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유진 오닐 '갈증'

clint 2025. 4. 3. 07:50

 

 

아우성, 죽음, 배의 침몰... 그 생존 게임에서 살아 남은 세 사람. 
하나의 작은 구명선에서 그들, 세 사람의 생존 게임이 시작되고 
작렬하는 태양, 갈증, 기아 그리고 배 주위를 맴도는 상어떼...! 
서서히 광기 휩싸이는 구명선. 
그리고 아련하게 남는 사내의 외침.
"안 돼! 안 돼! 그건 안 돼!"
결국......
생존자는......
없다.
침묵의 바다와 잔인하게 배를 달구던 하늘은 말한다.
- 상어떼의 승리! 
- 게임 종료!

 

 

 

1914년에 발표된 <갈증>은 젊은 시절 오닐이 심취했던 무신론적 인생관과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보이지 않는 배후의 힘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인간의 처절한 갈망과 희망에 무관심한 바다와 신의 모습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망망대해에서 배의 난파로 게임은 시작된다. 표류하는 구명보트에서 희망을 꿈꾸며

죽어가는 세 사람의 이야기다. 세 사람은 1등석의 신사, 춤추는 무희, 흑인노동자다.

매우 의미심장하고 잘 짜여진 구도로 인간의 본성과

인생에 관한 수준높은 물음을 던지는 수작이다.

 

 

 

<갈증(Thirst)>은 초기단막극 중에서도 오닐이 일생 동안 작품 속에서 표현하려고 했던 사상을 가장 절묘하게 응축해 놓은 수작이다. 바다 위를 표류하는 보잘것없는 구조용 뗏목 위에 세 사람을 등장시켜, 오늘날 인간이 처한 비극적 상황과 인간본성의 자화상, 그리고 신의 위상을 매우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 작품에 묘사된 배의 충돌과 사고 후 살기 위해 애쓰는 승객들의 모습은 오닐이 이 작품을 쓰기 직전 북대서양에서 일어난 타이타닉(Titanic)호의 실제 비극과 유사하다. 소우주를 상징하는 뗏목 위에는 일등석 손님이었던 신사와, 무대의상을 한 아름다운 댄서, 그리고 흑백 혼혈인 선원이 광기의 징조를 보이며 표류하고 있다. 뗏목 주위를 떠도는 상어들의 지느러미 이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작열하는 태양만이 그들의 죽음을 재촉하듯 화난 신처럼 이글거리고 있다. 침묵을 견딜 수 없어하며 “이 침묵이 얼마나 깊은지 모르시겠어요? 세상이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텅 비어 보이는군요”라고 말하는 댄서와, “아! 신이시여! 이건 정말 너무 가혹한 농담입니다”라고 소리치는 신사의 절규는 인간의 삶의 투영도이다. 그러나 그들은 절망과 희망사이를 오가며 애타게 구조를 기다린다. 이런 상황은, 사무엘 베케트(Samuel Beckett)(1906-1989)의 고도를 기다리며 (Waiting for Godot, 1953)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처한 상황과 유사한 이미지를 풍긴다. 극 상황 속에서 환상과 현실 사이를 오가는 그들에게 하느님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신사와 댄서가 꿈꾸었던 귀향의 희망은 마지막 장면에서 배 위에 홀로 버려진 다이아몬드 목걸이처럼 아무런 의미나 가치도 없는 환상에 불과하다. 댄서는 “나는 밤낮으로 너무 많은 끔찍한 꿈을 꿨어요― 너무나 많은 미친, 미친 꿈들을 말예요”라고 말하면서 꿈의 허상을 한탄한다. 댄서는 차라리 차가운 녹색의 바다 밑에서 죽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며, 성공과 돈을 위해 살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개처럼 죽어야 하는 자신의 운명을 지각한다. 하지만 그녀가 절망 상태에서 하느님을 원망하는데 반해 신사는 그것조차 포기한다. 그는 이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그저 절망할 뿐이다. 죽는 순간까지 그녀보다 더 이성적인 그는 이제 하느님을 불신한다. 신사의 경험에서 볼 때 하느님이란 아무 것도 해결해 줄 수 없는 존재이기에 허상이며, 선택은 오직 운명을 수용하는 일뿐이다. 희망을 꿈꿀 수 없는 극단적 상황에서 인간은 자연히 미칠 수밖에 없다. 현실에서 도피할 출구가 없기 때문이다. 감성이 풍부한 여성이기에 댄서가 먼저 무너지기 시작한다. 굶주림과 갈증에 공포와 절망이 겹치자 그녀는 이성의 통제를 벗어나기 시작한다. 이제 그녀의 구조에 대한 희망은 환영 속에서 추구되고 그녀는 환상 속에서 섬을 보았다고 소리친다. 녹색의 나무를 찾을 수 없다고 말하면서 댄서의 꿈을 부인했던 신사도 이제 서서히 무감각한 상태에 빠져 꿈을 꾼다. “난 내가 얼음물로 된 큰 컵들 앞에 앉아 있는 꿈을 꿨소. 내 손이 닿기에는 너무 멀리 있었지”라고 말하는 그는 이미 이성을 상실한 한 동물에 지나지 않는다. 마침내 댄서는 한 방울의 물을 위해 선원에게 자신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아낌없이 내놓으며 급기야는 자신의 육체조차 스스럼없이 미끼로 던지게 되고, 이 모두가 거부되자 미쳐버린다. 결국 물질도 댄서의 아름다운 육체도 무의미하며 인물들의 간절한 희망도 무(無)가 되는 셈이다. 신도 무관심한 인간의 삶에서 의미가 있는 것은 오직 무(無)일 뿐이다. 
붕괴된 인간의 상황은 흑인 선원을 통해서도 강조된다. 그는 댄서가 광란적으로 춤을 추다가 광기 속에서 죽자 칼을 갈면서 고요한 침묵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이 행복한 흑인 멜로디를 부른다. 신사에게 “우린 이제 먹을 게 있어. 우린 이제 마실 수도 있고”라고 말하는 그의 입술은 만족감을 드러낸다. 그러나 인육을 먹음으로써 생존하려는 선원의 희망은 신사의 방해로 무산되고 그들은 서로 뒤엉켜 싸우다가 모두 바다에 빠지고 만다. 결국 구조되어 귀향하는 소망을 추구했던 인물들은 그것이 부질없는 꿈이었음을 자각한 채, 상어의 먹이가 되고, 바다 위에는 검은 핏자국만이 남아 그들이 존재했던 흔적을 말해준다. 그들의 뗏목은 적막 속에 홀로 바다에 떠 있고, 태양은 언제나 그렇듯이 화가 난 신의 눈처럼 이글거린다. 몰려오는 열기는 마치 익사자들의 영혼처럼 정지된 공기 위로 떠오른다. 반짝이며 홀로 배를 지키는 댄서의 다이아몬드 목걸이만이 인간의 삶과 희망의 무상함을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