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허자"는 국태민안과 임금의 만수무강을 축원하는 조선조 궁중음악으로
가사와 악보가 지금까지 전해오는 작품이다.
시인이자 극작가인 김용범이 도교적인 축원이 담긴 "보허자"를 30편의
연작시 속에 시적 이미지로 풀어 20세기 말의 한국으로 공간을 옮겨 놓았다.
마임이스트 김성구는 김용범의 시를 무대위에서 한국적 정서가 담겨 있는
침묵의 몸짓언어로 형상화한다.
볼거리 위주의 서양 마임이 아니라 자연스런 몸짓으로 우리 정서를 표현해
낸다는게 김성구의 의도이다.
그래서 마임이 아니라 "묵극"이라 이름붙였다.
전쟁중 잉태돼 국가 재건과 독재 치하에서 자란 뒤 고도성장의 주역에서
오늘날 IMF 체제하의 명예퇴직 대상으로까지 전락한 40대.
그들이 세상을 향해 내는 유일한 외침은 "침묵"이다.
이번 작품은 그들이 겪는 아픈 현실과 이 현실을 한차원 높게 승화시켜
몸짓언어로 풀어내는 "40대를 위한 소리없는 웅변"이다.
마임 특유의 침묵과 정적의 틈새로 비치는 이미지를 통해 우리 시대의
애환을 읽을 수 있다.
프롤로그 "연민, 그리움, 설렘"에서부터 에필로그 "용약"까지 총 7장으로
이뤄졌으며 기존의 서양 마임과 달리 스토리와 플롯을 입혔다.
2장 비상(모든 법이 상주함이 없이 인연에 따라 변천하는 일), 3장 유능제강
(부드러운 것이 강함을 이김), 5장 상선약수(최상의 선은 물과 같다), 6장
시해(몸만 남기고 혼백이 빠져 나가서 신선으로 변하는 일) 등 각 장의
제목에는 세기말의 어두운 현실을 초월하고자 하는 노장사상이 담겨 있다.
국내 마임 사상 최다 출연진인 10여명의 면면도 새롭다.
얼간이 역의 김성구를 비롯 민경진 오민해 차재성 김정국 이봉교 김세연
김태진 등 연극배우와 국악 전문가들이 가세했다.
보허자의 행보 - 김용범 작가의 말
사람이 살다보면 자기자신을 한번 겸허하게 되돌아보고 싶을 때가 있다. 그것을 자성이라고 한다면 나에게 최근 1년간은 바로 이같은 자성의 기간이었다. 연작시의 제목을 보허자라고 붙이고 글을 쓰기 시작할 무렵 오랜 김성구는 홀연하게 그간 끊겨 있던 연락을 취했고 나는 벙거지차림으로 불쑥 내방으로 찾아온 그에게 몇 십편의 시를 넘겨주었다. 나이 마흔을 넘기고 이제 황혼을 바라보는 중년의 자세로 짐짓 한발 물러 서서 앞으로의 일들을 생각해 보는 무렵이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작업 나는 계속해서 하루하루 일기를 쓰듯 시를 써나갔다. 마음 한편에 자리잡고 있던 응어리들이 하나 둘 풀려나가 다시 평정을 찾아가는 과정을 견디며 마치 수도하는 마음으로 지내자는 생각을 45편의 시속에 새겨놓았다. 대학원을 진학하며 도교와 문학을 학문의 방법으로 세우고 마치 넋 나간 사람처럼 문헌에 매달려온 10년 동안의 시간들이 되살아 났다. 그것들을 학위논문 2권으로 정리한 뒤 나는 그 세계를 벗어나 혼탁한 시정을 헤매며 살아야 했다. 그러는 어느 하루도 나는 평화롭지 못했다. 늘 경쟁 속에 있거나 명리를 구하기에 급급할 뿐이었다. 아니 오히려 그러한 경쟁과 실리를 즐겼는지 모른다. 그러다가 문득 물욕을 접고 경쟁과 현실에서 한 발을 뽑고 물러나왔을 때 비로소 내게 老莊세계가 뜻하지 않게 다가왔다. 그것은 학문의 영역이 아닌 그저 일상적인 시 몇 편으로 다가온 것이다. 보허자. 앞으로 나의 행로를 결정하는 몇 개의 테마를 그 속에서 얻어낸 것이다. 내심 내가 두려운 것은 묵극으로 되살아나올 이미지들이다. 어느 날 배우들과 함께 담소를 하던 중 나는 마치 무슨 일을 혼자 열심히 하다가 속마음을 들켜버린 것 같은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시가 시집이 아닌 묵극으로 옮겨지는 과정을 지켜보며 나는 지금 저으기 불안하다. 그러나 내가 믿는 것은 이제 원숙하게 무르익은 김성구의 상상력과 배우들이 펼쳐 보일 무언의 몸짓 뿐이다. 나는 빈 허공을 향해 그물을 던졌고 그 그물 에 걸려나올 것이 바로 비어 있음이란 지극히 당연한 명제임을 알기 때문이다.
국악이 배경음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신중현의 록 음악이 처음부터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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