 있기를」의 초연이 이루어졌다. 이를 계기로 유명해진 뒤렌마트는 바젤 시립극장과 함께 일하게 된다. 그곳에서 친분을 쌓은 사람들 중에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가 끼어 있어서 은근히 뒤렌마트를 카톨릭으로 개종시키고 싶어 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는 '신앙 그 자체' 와 맞서는 방식을 통해 카톨릭과 대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관해 그는 1980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신앙은 신뢰를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추상적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어떤 특정한 인물을 믿는다. 예수를 믿고 모세를 믿고 모하메드를 믿으며 부처를 믿는다. 그리고 그들을 신뢰한다. 사람들은 이들이 진리를 알고 있으며 이들이 없으면 진리를 알 수 없다고 믿는 것이다. 그뿐이 아니다. 현대의 신앙인 이데올로기 역시 인물을 믿는다. 마르크스를 믿고 엥겔스를 믿고 레닌과 스탈린, 모택동 등을 믿는다. 그리고 교황이 유명 공산주의자들을 신봉하는 폴란드에서 그곳의 현대적 신앙대신에 한 여인, 즉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앙으로 대치시키고자 한 것도 공연한 것이 아니다. 오늘날에도 신앙은 누군가를 믿는 걸 의미한다. 「장님」에 나오는 대공은 존재론적인 상황에 처해 있다. 그는 눈뜬 자 (볼 수 있는 자)들에 대한 믿음과 눈뜬 자들에 대한 의심. 이 두 가지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갈림길에 놓여 있다. 이 갈림길에서 그는 눈뜬 자들에 대한 믿음을 선택함으로써 그들에게 무서운 대상이 되며 유령처럼 비인간적으로 변모하고 만다. 그는 사람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다. 이 연극에서 기도하다, 라는 단어가 곧 '죽인다.' 의 자리에 들어선 것도 아무런 의미 없이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대공은 자신에게 진실을 말하려는 사람의 목을 졸라 죽이면서 '내 양손이 기도하듯 이 자네의 목 주위로 오므라뜨려지노라' 라고 말하는 것이다.
바젤에서의 대결 (앞에서 언급한 바젤 친구들과의 논쟁을 의미함)에서 기이한 기독교인이 기어 나온 셈이다.

Friedrich Dürrenmatt가 1947년에 집필하여 1948년에 초연된 두 번째 드라마인 『장님』은 거의 무대적 성공을 거두지 못한 작품으로 작가 자신이 1948년에 스스로 이 연극의 무대 공연을 거부한 바 있다. 이 작품에서는 어떤 구체적인 사회가 등장하는 것도 아니며 어떤 이념이 상충 결전하는 갈등이 표출되지도 않는다. 따라서 像이나 사건보다는 언어가 지배적인 작품이어서 한마디로 이 작품은 말의 드라마 라고 규정할 수 있다. 따라서 어떤 경험적인 현실보다는 형이상학적인 진실이 더 전면에 부각되어 진다.
“소경이 본다.“ 라는 극적 테마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드라마냐 非드라마냐 하는 논란이 제기되어지고 있는데 Elisabeth Brock-Sulzer 는 이 작품이 드라마와는 거리가 멀다는 다른 비평가의 견해를 부정하면서 뒤렌마트의 어느 다른 작품보다도 드라마의 내적 본질을 갖춘 작품이라고 평가한다. 즉 드라마성이 너무 과도해서 오히려 非드라마적으로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연극 속에 연극이 있으며 연극 속에서 연극되어 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드라마는 非드라마라는 견해는 Jan Knopf가 대표적으로 내세우고 있는 바, 그에 따르면 이 작품은 잠언, 명언으로 가득 찬 신앙 고백서라는 것이다. 양편의 견해를 종합해 보면 幕의 구분 없이 재치 있는 언술을 주고받는 장면들의 연속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대화로 구성된 散文이다 라는 정의가 적절하다. 이 작품은 또한 ‘迷惑의 비극 (Tragödie der Irrungen) 信仰의 비극라고도 규정 지워 지고도 있는데 이는 이 작품이 다른 여타의 작품보다 훨씬 성경적 요소와 여운을 많이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인공인 눈먼 공작은 新 욥, (Negro da Ponte) 는 성경 속의 유혹자라는 해석을 받아 온 것과 같이 성경의 寓意적 설명으로 파악될 수 있는 寓意 드라마이다. 그럼에도 『장님 Der Blinde』은 중세적 신비극이 아니라 오히려 바로크적 요소가 짙으며 뒤렌마트가 이 작품을 쓸 때 예술적 창작의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기 때문에 형식적 관습에 치중했으며, 추상적인 多義性을 채택하였기 때문에 이 작품을 실존주의적 현실의 철학적 意譯라고 주장한다.
1947년에 쓰여 진 작품 『장님』은 그의 초기 산문시대와 같은 작품을 쓰던 시기의 종교적 성향과 그 脈을 같이 하고 있다. 특히 이 時期는 뒤렌마트에게 있어 기독교도와 절망에 빠진 철학도로서의 갈등이 최고조에 달한 바 작품 곳곳에서 그의 양립 적 상반된 神觀이 구현되어 나타나 있다. 이 시기에 신앙의 보호 없이 인간 존재의 잔인한 현실 앞에 직면하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한 뒤렌마트는 神으로 부터 인간의 구원은 가능하지 않다는 否定적 神觀에 더욱 몰두하게 된다. 따라서 “이 세계는 고문실이며 이 세계는 고통이며 고문하는 자는 神으로 나타난다. 이 세계는 해답을 구할 길 없는 엄청난 물음표 그 자체인 것” 이다. 인간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로 부터 어떤 도움도 받을 수 없으며, 신은 인간을 위험에 방치하고 인간을 돌보지 않는 존재로 인식되게 된다. 뒤렌마트의 기본적 확신은 인간과 神 사이의 심연이 무한대여서 神과 인간 사이의 의사소통은 불가능 하다는 것이다. 神은 인간 세계의 모든 사건을 오로지 혼자서 관장하며 결정한다. 따라서 神이 지배하는 인간 세계는 인간에게 不可解한 것이며 신은 단지 인간에게 위협적인 존재일 뿐이다. 특히 뒤렌마트는 이 시기에 神은 不公正하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장님』에서 왕자 Palamedes는 궁정시인 Suppe에게 '神은 공정한가?' 라는 질문을 던지며 Suppe는 한마디로 불공정 하다고 답변한다. Palamedes의 견해에 따르면 神이 공정 했더라면 이 세계는 지옥이 아니었을 것이라는 결론이다. 이 시기의 뒤렌마트의 神觀이 반영되고 있는 이 작품에는 神의 존재 유무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넘어, 신은 정의롭지 못하다는, 神은 온전하지 못하다는 작가의 神觀이 형상화 되어 있다. 특히 Armin Arnold는 작품에 나타나는 공작과 아들의 관계를 전기적인 관점에서 뒤렌마트의 아버지인 뒤렌마트 목사를 맹목적 신앙의 눈먼 공작이라고 보았고, 절망에 빠진 철학도인 뒤렌마트를 공작의 아들 Palamedes의 體現 이라고 보았듯이 이 작품 속에는 신앙 때문에 갈등하는 뒤렌마트의 자전적인 요소가 짙게 깔려 있다.

이 작품은 성경적인 요소가 다분히 함유된 작품으로 공작과 Negro da Ponte의 관계를 욥과 사탄에 비유하여 해석되어지는 경향이 농후하다. 실제로 공작과 Negro da Ponte의 관계는 공작의 대사에 설정되어 나타난다. 공작이 Negro da Ponte에게 Satan이 각인 되어져 있는 벽화를 설명해 주는 가운데 이 작품 속에 전개될 두 사람의 관계가 이미 暗示, 先取되어 지고 있다. 유혹자가 손에 칼을 들고 있다는 공작의 설명을 듣자마자 Wallenstein진영에서 근무하던 장군인 Negro da Ponte는 칼집에 칼을 넣어 버린다. 사실상 성경의 욥기에 보면 Satan이 여호아에게 말하는 바, 욥에게 여호아가 베푼 것을 전부 거두어들이면 욥이 여호아를 원망하고 욕할 것이다, 라는 가정에서 출발하며, 사탄은 욥을 시험하기 위해 욥에게서 모든 혜택을 빼앗고 나병에 걸리도록 시험하는 것이다.
그러나 눈먼 공작과 욥은 主에 대한 대응 태도에서 상이함을 드러내고 있다. 즉 눈먼 공작은 자신이 장님이 된 것을 한탄하지 않고 오로지 신앙 속에서 모든 사람을 믿음으로써 ‘보는’ 것과는 반대로 욥은 자신의 患難에 대하여, 자신의 존재에 대하여 저주한다. 특히 主가 자신의 허물을 赦하여 주지 않음을 원망한다. 욥은 무슨 이유로 主가 자신을 징벌하는지의 이유를 알고 싶어 한다. 즉 자신의 허물과 죄가 무엇인지 인식하도록 하여 달라고 함으로써 신에 대한 회의가 압도적이다. 그러나 눈먼 공작은 자신이 장님이 된 것에 대해 신의 징벌로 생각하지 않고 自足한다. 등장인물의 대결 구도는 욥과 Satan의 관계 설정이지만, 욥과 공작은 불행에 대처하는 정신적인 자세가 다르다. 그러나 눈먼 공작은 보이지 않는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못 봄'에 침잠함으로 써 정신적으로 어둠을 극복하기는 하나 눈의 감각적 결함 때문에 현실 파악에 실패한다. 인간들의 말의 농간에 속아 자신의 아들을 살해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며, 조소꺼리로 전락한다. 그가 얼마나 무분별하게 Negro da Ponte의 거짓말에 속아 아들을 살해하는가를 보게 되면, 눈먼 공작은 바로 神의 全能에 대한 懷疑의 顯現으로, 아들을 구원할 능력을 방기한 잃어버린 아버지의 비유로 나타난다. 진실을 파악할 능력이 없는 아버지는 全能을 의심받는 神의 상징이다.
이 작품을 구성하고 있는 개념 구조는 신앙과 절망의 반대성에 기초하고 있다. 눈먼 공작은 절망하지 않기 위해, 모든 것을 의심하지 않기 위해 모든 것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공작에게 있어 신앙이란 육체적인 눈으로 파악할 수 없는 현실을 파악하는 수단이며 방법이다. 즉 공작은 믿음으로써 현실을 극복하는 것이다. 믿음은 눈먼 공작에게 영혼의 평화를 보장한다. 이와 같은 공작의 믿음은 뒤렌마트의 신앙관과 직결하는 바, 뒤렌마트에게 있어서 신앙이란 인간 본성에 속하는 것으로 허무주의자라 할지라도 그 무엇인가를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神에 대한 인간의 적합한 태도란 자율적인 인간 이성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신앙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이다. 또한 신앙이란 인간 능력으로 획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神만이 인간에게 신앙을 줄 수 있으며, 인간 스스로가 자신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도 줄 수 없다는 것이다. 눈먼 공작에게 있어 신앙이란 신으로 부터 부여 받은 은총이다. 한편 아들 Palamedes는 현실을 파악하지 못하는 눈먼 아버지의 맹목적인 신앙에 대하여 절망한다. 그는 신앙이 인간을 눈멀게 만든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절망은 아버지의 맹목적 신앙에서 생긴 것이라고 말한다. 신앙에 대해 회의하는 Palamedes는 신앙은 절망하지 않기 위해 인간이 스스로 만든 망상이라는 인식에 도달한다. 그는 아버지의 맹목적 신앙에 대해 절망하고 또한 자신의 무 신앙에 대해 절망한다. Palamedes는 근거 없는 슬픔에 시달리는 우울증 소지자로써 모든 연관에서 절망을 토로해 내는 비관론자이다. 인간의 신앙이란 무엇이며 얼마나 불완전한 것인가를 증명하기 위해, 다시 말해 신앙이 인간을 얼마나 어리석게 만드는가를 증명하기 위해 Palamedes는 아버지에 의해 처형당한다. 神의 무능력을 조소하고 인간의 신앙이 눈먼 망상이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살해당함에도 불구하고 Palamedes는 아버지를 매개로 인간과 神의 종속 관계를 운명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따라서 Palamedes는 믿는 자인 아버지와 무신론자인 Negro da Ponte 사이의 중간적 존재로써 자신의 懷疑에 절망하는 信仰人임을 들어낸다. 이런 점에서 Palamedes는 뒤렌마트 자신의 신앙적 성향을 다분히 내포하고 있는 自傳的 인물임을 알 수 있다
계속되는 Palamedes의 언급을 종합해 보면 아버지라는 존재는 神과 동일시되며 神으로 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인간 존재의 운명이 부각되어 진다.
Palamedes가 아버지의 신앙에는 절망하나 아버지의 신앙을 지켜주기 위해, 다시 말해 아버지의 영혼의 평화를 지켜 주기 위해 파괴되어진 나라의 實狀을 알려 주지 않는 인도주의자인 반면에 Negro da Ponte는 계몽주의적 무신론자이다. 그에게는 절대적 존재에 대한 믿음이 결여되어 있다.
성경의 Satan과 같이 인간의 한계를 시험해 보고자 Negro da Ponte가 시도하는 것은 공작의 신앙을 허물어 뜨려 그로 하여금 절망하게 하려는 것이다. 인간이란 예외적인 존재가 있을 수 없다는 신념의 소유자로써 Negro da Ponte는 공작만이 신앙 속에서 영혼의 평화를 누리는 것을 참을 수 없어, 자신과 같은 類의 인간으로 만들기 위해 공작의 몰락을 일깨워 주는 연극을 벌인다.
연극을 통해 Negro da Ponte는 공작에게 신앙은 망상이며 믿는 자는 바보라는 인식을 심어 주려 노력했으나 공작의 신앙을 무너뜨리는 데는 실패한다. 종교 이데올로기에서는 해방됐으나 현실을 파악할 수 있다는 새로운 이데올로기에 사로 잡혀 있는 Negro da Ponte는 그가 연출한 Octavia의 죽음과 같은 연극이 사실로 되어 버리는 헤아릴 수 없는 현실 앞에 당황한다. 또한 그는 무너지지 않는 공작의 신앙에 더 이상의 유혹을 포기하고 스스로의 패배를 자인한다.
신앙과 절망이 개념적 양극 구조를 이루는 가운데, 봄과 못봄이 감각적 차원을 넘어 개념적 상호 반대 개념群을 성립시킨다. ‘본다’ 는 의미는 인간의 五官중의 하나인 눈을 통해 현실을 파악하는 것이라는 기본 개념 외에 『장님』에서는 다른 복수 개념을 내포하고 있는 바. 육체적인 눈으로 현실을 파악하는 것 이외에 진실을 파악한다는 것이 ‘본다.’ 는 것이다. 작품 도처에서 보는 것과 진실을 소유하는 것이 동일시된다.
눈먼 공작의 ‘봄’ 이란 현실을 보면서 현실로 부터 해답을 구하기보다는 믿음으로써 현실을 극복하는 것이 ‘봄’ 이다. ‘못봄’ 은 ‘봄’ 과는 반대적 의미로 현실 파악 능력의 감각적 상실을 말하나 작품에서는 근원적 救援의 원천을 의미한다. 공작에게는 신앙을 유지하기 위해 ‘못봄’은 필수 조건이며, 견디기 힘든 현실로 부터의 도피처이다. 공작은 ‘못봄’을 극복하는 것은 믿음뿐이며 믿는 자만이 볼 수 있다는 지혜를 터득한 것이다. 공작은 현실의 진실을 파악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그에게 진실을 알려 주려는 궁정 시인 Suppe를 살해하기 까지 함으로 써 자신의 못봄을 통해 신앙을 잃지 않으려는 기괴한 집착을 보이기 까지 한다. 또한 ‘보는 자’ 와 ‘못 보는 자’의 진실이 다름을 역설한다.
공작의 신앙을 무너뜨리는데 실패한 Negro da Ponte는 자신이 맹인이었음을 자인하며 진정으로 보는 자는 맹목적으로 믿는 者이며, 진정한 맹인은 신앙이 없는 者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봄’ 과 ‘못봄’ 의 감각적 개념은 신앙과 절망의 형이상학적 개념 구조와 연결 합일되어 ‘보는 자’의 절망과 ‘못 보는 자’ 의 신앙의 대립 구조를 산출한다. ‘못 보는’ 아버지와 ‘보는 자’인 아들의 변증법적 대립은 두 사람 모두 바보라는 개념으로 종합되어 진다. 따라서 이 기본 양극 반대 개념을 극복하는 上位 개념은 바보이다.
절망을 대변하는 Palamedes는 공작을 “영락한 바보“ 라고 칭하며, Negro da Ponte는 왜 바보인 공작만이 절망하지 않아야 하느냐고 외친다. 공작 자신도 Negro da Ponte가 펼치는 연극 속에서 그 자신이 바보로써 조소꺼리가 되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면서 모든 인간이 바보라는 인식을 토로한다.
뒤렌마트에게 있어 바보란 자신의 행동을 의미 있게 결정할 수 있는 정신적 능력이 결여된 者라는 기본적인 개념을 넘어서, 노력과 희생을 치르나 그에 대한 대가나 보람을 찾지 못하는 者이다. 예를 들면 로물르스나 물리학자 뫼비우스와 같은 사람들이다. 신앙 없이 인식을 추구하는 자인 Negro da Ponte가 진정한 바보라고 규정하는 견해는 일면 타당하기는 하나 본질적으로 이 극의 바보 개념을 간과한 것이다. 공작과 아들 Palamedes 는 신앙과 절망을 대변하는 데 있어 각자 節度를 벗어나 그로테스크한 면을 보이고 있다. 상식과 이해를 뛰어 넘어 과장 영역에 들어갔기 때문에 두 사람 모두 지나친 집착의 바보로 나타난다. 아들을 살해하면서 까지 믿음에 집착하는 아버지와 모든 관련에서 절망에만 집착하는 아들 모두가 바보라 규정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아버지의 신앙이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보여 주기 위해 살해당하는 아들은 아버지보다 더 어리석은 바보로 나타난다. 따라서 바보라는 개념을 중심 軸으로 신앙, 懷疑, 절망이 하나로 종합되어 진다.
이 작품의 근본 테마는 요한복음 9장 40절의 성경 구절 ‘맹인이 보며, 눈뜬 자는 눈 먼 것이다.’ 라는 Paradoxie 로써 이 Paradoxie는 이 작품의 근원적 의미를 뒷받침해 주고 있는 기본 원리이다. 눈 먼 공작은 믿음으로 보이지 않는 현실을 극복하여 ‘보며’, 현상 뒤의 진실 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맹인이 ‘본다.’ 는 Paradoxie는 성립한다. 한편 ‘보는 자’인 Negro da Ponte는 공작의 신앙을 허물고자 했던 자신의 시도가 헛되었음을 간파하고, 스스로가 보지 못했음을 자인한다. 따라서 눈뜬 자가 못 보는 자였음이 드러나며, 보는 자가 장님이라는 Paradoxie가 성립한다.
눈앞에 보이는 현실이 올바른 인식을 방해하기 때문에 앞을 보지 못하는 장님이 오히려 平等眼과 慧眼을 가졌다고 주장한다. 장님은 눈을 감으면 집을 찾을 수 있으나 눈을 뜨게 되면 그의 집을 찾아갈 수 없듯이 장님만이 갖는 독특한 내면의 세계가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온통 왜곡되고 허위로 가득 차 있는 현실 앞에서 눈먼 공작은 신앙으로 현실을 극복할 수 있으나, 눈뜬 자는 현실을 오판할 가능성이 더 큰 것이다.
작품의 근본 테마 외에 Paradoxie를 구성하는 요소는 상황이나 사건이 아니라 등장인물들의 말로 이루어져 있다. Palamedes는 약자가 이기며, 눈먼 자가 보게 되는 Paradoxie가 실현되어지기를 희망한다. 弱者가 이긴다는 Paradoxie 역시 극 진행을 통해 성립되어 지는 바, 보지 못하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의지해야만 거동할 수 있는 약한 공작은 신앙의 힘을 통해 Wallenstein진영의 장군인 Negro da Ponte를 물리친다. 이 드라마의 내적 구성은 Paradoxie가 기본원리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반대적 대립성 Antithetik이 지배하고 있다. 따라서 근본적 대립구조는 봄과 못봄의 양극성에서 출발한다. 보는 자와 못 보는 자의 양극 구조는 아는 자 Wissende와 믿는 자의 대립을 파생시키면서 보는 자는 아는 자이며 못 보는 자는 믿는 자라는 등식이 성립된다.
보는 자의 절망과 못 보는 자의 신앙의 대립은 공작의 신앙이 진실인가 망상인가의 반대 성을 파생시킨다. 공작은 자신의 盲目의 어둠 속에는 진실만이 존재한다고 말하지만 공작을 둘러싼 외부 세게는 공작의 신앙의 세계를 거짓 또는 망상이라고 생각한다. 극적 현실도 무대 위의 可視적인 실제의 세계 와 공작의 상상의 세계가 二元 對立화 되어 있다. 무대 위의 가시적인 허구의 현실은 폐허이나, 공작의 상상의 세계에는 번영, 평화로 반대적이다. 또한 공작의 상상의 세계에는 반대적 두 세계가 時差를 두고 나타나는 바, Negro da Ponte가 오기 전 영혼의 평화 속에서 자신의 나라가 망하지 않았다는 믿음과, 후에 Negro da Ponte의 술책에 의해 자신이 적의 침공을 받아 피난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가상의 세계 속에서의 절망이 대비적이다.
Paradoxie가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반대적 언어가 대립하고 있으며 변증법적 대립 속에서 상대를 지양한다. 반대적 언어의 대비는 상당 부분 Paradoxie를 형성하기도 한다. 반대적 언어 대립은 작품의 테마인 신앙과 절망으로 부터 시작하여 행복과 불행, 보는 자와 못 보는 자. 생과 죽음, 선과 악, 내면과 외면, 강함과 약함, 정의와 불의 등 ,특히 잠언 적 문구에서 대립적 언어는 무수히 나타나고 있다.
작품 에서는 등장인물의 특성상 말의 중요성이 어느 다른 작품보다 강조되어질 수밖에 없다. 현실 세계를 감각적으로 인지할 수 없는 소경에게 말은 결정적인 힘을 발휘한다. 따라서 이 작품의 全 現實은 언어로 부터 구성되고 전개되어진다. 뒤렌마트의 언어 사용범위는 시대착오적 발언으로 부터 미묘한 언어의 유희, 익살, 심오한 주석, 진부한 俗된 발언에 이르기 까지 다양한 영역에 속한다. 말은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작용할 수 있는 최대의 힘으로 앞을 보는 정상인보다 소경에게 더욱 강력하게 나타난다. 폐허가 된 영토에서 자신의 公國이 번영과 평화 속에 안주해 있다고 믿게 만든 힘도 Palamedes의 거짓말이었으며 공작의 망상을 깨는 수단도 말이다. 적군이 침공해 와 공작의 군대를 멸망시키고 城으로 진군해 오고 있다는 Negro da Ponte의 거짓말로 공작의 영혼의 평화는 깨진다. Negro da Ponte 자신도 맹인 공작에게 말의 중요성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인식하고 있다. 맹인에게는 可視적인 세계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말을 통한, 말을 들어서 상상하는 세계가 구성된다. 언어로 부터 현실이 전개되기 때문에 구체적인 사건 전개 보다는 말을 매개로 상상과 착각의 세계가 펼쳐진다. 이 드라마의 줄거리 구성도 자신의 城이 전쟁의 참화 속에도 파괴되지 않은 채 온전하다는 믿음과 이 믿음을 무너뜨리려는 Negro da Ponte의 연극으로 구성되어 진다. 자신의 영토가 온전하다는 믿음은 아버지의 영혼의 평화를 차마 깨뜨릴 수 없었던 아들 Palamedes의 거짓말에서 연유했으며 지나간 과거를 현재인 것처럼 거짓의 연극을 벌이는 Negro da Ponte의 거짓말로 인해 공작은 불행해 진다. Negro da Ponte의 현재 시점에 맞지 않는 거짓말을 통해 공작의 과거가 현실로 인식되어 진다. 현재 시점에 일어난 사건이 아님에도 말은 맹인에게 과거적 사건을 현재화 시킬 수 있다. 맹인에게는 말을 통해 보이지 않는 세계를 만들어 낼 수 있으며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존재하게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말은 신앙의 수단이기도 하며 거짓과 현혹의 수단이기도 하다. 공작이 자신의 아들을 처형하게 되는 것도 Negro da Ponte의 거짓말 때문이다. 나라가 왜 이렇게 파멸하게 되었는가를 묻는 공작에게 Negro da Ponte는 Palamedes가 조국을 배반하고 적을 불러 들였다는 거짓말을 하며, 모든 말을 믿는 공작은 이 말을 믿는다. 또한 Palamedes는 자신이 죄가 없음을 주장하면 믿겠느냐는 말에 공작은 믿는다고 답한다. 두 사람 중의 하나는 거짓말을 함이 틀림없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말을 다 믿겠느냐는 아들의 질문에 아버지는 이 세계를 다 이해할 수 없다는 말로써 질문에 대한 대답을 회피한다. 결국 아들은 아버지의 인간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증명하기 위해 자신의 무죄를 적극적으로 주장하지 않고 살해당한다. 아들은 진실을 말하지 않고 Negro da Ponte의 거짓말을 그대로 믿도록 방치한다. Palamedes는 Negro da Ponte의 거짓말에 대해 자신의 「말」을 포기하고, 다시 말해 공작에게 자신이 죄가 없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고 살해당한다. 말과 말의 대결에서 진실과 거짓의 말을 구별해 낼 능력이 없는 아버지 앞에 신의 전능에 대한 회의가, ‘잃어버린 아버지’에 대한 회의가 솟아오르고 있다. 말의 가능성과 한계를 통해 다시금 뒤렌마트의 神觀및 종교적 성향이 엿보여진다. Negro da Ponte의 유혹의 ‘말’은 공작을 불행과 절망에는 빠뜨렸으나 그의 신앙을 깨뜨리지는 못한다. 공작은 마지막 절망의 순간에도 神의 진리 속에 살고 있음을 인정한다. 또한 공작은 인간의 ‘말’을 가지고는 인간을 구원할 수 없음을 인정한다. 인간을 전쟁이나 飢餓로 부터 구원할 수 있는 단 한마디만 해 달라는 농부로 분장한 연극 배우의 탄원에 대해 공작은 구원과 위로의 말을 해줄 수 없음을 역설한다. 인간의 구원은 인간에게서 가능하지 않다는 뒤렌마트의 傳言을 통해 다시 한 번 그가 회의에 빠진 초월적 신앙론자 임을 알 수 있다.
이 작품을 쓰던 시기는 뒤렌마트에게 있어서 기독교도로써 태생적 신앙과 이성적 철학적 사변성과의 갈등이 절정에 달한 때이다. 따라서 『Blinde』에서는, 허무주의자가 되려는 유혹과 기독교도로 머무를 가능성과의 대결이 그 어느 작품보다 집중적으로 시도되어 지고 있다. 기독교에만 귀속 시킬 수 없는 신학적 철학적 신앙의 문제가 절망, 회의 등의 반대적 개념과 대비되어 실험 논구되어 지고 있다. 신과 인간의 관계는 자율적인 인간 이성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신앙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이다.
“약한 자가 이기며 눈먼 자가 본다.”는 Paradoxie가 실현되어지는 과정이 이 드라마의 줄거리 진행이며 핵심이다. 신앙과 절망이 개념적 양극 구조를 이루는 가운데 진정으로 보는 자는 맹목적으로 믿는 자이며 진정한 소경은 신앙 없이 인식을 추구하는 자로 나타난다. 보는 자와 못 보는 자의 양극 구조는 아는 자와 믿는 자의 대립을 파생시키면서 못 보는 자의 신앙이 진실이냐 망상이냐의 반대성을 산출한다. 또한 신앙과 절망의 반대적 二元 構造는 바보개념으로 합일 되어 진다. 말과 말의 대결에서 참 말을 구별할 수 없었던 아버지도 맹목적 신앙의 바보이며, 신앙이 인간을 얼마나 바보로 만드는 가를 증명하기 위해 아버지에 의해 처형당하는 아들도 절망의 바보이다. 신앙의 본질과 힘에 대해 무지했던 Negro da Ponte야 말로 진정한 바보요 맹인임이 드러난다. 바보라는 개념을 축으로 신앙과 절망이 하나로 종합되어 진다. 이와 같이 뒤렌마트는 허무주의자가 되려는 유혹과의 투쟁에서 신앙인으로 승리한다.
눈먼 공작은 유혹자와의 대결에서 승리하기는 하나 거짓말에 속아 아들을 살해하며, 현실의 진상을 알려주려는 궁정시인을 살해함으로써 부조리하며 그로테스크한 영역에 빠져 든다. 따라서 눈먼 공작은 전능을 의심받는 신의 상징으로써 뿐만 아니라 이성적 사변에 의해서는 파악될 수 없는 신의 代理者, ‘잃어버린 아버지’의 비유로 나타난다. 공작과 대결 구도에 있는 Palamedes와 Negro da Ponte 두 사람 다 神의 거대한 절대적 힘 앞에서 계속적으로 좌절하는, 神으로 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인간 존재의 운명의 顯現으로써 나타난다.
『장님 Blinde』에서 신앙이란 인간들이 신적인 존재를 인식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감지해야 하는 절대적인 것이며 인간의 언어로써 파괴되어질 수 없는 不變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신앙의 수단이며 망상과 착각을 생산해내는 말은 인간을 구원할 수 없으며, 신앙을 깨뜨리지 못한다. 그러나 말은 Paradoxie적 조합과 형성을 통해 인간 사상의 원초적 진실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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