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전혜성 '마요네즈'

clint 2024. 10. 15. 06:10

 

 

중풍으로 쓰러진 남편의 똥을 치우면서도 머리엔 마요네즈를 바르는 엄마.

바퀴벌레 한 마리만 나와도 괜시리 소리 지르는 엄마.

앵무새처럼 계속 이야기를 멈추지 않는 엄마.

늘 몽롱하게 취해서 현실과 몽상을 넘나드는 엄마.

딸 앞에서 소녀처럼 어리광부리며 엄살떠는 엄마 .

늘 시간에 쫒기는 딸.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 하지만 만만치 않은 벽에 부딪히는 딸.

뱃속의 아이와 늙고 초라해진 엄마 사이에서 지친 딸.

그래도 엄마의 버팀목이 되는 딸.

극중 엄마는 딸에게 무한히 희생하지도 않고,

딸도 엄마에게 고분고분하지 않다.

한 지붕 속에 사는 딸과 엄마는 옥신각신 다투며 다른 꿈을 꾼다.

딸은 철없는 엄마가 이해가 안 되고,

엄마는 인정머리 없는 딸이 야속하기만 하다.

엄마와 딸의 관계는 저마다 다르겠지만, 어찌 자식 이기는 부모 있을까...

늘 자식들 눈치보고, 자식을 상전 모시듯 하는 우리 부모님들 아닌가!
사춘기에 접어들면서부터 엄마한테 마냥 신경질 부리고 큰소리 치지만,

늘 우리는 엄마의 그늘에 살고 있지 않은가?

똥오줌 치우며 병든 남편 수발 거드는데 10년 세월을 보내지 않고서야

어찌 감히 그의 인생을 논할 수 있을까? 

침묵은 더 이상 금이 아니다.

말하지 않으면 모르고, 말하지 않으면 그를 알 수 없다.

 

 

 

엄마..?? 엄마란 단어는 사랑..따스함..미안함이 묻어나온다.

하지만 딸 아정은 다르다. 철없고 사랑받은 기억이 없는 엄마...

외로움이 점점 커져 공포로 변하면서 오로지 약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엄마...

어린시절, 너무나 이쁜 엄마를 동경하며 사랑했지만, 아버지가 임종하는 순간에도

자신의 겉치레에만 신경 쓰며 오히려 바지에 변을 지린 아버지를 구박하는

엄마를 보는 순간 엄마에 대한 사랑은 미움과 환멸로 바뀌어 버린 큰딸 아정...

어느 날, 엄마는 아정의 집에 오게 되고, 둘의 갈등은 점점 격해지게 된다.

형편이 그리 넉넉지 못한 아정의 사정을 알면서도 밍크코트를 사달라고 조르며

꿈에 그리는 말만 하는 철없고 겉치레만 신경 쓰는 엄마에게도

어린 시절 간절히 원하던 엄마가 있었는데...

서로 이해하려 들지 않는 두 모녀의 갈등의 끝은 어디일까..??

 

 

 

작가의 말
▶ 모녀의 '관계'에 대한 탐문
마요네즈는 전통적 모성과 모녀관계에 대한 도발적 뒤집기를 통해 '생존의 몸짓'에 얽혀 있는 여성 욕망의 문제를 되짚어보고자 구상된 것이다. 당연히, 전통적으로 여성의 자리로 위치매겨진 가족이라는 공간이 결코 단순히 개별적 성격들이 부딪침만이 존재하는 사적=탈사회적 장소가 아니라는 전제를 그 출발점으로 삼는다. 이것의 표면적인 구조는 소통불능의 모녀가 같은 공간에서 짧은 기간 서로 어떻게 밀쳐내면서 동시에 끊임없이 끌어당기는 방식으로 엎치락뒤치락 동거해 나가고, 또 그 모든 일이 일어난 후 결국 그들이 갈 길은 어디인가의 문제로 수렴되는 듯한 인상을 풍길 것이다. 그러나 그 저변에 깔려 있는 이들 모녀의 심리, 더불어 공유하였으되 동시에 단절된 일그러진 삶의 역사라는 대목을 간과하지만 않는다면, 이 문제는 보다 깊고 넓은 차원에서의 여성적 삶의 본질을 탐문하고 파헤치려는 근원적인 사유들로부터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임을 또한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근본적으로 아버지의 역사로부터 동떨어진 어머니의 역사란, 개인의 역사를 도외시한 채 그 자체로 유의미한 사회적 문맥이란 허황된 가정에 지나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제의 포괄성 속에서, 마요네즈는 일차적으로 아버지들의 역사가 꾸며낸 '통념적 모성'이란 회칠을 남김없이 걷어냈을 때 우리 눈앞을 치고 들어올 '벗겨진 모성'을 천착하는데 지렛대를 두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모성이란 모성 그 자체로 하늘에서 뚝 떨어진 실체적 진실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언제나 관계성 속에서 살아 숨쉬어온 인간성의 다양한 측면으로 고스란히 회귀되는 가변적인 속성이며, 그런 의미에서 단일자로 회귀될 수 없는 삶 그 자체가 움직여 가는 모양새와 물샐틈없이 닮아 있다. 모성이 무엇인가를 묻는 질문은, 결국은 인생을 따지는 작업이다. 그리하여 모성을 벗기기란 결국 삶을 벗겨내기며, 삶이란 세계내적 인간이 자신의 삶을 일으키는 출발점으로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욕망'이라는 본능과 신경핏줄조직처럼 긴밀히 연결된 '생존의 버둥거림'인 것이다. 마요네즈는 모성이기 이전, 인간인 여성의 욕망을 상징한다. 욕망이란 무언가를 갖고자 하는 것임과 동시에, 또한 끊임없이 이미 불필요해진 것을 배설하는 '관계적이며 동시에 순환적인' 개념이다. 누가 인간의 욕망을 비호하는 그 똑같은 입으로, 어머니의 욕망을 비방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삶이라는 퇴적층에 화석처럼 새겨져있는 '마음의 흔적'을 도덕적 심판의 대상으로 몰아가려는 어거지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다. 그같은 자가당착에 내포되는 한, 그와 동일한 모순에 의해 아버지의 역사 또한 왜곡되고 그 결과 자기자신에 대한 사랑이라는 가장 원초적인 진실조차 뿌리내릴 데가 없는 불모지가 떠내려가지 않겠는가. 여기, 적나라하게 까발겨져 차라리 무기력하고 오히려 나약해 보이는 '마요네즈의 모녀'는 그런 의미에서 부성의 자화상이며 동시에 시대의 자화상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세기가 바뀌어간다. 그런 의미에서 속 편하게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일방적 도취로서 미망의 대상이 되어버린 모성을 찬미하거나 모성으로부터 '욕망'을 거세시켜버린 가족애라는 것을 당연한 미덕으로 받아들이길 그치고 , '모성으로 억압된 어머니'가 아닌 '인간의 총체성 속의 모성'에 대한 보다 솔직하고 근본적인 되짚기를 필요로 하는 시점에 섰다고 본다. 당연한 진실처럼 수용되어 온 모성애, 혹은 모녀관계라는 것엔 누구나 숨기려 들지만 자신만은 알고 있을, 너무도 많은 이면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특히 우리 문화적 토양에서 생성된 작품 속의 어머니들은 대부분, 언제나 말없이 인내하고 끊임없이 밥을 차려주거나 자식을 낳아 키우다 이름 없이 죽어 가는 가부장적 욕망의 대리인의 위치에 결박된 채, 지지되거나 이용되고 그러다 덧없이 폐기되어왔다. 어머니란 언제나 그의 인간이었던 부분은 탈색 당하거나 매도당한 채, 자신의 의지와 욕망과는 다분히 거리가 있는 '모성이라는 조가비'만 떨어뜨리고 무대 저편으로 사라지는 역할만 맡아왔던 것이다. 이는 우리 자신의 삶에 대한 왜곡은 아니겠는가. 솔직한 모성을, 여과 없는 '모녀관계'라는 프리즘으로 편견 없이 되짚어보기. 그런 의미에서 마요네즈는 서로의 욕망으로 전면적으로 부딪치며, 서서히 서로를 깨달아 가는-그때의 깨달음은 단지 서로의 욕망을 이해한다는 차원에 국한되는 단선적인 깨우침과 다르다-모녀관계를 통해, 일상이라는 여성적 공간 내부에 오랫동안 은폐된 낯설지만 진실에 한 발짝 다가선 여성관계의 본질을 천착하려는 탐문의 과정이다. 이것은 여성에 의해 여성을 이해하려는 작업이기도 하며, 그것을 넘어서 남성을 다시 바라보기 위한 시도이기도 하다. 우리 자신부터 또렷이 들여다보려는 이 시도가, 인간의 이해에 봉사하는 것이 되길 바란다.

 

전혜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