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칸딘스키 '노란 소리'

clint 2015. 11. 12. 14:33

 

 

 

 

 

우리에게 화가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칸딘스키의 작품 〈노란 소리〉 는 그가 추구한 "종합예술” 론을 잘 드러내고 있다. 바그너의 "종합예술 이론과 상징주의의 영향을 받은 칸딘스키는 예술들 간에 내적이고 영적인 일치와 조화. 상호작용이 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노란 소리〉를 통하여 소리. 동작, 색의 요소들이 내적이고 영적으로 연결되는 무대예술 작품을 실험하고 있다. 바그너의 종합예술이 외적이며 구상적인 예술 요소들 간의 결합을 목표로 하고 있는데 반해서. 칸딘스키의 종합예술은 내적이며 추상적인 요소들의 결합을 목표로 하는 특징을 가진다. 칸딘스키는 〈노란 소리〉외에도 몇 편 더 비슷한 경향의 희곡을 1900년대 초에 썼고. 이러한 그의 연극작업은 사실적 회화로부터 이탈한 그의 추상 미술 활동과 같이 이루어졌다. 회화에서 물체와 인간의 형체를 포기하는 한편. 그는 희곡에서 개인으로서의 인불과, 인물의 심리적 동기. 사건의 인과관계 등을 포기하였다. 칸딘스키가 추구한 무대예술의 스타일은 그 자체로 하나의 사조나 운동을 형성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최초의 추상적 희곡들 중의 하나로서, 그리고 사람보다는 조명과 음 향이 주가 되는 최초의 공연들 중의 하나로서, 〈노란 소리〉는 이후의 전위적 연극 스타일들의 도래를 예고하며. 연극사 속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1866-1944):
모스크바대학에서 법학과 경제학을 공부하고 법학도로서 장래가 촉망되던 칸딘스키는 1896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프랑스 인상주의 전시회에서 모네의 작품을 보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그해 뮌헨으로 향했다.
그로 하여금 화가의 길을 걷게 한 모네의<건초더미>작품에서 발견한 건 사물에 대한 구체적인 재현이 아니더라도 색채와 형태만으로도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자신감이었다. 이후 그의 그림에서 형태는 색채에 의해 덮여지고 역동적인 색채의 구사는 그의 음악적 취향에 의해 이루어졌다. 음악은 그의 추상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요소가 된다.
1911년 프란츠 마르크와 함께 뮌헨에서 청기사 그룹을 조직하고 비구상회화의 선구자가 된 칸딘스키는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모스크바로 돌아가 그곳에서 구성주의의 영향을 받아 기하학적인 형태를 차용하게 되지만 다채로운 색채는 여전히 그의 회화의 중심이었다. 이후 다시 독일로 돌아간 그는 바우하우스에서의 교육과 저술활동을 통해 자신의 추상이론을 정연하게 후세에 남겼다.
칸딘스키는 1911년 1월 2일에 프란츠 마르크와 몇몇 뮌헨 신미술가협회 회원들과 함께 아르놀트 쇤베르크의 콘서트에 참석하고 쇤베르크와 서신을 교환하기 시작했다.
오스트리아 태생의 쇤베르크는 12음계를 기조로 한 무조음악의 창시자이며 그림도 그렸다.
칸딘스키는 그해 말에 개최된 청기사전에 쇤베르크를 초대했으며 쇤베르크는 작품을 출품했다.

 

 

 

<인상3-콘서트>는 칸딘스키가 쇤베르크의 콘서트를 다녀온 뒤 그린 것으로 그가 말하는 인상은 시각적 인상뿐 아니라 비재현적인 방법으로 표현하는 모든 종류의 감각적인 인상을 의미한다.
이 작품은 특히 청각적 체험에 대한 인상을 표현한 것으로 형상과 색을 콘서트홀의 분위기와 소리에 대한 상징으로 표현하면서 노란색과 검은색이 두드러지도록 흰색으로 보완했다.
그는 청각적 인상과 시각적 인상을 동시에 표현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검은색을 칠한 면은 무대 위의 그랜드피아노를 상징한 것이며, 왼편 여러 개의 검은 곡선들은 무대 가까이 앉아 있는 청중이다.
피아노를 중심으로 양편의 흰색 기둥은 소리기둥을 은유한 것이다.
가장 인상을 주는 요소는 노란색으로 상징되는 쇤베르크의 소리가 홀을 가득 매운 것이다.
노란색은 칸딘스키에게 소리를 상징하는 색으로 1909년 무대구성에 관한 에세이에서<노란 소리>라는 제목을 사용했다.
<인상3-콘서트>는 회화와 음악이 서로 영향을 주는 공감각을 표현한 것으로 공감각synesthesia은 20세기 초반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클레의 작품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