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뒤렌마트 '멸망과 새로운 생명'

clint 2015. 11. 13. 19:37

 

 

 

 

 

 

「멸망과 새로운 생명」 (Untergang und neues Leben)의 뿌리는 1941년 가을로 거슬러 올라간다. 뒤렌마트는 대학입학 시험에 합격 했으나 겨울 학기가 시작되기까지는 시간이 충분했다. 그는 세계의 종말에 관한 희극 「스위치」(Der Knopf) 집필에 몰두했다. 그러나
이 습작 과정에서 나온 것은 그의 표현을 따르면 단편조각들에 불과했고 힘겹고 고통스럽기 만한 졸작이었다.
1941년 겨울학기 동안 그는 베른에서 프리츠 슈트리히 밑에서 독문학을 공부하다가 신병학교에서 봉사대로 전출되었고 1942년 겨울학기에는 취리히에서 학업을 계속했다. 그러나 그것은 공식적인 것이었을 뿐 대학에서 보낸 시간은 아주 적었고 밤이면 그는 화가인 발터 요나스(Walter Jonas)와 함께 있었다. 그로부터 문학에 관해 두 대학에서보다 더 많은 것을 배웠다. 그리고 나머지 밤 시간은 「스위치」를 쓰는데 보냈고 이 작품을 완성한 것은 에이손에서 였다. 그곳은 발 데 헤렌스의 동쪽 비탈 높이 자리 잡고 있는 작은 보금자리로 거기에 오르면 달 위에 올라서 있는 것처럼 아래를 환히 내려다 볼 수 있었다. 그는 이 작품에 영향을 준 것이 무엇인지 꼬집어 말할 수 없다고 하면서도 소에르겔(Soergel)의 「시대의 시문학과 시인들」 (Dichtung und Dichter der Zeit)에서 알게 되었던 주변의 몇몇 표현주의자들 의 몰락과 발터 요나스의 권유로 관람한 취리히 극장의 「세추안의 선한 인간들」(Guten Menschen von Sezuan) 공연 등이 어느 정도 흔적을 남겼을 수 있다고 회고한다.
이 책에 「멸망과 새로운 생명」(Untergang und neues Leben)이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는 본문은 1951년에 완성된 것으로 초고인 「스위치」(Der Knopf)와 달라진 부분은 장군이 등장하는 장면뿐이다. 장군은 초고에서는 발덴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고 이방인의 이름은 아담이었다. 그리고 기계(Die Maschine)에는 이그드라실리우스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다. 마지막 시도 1951년에 쓰여 졌다.

 

 

 

우리가 사는 이 해묵고 난파된 ‘세계’를 ‘형체가 없는’, ‘분명한 모습 또한 없는’, ‘엄청나고도’, ‘수수께끼 같은’ 것이라 말한다면 이 세상을 제대로 말한 것인가? 제대로 설명한 것인가? 핵무기와 또 다른 생명체인 바이러스, 전쟁과 폭력, 대재난과 테러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과거의 어느 시대보다도 더 엄청난 비극적 상황 속에 있다. 그러나 이 비극에 대해 책임을 느끼는 사람도, 책임을 지울 사람도 없다. 아니, 없다, 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이러한 비극적 상황을 비극이라 느끼는 사람은... 그저 일상일 뿐? 너무나 비극적이어서 우스꽝스러운, 어디서부터 시작이며 어디까지가 끝인지 알 수 없는 시간, 혹은 공간. 이 너덜너덜한 지구에 이방인이라는 사내가 흘러들어온다. 그 낯선 이는 어쩌면 우리에게는 친숙한 이며, 그리하여 ‘이방인’이라 불리어질 것이다. 우리는 그저 쉽게, 그렇게, 부를 것이다. 현실인지 꿈인지 헤매던 이방인은 허공에 대고 나는 누구인가? 나는 잊혀진 것인가? 라고 힘없이 날려본다. 그래봤자지 뭐. 한 남자가 나를 생산했을 것이고 한 여자가 나를 낳았을 뿐이다. 제기랄.
동생을 지키기 위해, 이 지긋지긋한 곳에서 벗어나기 위해 용기를 얻으려는 소년, 어느 군인의 아이인지 알 수 없는 씨를 배고 이미 정신을 놓아버린 소녀, 그들은 전장의 쓰레기더미 속에서 쥐새끼들처럼 살아간다. 빨간 쥐는 용감한 쥐, 두더쥐처럼 땅을 잘 파는 아이들 에게 이방인은 그저 단순한 낯선 이가 아니다. 여기로 오는 길을 알고 있다면 여기서 나가는 길도? 제발 지뢰에 발목만 날아가지 않기를 희망하던 아이들은 어서 신발을 파야만 한다. 누군가가 신고 터벅터벅 걸었었을... 도대체 아이들은 무슨 죄를 지었을까? 전염병과 절망으로 자살한 이들의 악취가 풍기는 시체더미. 환하게 빛나는 태양 앞에서 부끄러워져 그만 목을 매고 말았다는 사내. 피 속에 나비가 떠다니는 전염병에 걸려 팔도 다리도 씹혀버린 간호장교. 광기와 인간에 대한 연민에 불타버린 떠벌이 술주정뱅이. 차마 혼을 놓지 못한 시체들은 곧 죽어 그들 곁으로 오게 될 이방인을 친구로 맞이하고 절망의 춤, 광기의 합창을 지르며 절망한다. 모든 것은 생각 탓이다. 생각은 살 속에 박힌 늑대의 어금니 같은 것이니까.

 

 

 

영원한 어둠 속의 여인, Nore와 잠을 잔 댓가로 이방인은 저주받은 운명에 따라 창녀를 총으로 쏜다. 자신의 멸망을 선택한 창녀, 노레는, 이방인에게 사랑이란 이름으로 죄를 씌우고, 죄를 짊어진 채 어딘지 모를 곳을 헤맬 수밖에 없던 이방인은 장군의 지하벙커 속으로 흘러들어간다. 그 습기찬 무덤 속에서 소년은 장군으로부터 학살의 수업을 받고 있다. 니가 그런 일을 하도록 저주받은 운명인 걸 모른단 말인가?
그보다 먼 옛날, 누구의 씨인 줄도 모르는 아이를 밴 소녀가 소년과 함께 별을 새며 노래를 부른다. 그리고 쥐새끼들처럼 그들의 구멍으로 찾아들어간다. 오직 하얀 밀가루 같은 은하수가 그들의 구멍을 열어줄 뿐, 그래... 어서 다 떨어져 세상을 밝혀주었으면...
세상을 단박에 날려버릴 핵폭탄, 기계를 발명해 놓고도 병사들에게 점점 잊혀져가던 장군은, 자신의 허망한 권력과 권위를 거세해버리고 누군가를 기다려왔었다. 인간들이 하는 일은 모두 심심해서 하는 일, 모두 개 같은 룸펜이라 외치던 그는 인간들의 모든 심심한 폭력을 이방인에게 위임한 채 처형을 맞이한다. 우리 인간들은 모두 룸펜이다. 개같이 용감한 룸펜이다. 큭큭큭...
그리고 이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합법적’이라는 이름아래 처형이라는 임무를 수행하던 형리는 자신만의 병을 앓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자, 가장 가련한 자, 오! 나의 형리는 내 옆자리에 같이 누워 잠을 자는 나의 죽음일 터...
세상의 멸망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들은 슬프고도 안타까운 마지막 죽음의 파티에 초대된다. 숨을 헐떡이며 꺼억꺼억 울부짖는 어린 쥐새끼들은 어서 밤이 지나가고 온 세상이 환해질 백야를 기다리며 별을 세고 있다. 내 이름은 인간이었다. 거짓말이야! 니가 살아있다면... 끝이 날까?
이방인은 알게 되었을까? 자신이 누구이며 이 세상은 어디인지... 이방인이 접하는 이 모순 되고 기괴한 인간 군상들은 우리들의 마음과 세상이 앓고 있는 병의 극단을 보여준다. 거짓이 아니라 과장된 진실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멸망을 보여준다. 세상은 멸망한다. 그 멸망이 무엇인지, 그 멸망 뒤에는 무엇이 있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지금 이 순간, 우리들 각자가 무엇에 희망을 걸어야하며 무엇을 기준으로 살아야할지를 잃어버린다면 말이다. 이것이 우리가 말하고자하는 슬픔이며, 이 연극은 우리가 이 슬픔을 말하는 방식이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은연중에 우리에게 멸망이 다가옴을 느끼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이미 우리보다 더 가까이 멸망을 느끼고 있을 지구 반대편 대륙, 혹은 산맥만 넘으면 만나게 될 발목이 위험한 아이들에게, ‘생명’은 현실일 것이다.

 

'외국희곡' 카테고리의 다른 글

뒤렌마트 '씌어 있기를'  (1) 2015.11.13
뒤렌마트 '장님'  (1) 2015.11.13
알베르 까뮈 '이방인'  (1) 2015.11.13
몰리에르 '재치를 뽐내는 아가씨들'  (1) 2015.11.13
몰리에르 '앙피트리옹'  (1) 2015.1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