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아르투어 슈니츨러 '사랑의 유희'

clint 2015. 11. 13. 20:25

 

 

 

 

 

 

- '사랑'과 '유희'가 빚어낸 양가적 비극의 모자이크 -
이 작품은 그의 3막 비극으로 1895년 10월 9일 비인의 부르크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특히 성공을 거둔 슈니츨러의 작품들은 관객의 정서적 감정이입을 약화시키지 않고 오히려 이를 진작시키는 예술적 기법을 보여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런 유형에 속하는 것으로 우선적으로 꼽히는 〈사랑의 유희〉는 슈니츨러에게 최초의 대성공을 가져다주었다. 그 결과 이 드라마는 이후 수년 간 작가 슈니츨러의 이미지를 대중에게 규정해준 작품이 되었다. 그러나 정작 슈니츨러 자신은 드라마형태를 천편일률적으로 평가하는 피상적 비평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다. 그는 〈사랑의 유희〉를 "부유한 가정 출신의 대학생을 향한 한 서민 처녀의 사랑과 행복, 번민 그리고 그 종말을 그린 작품”이라고 평하면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과거의 열정에 아직 휘말려 있는 채, 이 젊은이는 어린 처녀와의 관계를 처음에는 너무 가볍게 생각하기 때문에, 나는 거의 홀려들을 수 없는 고통스럽게 아이러니컬한 어조로 이 작품에 〈사랑의 유희〉라는 제목을 붙였다. [...] 아주 단순한 그 줄거리를 잘못 이해한다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독자나 청중에게도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 대부분의 비평은 '사랑의 유희’ 라는 단어를 그 본래적 의미에서 파악하는 체 했다. "작가의 이 볼멘 항변에서 명시되듯이, 제목에 내재되어 있는 아이러니컬한 어조는 '사랑'과 '유희'가 빚어내는 양가적인 비극성을 이미 예시해 주고 있다. 브랑드 Georg Brandes가 슈니츨러작품의 절반은 타나토스에게, 나머지 절반은 에로스에게 헌정되었다, 고 쓸 정도로, 그의 문학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모티브 중 하나로 무엇보다 사랑과 죽음의 연관성 을 들 수 있다. 또한 거기 반영되는 시대의 경박한 고통은 탕자와 비인의 귀여운 아가씨들의 삶에서 추출해낸 다양한 에피소드 속에서 피상적 분위기로 용해되고 있다. 이런 일반적 특징들을 염두에 두면서 독자내지 관객은 〈사랑의 유희>를 슈니츨러 특유의 전형성을 전제로 하여 올바로 이해 할 수 있겠다.

 

 

 

〈사랑의 유희〉는 어떤 의무로부터도 자유로우려는 연애관을 표방하는 부유하고 유쾌한 비인의 두 대학생 프리츠와 테오도어를 하나의 축으로 하여 전개된다. 다른 한편 신분이 낮은 여자 친구 미치와 크리스티네의 단조로운 일상이 또 하나의 축을 이룬다. 대화, 방문, 만남으로 채워져 있는 일상의 삶을 지탱할 다정한 보호를 동경하는 이들은 점차 가상과 거짓된 사랑으로 점철된 순간적이며 덧없는 분위기 속으로 빠져든다.
어느 날 프리츠의 집에서 이들 네 사람은 촛불을 켜고, 피아노 음악이 나지막이 들리는 가운데 가벼운 담소를 나누며 정감 있는 저녁 시간을 보낸다. 테오도어는 낙천적인 미치와 부담 없는 연애관계를 펼치는 반면, 유약한 성격의 프리츠는 상류사회의 한 유부녀와 복잡 미묘한 비극적 사랑에 빠져있다. 테오도어는 프리츠가 이 감정의 소용돌이로부터 벗어나도록 하기 위해 크리스티네 와의 구속력 없는 사랑의 유희를 제안한다. "기분 전환! 그게 바로 심오한 의미라네. 그 여자들은 기분전환을 위해 존재하는 거야. 그래서 소위 흥미로운 여자들이 내게 거슬리는 거지. 여자들은 흥미로울 게 아니라 편안해야 하네, 라고 테오도어는 프리츠를 설득한다.
프리츠는 테오도어보다 불안정하고 훨씬 예민한 성격의 소유자다. 그런 그에게 시의 극장 바이올린 연주자의 딸인 순진한 크리스티네는, 순간적인 행복을 체험함으로써 자신의 권태로운 삶으로부터 도피할 수 있게 하는 하나의 가능성 일 따름이다. 그는 이러한 의도에 거스르는 모든 것을 철저하게 거부한다. 예컨대 프리츠와 함께 극장에서 목격된 신비한 “검은 옷의 귀부인"에 대한 크리스티네의 근심스런 물음은 그대로 묵살된다. “우리, 분명히 약속했잖아, 아무것도 묻지 말자고, 그게 바로 멋진 거야, 당신과 함께 있으면 이 세계는 가라앉아 버리지, 그것으로 끝이야. 나도 당신에게 아무 것도 묻지 않겠어.”

 

 

 

프리츠에게 있어서 현재는 그 자체로 독립된 시간적 공간으로서, 과거나 미래와의 어떠한 연관성도 인정될 수 없다. 시간의 연속성은 서로 상관없는 순간들이 만들어 내는 우연의 모자이크로 분해되는 것이다. 행복은 순간이 멈추어 버릴 때만, 즉 순간을 영원하게 한다는 의미에서만 가능하다. 그 까닭에, '순간은 유일하게 영원한 것' 이라고 프리츠는 역설할 수 있는 것이다.
현실은 포착할 수 없는 것이기에 오직 순간적으로만 접근할 수 있다는 이러한 의식은 극단적 언어회의와 연관되어 있다. 이러한 언어회의는 "황제 와 마녀" Der Kaiser und die Hexe, "작은 세계극장" (Das Kleine Welttheater) 등, 초기 호프만 스탈의 서정적 드라마에서도 두드러지는, 더 나아가세기 전환기를 풍미하던 하나의 흐름이기도 하다. 프리츠는 순간적 체험의 신비로움을 파괴하는 "거창한 말"을 더 이상 믿지 않는다. 그가 믿는 유일한 것은 "분위기”이다. 그는 마지막 만남에서 크리스티네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알 수 있는 것은 하나 밖에 없어, 당신이 이 순간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거야"
이렇듯 의도적으로 연출된 안락한 한때는 한순간에 무너져 내린다. "검은 옷의 귀부인"의 남편으로 밝혀지는 한 익명의 신사가 예고 없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는 프리츠가 자기 아내에게 보낸 사랑의 편지들을 돌려주며 프리츠를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으로 밀어 넣는다. 결투를 피할 수 없게 된 프리츠는 곧 사형선고를 받은 것이나 다름없다.

 

 

 

제2막은 크리스티네가 아버지 바이링 씨와 함께 살고 있는 지붕 밑 방에서 진행된다. 함께 등장하는 빈더 부인은 주변사람들을 친절한 충고로 괴롭히는 이웃집 여자이다. 그녀는 남편의 사촌과 크리스티네를 결혼시키기 위해 바이링씨 부녀를 설득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분별있는 바이링씨는 현실적 이익과 안전한 삶이 보장된다 하더라도 행복도 사랑도 없는 인생에의 권유를 단호히 거절한다.
한편 프리츠를 만나지 못한 채 돌아온 크리스티네는 두통을 호소한다. 그러나 약속된 데이트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던 프리츠는 갑자기 그녀에 대한 강렬한 향수에 사로잡혀 문앞에 서있다. 명목은 잠시 여행을 떠나야 한다는 것이었지만 실상은 영원히 작별하기 위해 크리스티네의 집을 찾은 것이다. 조화와 슈베르트 흉상으로 장식된, 작은 서재가 발린 이 공간은 죽음을 눈앞에 둔 프리츠에게는 낙원의 안락함으로 승화되어 나타난다. 동시에 그의 내부에서는 이러한 목가의 헤아릴 수 없는 허위성에 대한 인식과 절망이 집요하게 교차된다. "아아, 이런 시간들이 얼마나 거짓 됐는지!”
2막에서 3막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프리츠의 결투와 죽음은 완전히 생략되어, 3막은 프리츠의 죽음 이후의 비극적 결말부분을 다룬다. 그가 결투에서 다른 여자 때문에 총을 맞았다는 사실을 크리스티네가 안 것은 이 미 그가 매장되고 난 이틀 뒤였다. 결국 크리스티네는 자신이 프리츠에게 시간 때우기 이상의 어떤 의미도 아니었다는 것을 제삼자를 통해 알게 되는 것이다. 그가 거짓 속에 죽어 가는 동안 자신은 거짓 속에 살아왔다는 것을 인식한 그녀는 결국 절망감에 사로잡혀 죽음의 길을 택한다. 그것이 육체적 죽음인지, 혹은 정신적 죽음일 뿐인지는 독자 또는 관객은 단지 추측 할 따름이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부수적으로 보이는 대사의 어조이다. 크리스티네 의 절망은 제3막에서 예기치 않게 절박하게 농축되는 대사에서 특히 급거 하게 직접적으로 표출된다. 이 어조에서 일시적인 관계의 비극적 핵심이 드러난다. 이러한 세밀함은 등장인물의 사회적 특징이나 행동방식들을 묘사하는데 있어서도 유효하다. 이를 통해서 주인공들은 특정한 역사적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크리스티네를 비롯한 세 여성 역시 당시 사회와의 맥락에서, 혹은 오늘날에도 존재하는 특정 유형들을 대변한다. 무엇보다 슈니츨러는 빈더 부인의 결벽증과 미치의 경박한 성윤리가 가진 공통점을 인식하고 비중을 두어 이들을 묘사한다. 이 두 여성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이긴 하지만 당시 사회의 틀과 가치관에 부응하고 있음을 예리하게 꿰뚫어 볼 수 있는 시선을 그는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남자에 대한 관계를 주로 안전성과 이익의 차원에서 관찰하며, 또한 이를 추구한다. 빈더 부인은 남편의 우직한 사촌이 벌어들이는 "착실한 수입"에 깊은 인상을 받아 크리스티네에게 그와의 결혼을 종용한다. 마찬가지로 미치는 테오도어의 신분과 외모, 아름답고 화려하게 장식된 프리츠의 집에 매료된다.
그러나 프리츠와 테오도어에게 단지 "귀여운 처녀”로만 비춰졌던 크리스티네는 이 두 유형과는 아주 대조적이다. 실제로 크리스티네는 “귀여운 처녀” 이상의 역할을 하는데, 다시 말해 그녀는 속임수와 거짓, 무책임한 인습들이 통례화 된 한 사회의 악용을 드러내 주는 바로 그 예외이다. 그러나 프리츠의 감정의 유희는 결국 기만당한 남편과의 결투를 야기하고, 자신과 크리스티네에게는 죽음의 몇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크리스티네의 감정은 이와는 대조적으로 어리석으리만큼 나이브하다. 이 무조건적 감정은 사회적 인습에 적응하려 하지 않으며, 그렇기 때문에 결국은 절망적으로 좌절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크리스티네의 마지막 장면은 직접적이고 정확히 파악될 수 있는 시대적 관련성을 넘어서서 문학사의 새로운 한 차원을 보여준다. 작품의 주제와 인물들의 상호관계를 고려해 볼 때 〈사랑의 유희〉는 이 작품이 쓰여 진 19세기 말에 이미 역사물이 되어버린 독일 시민 비극의 후예로 간주될 수 있겠다. 레싱의<에밀리아 갈로티〉, 실러의<간계와사랑〉같은 예에서 관찰할 수 있듯이, 계몽주의적 시민비극의 경우에 시민계급의 젊은 여성들은 자신의 신분문제 혹은 상대방의 인간성 결여로 사랑에 좌절하여 파멸한다. 그러나 여성들이 이 문제에 대응하는 의식에 있어서 이 두 작품유형은 서로 다른 시대적 조건을 반영하고 있다. 계몽주의 시민비극에서는 자신이 현실적으로 파멸함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은 끊임없이 화해의 측면을 제시하고 있다. 여주인공은 인식의 행위를 통해 자신의 상황에 어떤 다른 출구도 없음을 직시하면서, 자신의 육체적 몰락을 사회의 압제로부터 자유로워진 개인의 유토피아로 승화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계몽주의라는 규범적이고 교육적 차원이 반영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슈니츨러에게서는 이와 반대의 상황을 관찰할 수 있다. 계몽주의적 인간성의 승화는 이제 인간의 숙명론에 패배하고 만다.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 의 초기자연주의 드라마 〈해뜨기 전〉과<들쥐 떼〉에서처럼<사랑의 유희>의 마지막 부분에는 더 이상 어쩔 수 없는 상황의 절망감이 두드러진다. 모든 등장인물은 개인으로서는 더 이상 제거할 수 없는 죄의식에 연루되어 있다. 익명의 초월적인 힘에 노출되어버린 개개인은 결국 거기 굴복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힘의 이미지는 크리스티네의 방에 걸려 있던 그림에 상징적으로 담겨져 있다. 그림은 창밖을 내다보는 한 소녀의 모습을 담고 있다. 그리고 밖은 겨울이다. 공교롭게도 이 그림은 "버림받음” 이란 제목으로 크리스티네의 미래운명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제 이 작품을 시대적 맥락에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다른 문학 사조와의 연관성을 몇 가지 지적하고자 한다. 우선 이 작품의 주인공 중에서 시대적 특징을 공유하는 인물로 단연 크리스티네를 언급할 수 있겠다. 부드러움과 병적인 특성을 가지고 인생을 기적으로 꿈꾸는 과민한 여성으로 묘사되는 크리스티네의 외견상의 특징은 신낭만주의, 인상주의가 선호하는 귀여운 처녀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다. 약속을 못 지킨 프리츠 때문에 순간적으로 병이 나는 섬약함, 그리고 자신의 사랑스러움을 의식하지 못하는 순진성 등도 이를 뒷받침한다. 특히 대부분 평민 내지 하층민으로 신분이 높은 남자의 몇 마디 아첨성의 말에 자신의 '미덕' 을 버리는 나이브함을 보여주거나,'내일까지 생각하지 않고' 순간의 감정과 감각을 따르는 성향도 그 당시의 특정 여성계층을 묘사한다. 프리츠와 테오도어도 당시의 비인 상류계층 남성의 전형적 유형이라 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과거의 수많은 연애사건들에 대해 슬퍼하면서도 이 감정과 더불어 즐기는 아나톨의 심리는 〈사랑의 유희>에서의 그것에 다름 아니다.
슈니출러에게는 어떤 개성을 가진 주인공들도 등장하지 않는다. 즉 이들은 성격비극의 주인공은 아니다. 그래서 긍정적 인물이 등장한다고 해도, 그들은 단순히 결함이 있는, 판에 박힌, 그리고 피상적인 모습을 가진 특정유형으로 그려지는 것이다. 슈니츨러 자신도 브랑드에게 쓴 편지에서 이렇게 토로한 바 있다. "내게 조연들은 대부분 어느 정도로는 성공적으로 묘사됩니다. 그와 반대로 나의 주인공은 언제나 아주 슬픈 어떤 것을 겪는 사람들입니다. 이 주인공의 중요성은 자신의 본질이 아닌 운명에 있습니다." 일차적으로 이 진술은 자신의 많은 주인공들을 피상적으로 다룬 데 대한 자기비판이다. 그러나 적극적인 행위자가 아닌, 근본적으로는 수동적 태도를 지니고 운명에 맞서지 못하는 주인공들의 모습은 슈니츨러 드라마를 다른 것들로부터 구분하는 특징이라는 점에서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물론 이 드라마가 보여주는 수월성은 다른 슈니츨러 드라마와 마찬가지로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나 이 드라마를 특히 돋보이게 하는 것은 생략기법이다. 이미 언급한 바 있지만, 2막에서 3막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프리츠의 죽음을 과감하게 생략하여 극의 긴장감을 배가하는 것이라든지, 그 죽음의 직접적 원인이 된 귀부인을 단지 대사를 통해서만 신비한 아우라 속에 등장시키는 것 등이 그 예가 되겠다. 즉 발단과 클라이맥스의 결정적 생략은 어쩌면 당시의 평범한 연애사건에 불과한 소재를 새로운 틀 속에서 과감히 변형한 것으로도 간주할 수 있겠다.
특히 슈니츨러의 대사 기법은 여러 차례 강조된 바 있지만, 대사를 통한 혹은 지문에 나타나는 심리적 암시나 묘사의 탁월함은 이 드라마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알레빈 R. Alewyn은 슈니츨러의 문학세계와 작가로서의 다양한 면모를 "영혼의 분석자이자 풍속묘사가, 사회비판자이자 진리의 광신자”라고 표현한 바 있지만, 이 드라마 고유의 가치는 무엇보다도 감수성이 풍부한 비인 대중극의 유형을 사회심리 드라마로 바꾸어 놓았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Arthur Schnitzler)는 1862년 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요한 쉬닛쯜러는 후두 전문의였으며 그도 역시 빈에서 의학을 전공했다. 1885년 의학박사 학위를 획득한 후 황실병원에 근무하다가 곧 개업하였다. 특히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와 친교관계가 있었고, 점차 문필 생활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극작가이며 소설가로서 그는 세기말에 처한 빈의 데까당한 시민사회를 묘사한 인상주의의 전형적인 대변자였다. 고달픈 체념과 헤어날 길 없는 침울, 꿈과 현실을 방황하는 불투명함과, 절박한 상황에서 엄습하는 생에 대한 권태와 죽음에의 동경을 심리학적이고 정신분석학적인 관찰을 통하여 아이러니컬한 회의와 윤리적인 상대론으로 묘사하였다. 단막극이나 정취적인 단편소설과 같은 소품을 즐겨 썼고, 초기와 1차 대전 후의 작품에서는 때로 사회문제를 취급하였으나 만년에는 윤리적인 면으로 기울어 무관심한 무기력을 극복하고 의지적이며 현실적인 생활태도를 제시했다. 그의 세련된 문체는 불란서의 프로베르와 모파상의 영향이 엿보인다. 1931년에 빈에서 죽었다.

Liebelei 는 Flirt 혹은 flüchtige Liebe를 뜻하는 바대로 순수한 감정의 앙가쥬망이 결여된 유희적인 남녀관계의 사랑을 철저히 규명함으로써, 미묘하게 얽혀서 작용하는 감정만에 의한 행동의 결과는 비극적인 종말임을 제시한다. 입센의 편모가 보이는 이 작품에서 그는 사랑스러운 처녀와 세상물정에 밝은 부인을 상대적으로 등장시킴으로써 그의 주제를 구현시키며, 그 두 유형의 여성 사이에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갈등하는 청년을 묘사하고 있다. 작가는 자유연애의 풍조 속에서 lieben과 liebeln을 구별함으로써 감정의 무상함을 밝힘과 동시에 진지하고도 윤리적인 인생관을 천명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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