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장 아누이 '종달새'

clint 2015. 11. 12. 18:38

 

 

 

 

 

다르크를 재판하는 사람들을 장 이누이가 재판하는 이야기.
1953년에 쓰여진 「종달새(원제 : L'Alouette)」는 영국과 프랑스 간의 백년전쟁이 한창이던 때, 점점 힘을 잃어 가는 프랑스를 구하기 위해 신의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여인(잔 다르크) 나타난다. 여자의 신분으로 전쟁에 참여한 그녀는 결국 이단자, 마녀로 낙인찍혀 화형장의 불꽃 속에 사라졌다는 역사적 사실을 놓고 장아누이가 쓴 희곡으로 작가의 역사의식과 세계관을 엿볼수 있다. 잔느의 목소리를 빌려 당시 종교계와 권력층에 대한 작가 특유의 풍자와 독설이 가득하며 연극적으로도 극중극 형태의 구성으로 사실주의적인 무대구성의 제약을 넘고 있다.
특히 등장인물 들이 무대에 전원 배치되어 재판의 진행 중간중간에 극중극 형태로 막이나 장 전환 없이 극이 진행되는 형태는 한국의 마당놀이와 비슷한 구성으로 이해하면 좋을 듯하며 2시간 이상의 대작을 큰 무대 변형 없이 이끌어 갈수 있는 장점이 있고 극중극 중간에 돌출 되는 재판관련 이해당사자들의 끼어들기는 재미있기까지 한 묘한 풍자성을 지닌다. 장 아누이의 재능을 볼수있는 중기 계열의 작품에 속하는 이 작품은 국내에 1970년대에 번역 소개된 적품이 그후 35년 쯤 지난 2012년에 충청도의 목원대학교에서 초연했다.

 

 

 

프랑스와 잉글랜드 사이의 프랑스 왕위계승권 분쟁으로 시작된 백년전쟁을 배경으로 프랑스를 구원하는 잔다르크의 이야기이다. 프랑스 돔레미에서 한 소작농의 딸로 태어난 그녀는 16살이 되던 해 대천사 성미카엘과 신으로부터 샤를 왕세자를 도와 잉글랜드 군을 몰아내고 프랑스를 구원하라는 음성을 듣는다. 신의 계시를 받은 그녀는 남장을 하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기적 같은 승리를 이끌며 프랑스를 구원하고 샤를 7세를 프랑스 왕으로 인정받게 해준다. 그러나 당시 시대상과 종교적 판단들에 엮이게 되어 그녀를 마녀와 이단으로 몰아내고 법정에 세워 그녀를 심판하려든다. 결국 루앙의 시장터에서 어린 19세의 나이로 화형을 당하기 전까지의 재판에 관해 다루고 있다.
역사적으로는 재판후 화형되었으나 몇년후 잔 다르크의 명예회복이 되었고 그후의 프랑스 국민들의 영웅으로 추앙받은 성녀 반열에 올랐으나 작가는 그녀를 극중 극적으로 사면하는 파격을 보인다... 다분히 프랑스 적인, 장 아누이 적인 발상이다.

 

 

 

작가 장 아누이 작가 장 아누이(Jean Anouilh, 1910-프랑스 보르도 출신)는 어느 양복 제단사의 아들로 태어나 포도 향기속에서 유년기를 보낸다. 편의상 그의 생애를 구분해 보면 (1) 절박한 생활고 때문에 파리 법과 대학을 중퇴하고 어느 광고 회사에 다니면 서 글을 쓰던 제1기.이때의 작품이<벙어리 위뮐리스(Humulus lemuet,1929)>,<귤(1929)>등인데,다소 통속적이고 감상적이 지만 치열한 생의 고뇌와 낭만적 갈망으로 시선을 끌었다. (2) 병역을 마친 후 루이 주베(Louis Juvet, 1887-1951, 자끄 꼬포의 제자, 배우, 연출가)의 비서가 되어 많은 희곡과 시나 리오를 쓰던 제 2기, 이 때의 작품이<담비 (32)>,<제사벨 (32)>,<도둑들의 무도회 (32)>,<야성녀 (Le sauvage, (34)>,<죄수였노라 (34)>,<짐 없는 여행자 (36)>,<상리의 밀회 (37)>,<레오카디아 (39)>,<유리디스 (41)>,<안티고네 (44)>등인데, 1942년 1기, 2기의 작품들을 검정 희곡집(pieses noires)과 장 미빛 희곡집(pieces roses)으로 분류했다. 전자의 대표작으로 는<유리디스>-<야성녀>-<안티고네>등인데, 그 특징은 순수를 추구하는 주인공들과 굳어 버린 어른들의 세계와의 첨예한 대립 속에서 삶과 현대 사회의 부조리성을 폭로했다면, 후자는 근본 적으로 전자에서와 같이 현대 인간의 심리를 묘사하되 결정적인 파국 전에 사랑을 찾거나 막이 내려짐으로써 유쾌하게 끝나는 극들이다 (3) 이 이후의 작품들로는<<속 검정 희곡집>>(1946, 주로 전쟁 중에 쓴 작품들, 로메오와 쟈네뜨 등)이 나오고 이어 서, (4)<<빛나는 희곡집>>(1951, pieces brillantes, 심각한 분위기와 유쾌한 분위기가 교착)이 출판된다. 이 작품집의 대표 작은<성에의 초대 (47)>,<아르델 (48)>,<세실 또는 부천 학 교 (49)>,<연극 연습 (50)>,<비둘기 (51)>등이다. 이 뒤에 나온 것이 (5)<이빨 가는 희곡집(pieces grincantes, 1956)>인 데, 대표작은<투우사의 왈츠 (52)>,<틈새 바람 (55)>,<가련한 비토스 (56)>등등. 마지막 희곡집이<<의상을 걸친 희곡집>>인 데 여기서의 대표작은<종달새 (51)>,<베케트 (59)>,<그리운 앙뜨완느 (69)>,<금붕어 (?)>,<마담을 깨우지 말아요 (?)>등 등이다. 이 작가의 작품 세계는 양차대전을 겪으며 짓찝겨버린 서구 정신의 한 복판에서 느끼는 비관적인 생각을 다양한 형식과 무대 기법에 의존하여 표현하고 있으며 때로는 불가능에 대한 치 열한 탐색이 너무 혹독하게 표출됨으로써 씁쓸한 여운이 짙게 감돈다.

 

 

 

 

역사적 사실.

1337년 프랑스와 잉글랜드 사이의 프랑스 왕위계승권분쟁으로 시작한 백년전쟁은 1453년까지 116년 동안 계속되었다. 주요한 전장터가 프랑스지역이었던 만큼, 100여 년간 거듭된 전쟁은 프랑스 땅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이전시대 국가보다는 종교를 중심으로 살아가던 사람들도 이 지긋지긋한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는 어느 한쪽 편을 들어야만 했다. 그러는 사이 잉글랜드와 프랑스에서는 자연스럽게 근대적 국가의식과 애국심이 생겨났고 백년전쟁 후기에는 마침내 이러한 의식의 변화 속에서 프랑스를 구원한 소녀 잔 다르크가 탄생하였다.
다르크는 프랑스 동레미에서 한 소작농의 딸로 태어났다. 동레미는 프랑스 북동부지역의 작은 마을로 신성로마제국과 프랑스의 접경지역이고 백년전쟁시기 잉글랜드 편을 들던 부르고뉴 공국과도 경계를 맞대고 있어 국가간 분쟁 시기에 환란이 심했던 지역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신앙이 독실했던 잔 다르크는 16살 즈음 천사의 계시를 들었다. 그녀는 대천사 미카엘, 성 카테리나, 성 마르가리타로부터 발루아 왕가의 샤를 왕세자를 도와 프랑스에 침범한 잉글랜드군과 그들을 돕는 부르고뉴를 몰아내고 프랑스를 구하라는 ‘음성’을 들었다. 당시 프랑스의 발루아 왕가는 백년전쟁 기간 동안 가장 불리한 입장에 처해있었다. 샤를 6세의 아들 샤를 왕세자는 프랑스 북부 지역을 잃어버리고, 대관식도 치르지 못한 채, 잉글랜드와 부르고뉴 동맹군에 밀려 프랑스 남부 지역에 머물고 있었다. 게다가 일부 프랑스 귀족들은 샤를 왕세자의 출생이 의심스럽다며(모후인 이자보 왕비가 시동생인 오를레앙 공작과 관계를 맺고 샤를 왕세자를 낳았다는 의심을 받고 있었다) 그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잉글랜드의
헨리 5세
와 프랑스 카트린 공주의 결혼으로 잉글랜드에 프랑스 왕위를 넘겨주려 하고 있었다.
동레미의 평범하고 작은 소녀, 잔 다르크는 자신이 받은 계시를 실천하기 위해 마을을 떠나 왕세자에게 충성하고 있는 보쿨뢰르의 사령관에게 왕세자를 알현하게 해줄 것을 요청했다. 처음에 사령관은 잔 다르크의 계시를 믿지 않았지만 거듭된 간청에 설득되어 6명의 기사를 내어주었다. 기사들은 잔 다르크가 왕세자가 있는 시농성으로 가는 길에 호위를 맡았다. 적진을 통과해야 하는 위험한 여정이었지만 과연 천사의 계시를 받은 소녀답게 잔 다르크는 무사히 시농성에 도착했다. 잔 다르크의 이야기를 들은 샤를 왕세자는 접견을 허락하면서 처음에는 그녀를 의심하여 낡은 옷을 입고 신하들 속에서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잔 다르크는 접견장에 들어서자마자 가짜로 왕세자 자리에 앉은 사람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바로 샤를 왕세자 앞에 가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천사의 계시를 받아 잉글랜드 세력을 축출하고 샤를 왕세자가 왕으로 즉위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왔다고 엄숙하게 말하였다. 프랑스와 영국의 백년전쟁은 1337년부터 1453년까지 무려 1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계속되었다. 이 전쟁의 시발은 잉글랜드의 플랜태저넷 왕가와 프랑스의 발루아왕가 사이의 프랑스 왕위 계승권 다툼이었다. 프랑스 카페왕가의 11대 왕이며 아비뇽 유수를 일으킨 것으로 유명한 필리프 4세에게는 많은 아들과 딸이 있었다. 그 중 한 명이 잉글랜드의 플랜태저넷왕가로 시집 가
에드워드 1세의 며느리가 되었다. 그녀가 일명 ‘프랑스의 암늑대’로 불리는 이자벨 왕비이다. 이자벨 왕비는 유약한 남편 에드워드 2세를 몰아내고 일찌감치 아들 에드워드 3세를 왕위에 앉히는 등 상당히 정치적이며 행동파인 여인이었다. 그녀의 아들 에드워드 3세도 어머니를 닮아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남자였다. 한편 프랑스 필리프 4세의 아들들은 모두 후사가 없이 사망하여 샤를 4세를 끝으로 카페왕조는 직계가 끊어졌다. 프랑크왕국 시절부터 정해진 살리카 법전에 의하면 여성은 왕위계승권에서 제외된다. 필리프 4세의 남자직계가 끊어진 상황에서 프랑스 왕위는 필리프 4세의 조카 발루아의 필리프 6세에게로 넘어갔다. 그러나 비록 여성으로 이어진 핏줄이지만 에드워드 3세로 말하자면 필리프 4세의 외손자이니만큼 카페왕조의 직계와 더 가까웠다. 프랑스 왕위를 넘보던 에드워드 3세가 발루아가의 왕위 계승에 반발하면서 분쟁이 일어났고 한차례 승복과 번복과정을 거치면서 갈등은 심화되었다. 거기에다가 필리프 4세 때부터 분쟁거리였던 프랑스 내 잉글랜드 소유의 영토문제도 다시금 수면에 떠올랐다. 이렇게 시작된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왕위계승권과 영토 분쟁은 프랑스 왕이 인질이 되기도 하고 잉글랜드의 왕조가
헨리 4세에 이르러 랭커스터가 로 바뀌고서도 휴전과 개전을 거듭하며 계속되었다.
거의 100년을 지속하던 이 전쟁은 잔 다르크가 나타날 즈음 새로운 양상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프랑스 발루아왕가의 샤를 6세가 정신질환을 앓고 권력의 뒷자리로 물러나자 프랑스 내 오를레앙 공작과 부르고뉴 공작의 권력 다툼이 시작되었다. 샤를 6세의 사망 이후 왕세자와 결탁한 오를레앙 공작과 이들에 반대하고 나선 부르고뉴 공작의 갈등은 부르고뉴 공작이 잉글랜드군과 동맹함으로써 한동안 휴전 상태였던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전쟁을 재개하게 하였다. 이번에는 샤를 왕세자의 출생을 꼬투리 삼아 샤를 6세의 딸 카트린 공주를 잉글랜드의 헨리 5세와 결혼 시켜 왕위를 잉글랜드로 넘기려는 세력과 왕세자를 끼고도는 세력의 싸움이었다. 왕가와 귀족간의 싸움이었지만 막상 전쟁이 터지면 피해를 입는 것은 아무 상관없는 일반 백성들이다. 프랑스 왕위 계승권 전쟁이었던 만큼 모든 전쟁은 프랑스 내에서 치러졌고 100년간 지속된 전쟁으로 프랑스는 초토화되었다. 백성들은 왕가의 다툼에 병사로 동원되어 의미도 없이 죽어갔다. 누가 이기든 한편이 이겨야 끝날 전쟁이었고 프랑스 사람들은 도버해협을 건너온 잉글랜드군의 횡포에 적개심을 품게 되었다. 함께 극복해야 할 적이 생기면 사람들은 똘똘 뭉치게 된다. 중세시대 국가보다는 종교적 테두리 안에서 움직였던 일반 백성들은 100년간에 걸친 전쟁을 통해 국가에 대해 어렴풋이 의식하게 되었고 뚜렷하지는 않으나 일말의 애국심마저 품게 되었다. 누군가 강한 구심점이 나타나기만 한다면 이러한 사람들의 마음은 큰 힘으로 승화될 수 있었다. 그때 나타난 것이 바로 잔 다르크였다. 당시 프랑스를 이끌고 있던 샤를 왕세자는 출생의 문제에 충격을 받아 의기소침해져 있었다. 그는 전의를 상실한 채 시농성에 거의 도피상태로 머물고 있었다. 역대 왕들의 즉위식이 치러지던 랭스지역을 잃은 탓에 선왕 샤를 6세가 죽은 후, 왕으로 즉위하지도 못한 채 거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있었다. 부르고뉴와 화평조약을 맺은 그의 어머니 이자보 왕비마저 그를 왕위계승권에서 제외시킨 상태였고 잉글랜드 측에 섰던 부르고뉴에 점령되어 있던 파리의 고등법원과 대학도 샤를 왕세자의 왕위계승권을 부정하였다.
이미 프랑스의 왕권은 잉글랜드에 넘어간 상태로 보였다. 그러나 헨리 5세의 급서로 태어난 지 수개월밖에 안된 헨리 6세가 미처 즉위식을 치르지 못한 것과 샤를 왕세자를 지지하는 아르마냐크파의 항전, 프랑스에서 잉글랜드군이 사라지기를 바라는 백성들의 염원은 그에게 왕권으로 가는 일말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나타난 소녀 잔 다르크가 샤를 왕세자를 절망으로부터 끌어올렸다. 그녀는 샤를 왕세자에게 그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고 프랑스를 구원하겠노라고 맹세하였다. 샤를 왕세자의 마지막 보루가 된 잔 다르크는 오랫동안 잉글랜드군에게 포위되어 있던 오를레앙 지역으로 병사를 몰고 달려갔다. 오랜 전쟁으로 지쳐있던 프랑스 병사들이었지만 그들 또한 잉글랜드군의 횡포에 시달리던 백성들이었기에 천사의 계시를 듣고 왔다는 어린 소녀의 눈물겨운 노력에 감동하였다. 잔 다르크는 그들 마음속에 쌓여있던 애국심에 불을 질렀고 빨리 전쟁을 끝내고 나라와 가족을 구하겠다는 사명감으로 프랑스 군대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잔 다르크는 프랑스 병사들에게 승리의 여신, 행운의 여신, 전투의 마스코트가 되었다. 잔 다르크는 흰 갑옷을 입고 병사들 앞에서 직접 전투를 지휘했고 그녀가 이끄는 프랑스 병사들은 치솟은 사기로 영국군을 무찌르기 시작했다. 잔 다르크의 무모한 전투를 때로 반대하는 귀족세력들도 있었지만. 진실로 천사의 계시를 받은 탓인지 어려운 상황을 기적 같은 승리로 이끌어 내어 열세에 몰려있던 프랑스군을 단숨에 우위로 끌어 올렸다. 전쟁의 승리로 랭스지역을 차지하자 잔 다르크는 샤를 왕세자의 대관식을 적극 추진하였다. 샤를 왕세자의 프랑스 왕 즉위식은 영국의 헨리 6세보다 앞섰다. 이로써 샤를 왕세자는 샤를 7세로 프랑스 왕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신의 계시를 받고 온 한 명의 소녀가 이루어낸 일이었다. 백년전쟁은 1453년에야 프랑스 왕가와 부르고뉴가의 극적인 화해로 프랑스에서 잉글랜드군을 완전히 몰아냄으로써 끝났다. 백년전쟁의 종결로 잉글랜드는 프랑스 내의 영토 대부분을 잃었고 이 전쟁을 계기로 다시는 유럽 대륙의 영토를 넘보지 않게 되었다. 이후 잉글랜드는 대륙과는 다른 독자적인 역사를 만들어갔다. 프랑스 또한 잉글랜드 세력을 몰아낸 뒤 통일된 영토 내에서 국가를 중심으로 하는 근대적인 국가체계로 나아가게 되었다. 샤를 7세는 백년전쟁이 끝난 후 1456년에 가서야 잔 다르크의 마녀 혐의를 풀어주고 명예를 회복시켜주었다. 살아 있을 때 그녀를 버리고 죽어서야 복권시킨 것이다. 또한 잔 다르크를 죽음으로까지 몰고 간 교회는 1920년에 가서야 그녀를 성녀로 시성 했다. 귀족도 아니었고, 남자도 아니었던 핍박 받는 민중의 딸, 잔 다르크는 오늘날까지 그 죽음의 비장미와 함께 열세한 입장에서도 일어나 세상을 바꾼 강인한 여성의 대명사로 자리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