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5년 발표된 <외스테로트의 잉게르 부인>(이하, <잉게르 부인>)은 <카틸리나> 이후 입센이 세 번째로 쓴 것이고 특별한 계기로 창작된 작품이다. 그 계기란 입센이 1851년 베르겐 소재 노르웨이 극장에 상임극작가이자 요즈음으로 말하자면 드라마투르크로 부임한 사실이다. 수도인 크리스티아니아(현재의 오슬로)에 국립극장이 있었지만 이 극장의 레퍼토리는 거의 외국 작품들로 이루어졌고 배우들도 거의 덴마크 출신들이었다. 여기에 비해 베르겐의 노르웨이 극장은 1850년 노르웨이 출신의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로 미국에 서도 성공한 올레 불(Ole B. Bull)에 의해 개관되어 설립부터 '노르웨이적'인 것을 표방한, 그야말로 '노르웨이인들에 의한, 노르웨이인들을 위한‘ 애국적 성향의 극장이었다. 이 극장에서 입센이 수행할 임무는 해마다 이뤄지는 개관 축하 공연을 위해 새로운 희곡을 한 편씩 창작하고 무대화하는 것이었다.
베르겐 노르웨이 극장의 중추적 역할을 맡게 된 입센은 이 극장의 기금 모임을 위한 이브닝 콘서트를 위해 쓴 '프롤로그'에서 스스로를 '민족시인'으로 인식하며 네 가지의 임무를 제시했다. 첫째는 민중의 국가의식 고취, 둘째는 찬란했던 과거의 재확인, 셋째는 노르웨이적 삶의 방식을 이루는 고결한 단순성의 칭송, 마지막으로는 노르웨이 언어의 찬란함을 제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임무 수행을 위해 입센은 <성 요한의 밤> (Sancthansnatten. 1853)을 썼으나 이 작품은 원작자 논란이 일었기 때문인지 1897년 자신의 독일어 전집에 넣는 걸 입센 스스로가 원하지 않았고 노르웨이 오리지널을 찾을 수 없다. 베르겐 노르웨이 극장의 상임극작가로서 입센이 발표한 세 편의 비중 있는 작품 중 첫 번째가 <잉게르 부인>이다.
이 작품은 1528년, 노르웨이의 중세 말을 배경으로 한 역사극으로 입센이 서른 살이 되기 전 쓴 작품 중 최고로 평가되었다. 또한 주인공인 잉게르 부인을 남성을 능가하는 힘과 능력을 요구받는 여성으로 그림으로써 전통이나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주장이 강한 여성상을 선호했던 입센의 진면목이 고스란히 드러나며 미래에 그가 어떤 여성들을 창조할 것인지 가늠할 수 있게 해준다. 잉게르 부인은 노르웨이에 실존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실제의 잉게르 부인은 <잉게르 부인> 속의 그녀와는 다르다. 이 실존인물과 역사적 사실들을 입센은 자신의 희곡을 위해 거의 소재로만 차용했을 뿐 많이 변경했다. 말하자면 <잉게르 부인>에 '역사극'이란 부제가 붙었지만, 작가가 역사를 재창조하려는 의도가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역사적으로 부정확하다는 지적을 받자 입센은 1874년 개정본에서 '역사극'이란 부제를 삭제했다.
그러나 입센이 처음에 '역사극'이란 부제를 붙인 이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노르웨이의 역사를 알 필요가 있다. 한때는 왕국으로서 영화를 누리던 노르웨이는 1380년 덴마크와 동군(同君)동맹을 맺고 덴마크의 속국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1814년까지 지속되었다. 덴마크-노르웨이는 나폴레옹의 견실한 동맹국이었으나 스웨덴은 나폴레옹에 반대하는 연합국들을 지지하는 나라였다. 나폴레옹이 1813년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패하자 스웨덴은 덴마크에 전쟁을 선포했고 이 전쟁에서 덴마크는 패했으며 노르웨이를 스웨덴에 양도한다. 노르웨이는 이제 스웨덴과 동군(同君)동맹을 맺어야 했고 스웨덴의 속국이 되었다. 노르웨이의 완벽하고도 실질적인 독립은 1905년에야 이루어졌다. 이렇게 수 세기 동안 노르웨이는 덴마크와 스웨덴의 속국으로서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측면에서 두 나라의 영향권에 있었으며 특히 거의 5세기 동안 지배를 받던 덴마크의 영향은 매우 컸다. 입센이 베르겐 노르웨이 극장에서 활동하던 19세기 중반에도 노르웨이가 문화적 빈곤국이었던 큰 이유는 거의 모든 문화 관련 시설과 건물, 유적지 등이 모두 덴마크에 있었기 때문이다.
<잉게르 부인>의 극중시간은 1528년, 노르웨이에 종교개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직전으로 입센의 조국은 여전히 덴마크의 지배하에 있었다. 입센은 덴마크에서 실질적인 독립을 이루기 위해 노르웨이인들이 저항하며 크고 작은 전투를 일으켰던 한 시점을 취해 노르웨이인들에 의해 세워졌고, 노르웨이인들을 위한 베르겐 노르웨이 극장의 슬로건에 맞는 민족적이고 애국적인 작품을 쓰려 했을 것이다.
헌데 이 민족적이고 애국적인 작품은 베르겐 노르웨이 극장의 초연에서 실패하여 겨우 두 번 공연되었다. 그 이유는 크리스티아니아 국립극장에서 이 작품이 '공연하기에 적합하지 않아' 제작을 거부한 것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국립극장은 공연에 적합하도록 수정을 원했지만 입센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역사극'이라는 부제와는 달리 <잉게르 부인>은 차라리 '정치음모극'의 성격을 띠며 정치적 음모가 실타래처럼 읽혀 있어 "어느 것이 주 플롯이고 어느 것이 서브-플롯인지 알 수 없고 주 인물들의 긴 독백들과 설명들은 배우들의 어려움은 물론 관객이 이해하기도 쉽지 않을 만큼 매우 혼란스러운 작품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더구나 외국에서 공연될 경우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에 대한 역사적 배경 지식을 갖지 못한 관객들이 쉽게 수용하긴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잉게르 부인>에서는 입센이 향후에 사용하는 중요한 극작 테크닉과 작가관, 혹은 예술관을 분명하게 읽어낼 수 있다. 사실주의 작가 입센은 도입부에서 주 인물들이 아닌 주변적 인물들로 하여금 극의 상황을 설명하게 한다. 주 인물에 의해 극이 도입될 경우에는 그가 오랜 부재 후 집에 돌아오고 그에게 주변인물들이 그간 일어난 일들을 설명하게 하는 테크닉을 입센은 주로 사용한다. <잉게르 부인>에서는 그녀 저택의 두 하인들이 나누는 대화를 통해 노르웨이가 처한 상황과 잉게르 부인이 이 불행한 나라의 지도자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린다. 잉게르 부인은 노르웨이의 훌륭한 가문에서 태어난 데다 매우 지적이고 자존심이 강하며 소녀 때에 이미 남자기사들을 능가하는 결단력과 조국에 대한 열정을 지녔던 인물이다. 그녀의 비극은 그녀가 스웨덴의 공작과 사랑에 빠져 사생아를 낳음으로써 시작된다. 사생아였기에 그녀의 아들은 다른 사람 손에서 자라게 되고 이 때문에 그녀는 노르웨이 백성들의 봉기를 돕지 못하는 처지가 된다. 노르웨이가 덴마크를 상대로 봉기하면 이 틈을 타 스웨덴이 노르웨이나 덴마크를 칠 것이고 그런 혼란 속에서 이미 자신의 아들이란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 그에게 어떤 불행이 닥칠지 모르기 때문이다. 잉게르 부인은 사랑과 의무, 개인의 삶과 공인으로서의 삶 사이에서 갈등한다. 결국 그녀는 핏덩이일 때 떨어졌기에 20년간 그 안위를 위해 참고 기다려온 아들을 알아보지 못하고 죽이도록 명령한다. 그 사실을 인지하기 전 그녀는 아들을 왕위에 앉히고 자신이 모후가 되기를 꿈꾸어 왔음을 깨닫는다. 극의 마지막에 잉게르 부인은 자신이 아들을 죽게 했다는 것을 알고 신을 원망하며 미쳐간다. 아들의 장례음악을 "즐거운 소리"로 들으면서 아들이 온다고 착각하며 그녀는 질문한다.
"누가 승리자지? 신이야, 나야?"
입센은 실존인물이었던 잉게르 부인을 덴마크와 스웨덴 사이에서 고통 당하는 노르웨이를 상징하는 인물로 창조했다. 아니, 잉게르 부인은 곧 노르웨이이다. 그녀가 스웨덴 공작과의 사이에서 사생아를 낳았고, 그 후 덴마크 공작과 정략 결혼한 것은 노르웨이의 운명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덴마크의 지배하에 있던 노르웨이 작가 입센은 극의 마지막에 잉게르 부인을 '크게' 그린다. 그녀를 신과 대치하게 하는 것이다. 신과의 대치에서 인간은 늘 패자 이다. 이것이 고대 그리스 비극부터 유럽연극을 지배한 법칙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과 대치하는 인간은 강한 의지의 소유자이며 소명의식을 지닌 특출한 인간이다. 입센에게 있어 강한 의지를 갖고 자신의 소명을 관철시키려는 인간이야말로 독자/관객에게 숭고함을 주는 인물들이다. 그래서 입센은 자신의 여러 작품의 주인공들에게 소명의식을 부여한다. 그 주인공들은 그러나 잉게르 부인처럼 고뇌하고 갈등하며 비극적 최후를 맞는다. 많은 평자들이 크기가 있는 입센의 인물들이 궁극적으로 대치했던 것은 인간이 아니라 '신'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잉게르 부인에게서 그런 싹이 배태되었다 볼 수 있겠다.
<잉게르 부인>은 1857년 노르웨이에서 500부가 출판되었다. 1874년의 개정본은 4,000부가 출판되자 책방으로 배포되기도 전에 이미 예약 판매가 끝났다. 이 현상은 현재와는 달리 공연 횟수가 적어 연극을 좋아하는 독자들은 희곡으로라도 작품을 경험하고자 했고, 1866년 <브란>(Brand)으로부터 입센이 문명을 얻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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