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카프카 원작 유경민 재구성 '피터의 Go Back'

clint 2025. 1. 19. 13:42

 

 

평화스런 어느 한 섬은 원숭이들의 낙원이다. 
어느 날 이 섬에 두 명의 선원이 들어와 원숭이 한 마리를 죽이고, 
나머지 한 마리를 생포해간다. 원숭이는 인간에게 성적 도구로 이용되는 등 
갖은 고통 속에서 인간에 대한 저주와 복수의 화신으로 변한다. 
서커스로 팔려간 원숭이는 피터라는 이름을 얻는다. 
여자친구의 목숨을 앗아간 총소리에 대한 공포가 유난히 심했던 피터는 
자신의 여자친구의 죽음과 인간들의 장난스런 행동에 대한 혼돈과 환청에 
시달린다. 혹독한 훈련을 견디지 못할 즈음, 서커스단의 한 소녀의 도움을 
받게된다. 우연히 소녀에게서 직립보행의 훈련을 받게되면서 피터의 운명은 
변하기 시작한다. 척추에 두개골이 안착되고 차츰 구강구조가 바뀌게되면서 
인간의 말을 배우게 된다. 인간의 언어를 습득하게된 피터는 이제까지의 
서커스단장과의 종속적인 관계를 부정하고 인간과 타협하려 시도한다. 
마침내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부와 명성을 누리게 된 피터는 자아에 대한 
의문을 갖기 시작한다. 단장은 영구히 피터를 종속관계로 놓기 위해 
소녀를 볼모로 음모를 꾸미기 시작한다. 곤경에 빠진 피터는 다시금 동물적 
본성을 되찾기 시작한다. 그러나, 피터는 단장에게 굴욕되고 소녀마저도 
단장 그늘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감염된 선원들 마저 피터는 자신의 
편으로 만든 후 단장에 대한 혁명을 도모한다. 그러나 피터의 동물적 본성으로 

인해 혁명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과거의 애인과 현재의 암원숭이, 
그리고 미래의 소녀까지도 피터를 구해주지는 못한다. 
오직 피터만이 단장의 총에 맞아 허덕이고 있다. 
미래와 같은 현재, 원숭이 같은 인간, 진실 같은 거짓, 이 모든 것이 
피터의 퇴장 뒤에 장면의 반복을 통한 역사성으로 희석되고 
상실과 고독이라는 화두를 남긴다. 
에필로그의 즐거운 놀이장면으로 인간의 추억과 상상을 표현하는 
전원장면이 반복되면서 끝난다.

 


형식적인 면에서 액자구조를 취하며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서만 암전을 두고 있다. 동물과 인간이라는 동떨어진 대상을 조직사회와 개인으로 표현된다. 조직사회는 군의 상징인 단장이, 개인으로 표현되는 건 피터이다. 그 두 개체의 변이 과정을 통해 현대 문명이 낳은 병폐와 역사의 반복성을 주제로 삼고 있다. 구관조라는 말하는 동물의 습득을 통한 원숭이의 제의적 탈출모색은 자유에 대한 필연적 운명론을 부여하고 있다. 결국 진화론과 창조론을 놓고 볼 때, 형식 자체에서는 진화론을 인정하나 작품 속의 운명론은 진화론을 거부하고 있다. 극중 원숭이가 원숭이 언어로 연기가 되는 장면은 단순한 동물의 흉내가 아닌 새로운 창조의 형태를 추구하는 방법적 탈출모색이며, 각 장면 장면의 연쇄적 상관 관계가 치밀하게 짜여져 있다.


 


故 추송웅의 빠알간 피터의 고백
프란츠 카프카 원작의 “어느 학술원에 제출된 보고서”는 한 마리의 원숭이가 남아프리카 해안에서 사로잡힌 후 구속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시도로써 인간화되었던 과정을 학술원회원들에게 보고하는 내용이다. 
1941년 경남 고성 출생의 故 추송웅 선생은 시대의 광대였다. 59년 중앙대학교 연극 영화학과 첫 회 입학생으로 들어가면서 연극 동아리 활동을 시작한 이래 71년 동아연극상 최우수 남자 연기상을 받으면서도 그는 단 하나를 위해 달렸는지 모른다. 바로 자신의 연기 생활 15주년을 자축하듯이 엄청난 돌풍을 일으킨 시대의 역작 <빠알간 피터의 고백>이다. 그 공연은 1977년부터 85년까지 총 500여회 공연이 무대에 올려졌으며, 15만 2천여명의 관객을 동원하여 당시 원화 가치로 총 3억원의 수익을 올릴 정도로 만인의 가슴을 감동시켰다. 스스로 기획 연출 각색 무대 출연 등의 일인 다역을 감당하면서 한국 연극계의 전무후무한 업적을 남기신 것이다. 그 모든 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오로지 하나였다. 무대 위에서의 진실! 85년 12월 급환으로 타계하신 후, 그 혼 들린 영혼의 메아리를 직접 접하지 못하지만 우리는 그의 진실을 저버리지 못한다. 무대에서 태어나 무대에서 떠나신 선생의 공연에 대한 열정과 삶의 진실!  

 


재구성, 연출의 변  - 유경민
참으로 어설픈 쇼다. 하지만 여느 연극 작업이 그러하듯이 과정은 힘겹다. 그렇게도 어렵고 힘든 과정 없이 관객은 배우를 본다. 배우는 연기를 한다. 그러나, 그 또한 거짓의 한 허울이다. 누가 누구를 위하여 서커스를 한단 말인가? 연극은 또 하나의 철창이다. 그 안에서 서로를 보고 자유를 부르짖고 절규하며 가슴을 찢는다. 이 극은 피터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요구한다. 피터는 억압된 극 형식에서 본질적 자유를 갈망한다. 암전 없이 행해지는 계속된 배역파괴는 피터의 혼돈은 물론 관객에까지 혼돈을 줄 것이다. 그러나 그것 또한 쇼의 일부분이니 어찌하겠는가? 단지 객관적 시선을 유지하여 공연이 가지는 에너지를 느끼길 바랄 뿐이다. 공연의 생명력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미 만들어져 있는 것이었다. 이 작품이 무대에 오르기까지 수많은 이들의 눈물과 한숨, 그리고 땀방울이 그것이고 그들의 진실된 믿음이 그것이다. 프란츠 카프카의 여러 작품들은 우리들에게 새로운 화두에 던진다. 그가 말한 그 깊은 절망과 방황의 언저리에는 언제나 자유에 대한 갈망이 있다. 이 작품에서도 카프카의 자유를 모티브로 활용했다. 그러나, 카프카의 자유와는 생각이 조금 달랐다. 카프카와는 달리 자유는 조직과 개인의 대립, 혹은 각 개인간의 대립 속에서 우연적이 아닌, 필연적으로 발생되는 말초적 초한계 상태를 표현하고 싶었다. 상황과 처지에 따라 인간은 천차만별한 자유를 갈구한다. 그렇지만 그 모든 바램은 조직 이라는 굴레를 결코 넘어서지 못한다. 그래서 조직을 대표하는 단장의 군대적인 이미지와 개인을 대표하는 원숭이 피터를 동등하게 표현하고 싶었다. 우리네 삶이 그러하듯이 철저히 약육강식의 논리에 의해 피터 또한 피 흘리며 쓰러진다. 과연 피터의 자유는 무엇일까? 그 해답을 피터의 앞과 뒤, 즉 전생과 후생에서 찾고자 한다. 그것은 가장 원초적인 원숭이들의 본성이 들어나 있는 서두와 에필로그의 전원장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