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센은 <헬겔란의 영웅들> 이후 5년 만인 1862년 3막 희극인 <사랑의 희극>을 발표했다. 베르겐 노르웨이 극장 재직시에는 의무 때문이었겠지만 거의 해마다, <브란>과 <페르귄트> 이후에는 2년에 한 편씩 발표하는 극작 리듬을 보인 것을 감안한다면 전작과 큰 시간차를 가지고 <사랑의 희극>이 창작된 것이다. 이는 아마도 입센이 1857년 크리스티아니아로 옮겨 이곳의 노르웨이 극장에서 예술감독직을 맡았지만 극장 재정이 빈약하여 경제적으로 너무 어려웠던 것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입센은 자의적 망명으로 고국을 떠나게 되는 1864년까지 7년간 크리스 티아니아에서 매우 어려운 시간을 보냈다. 1858년 수잔나 토레센과 결혼했고 다음 해 외아들 시구르가 태어났지만 그의 가족에게 경제적 어려움은 극복할 길이 요원했다. 이유는 무엇보다 입센이 1862년 재정적 어려움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극장도 그만두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들 시구르의 출생 이후 입센은 우울증에 빠졌고, 이 증세는 거의 2년간 계속되었다. 알코올에 탐닉하기도 했던 입센은 거의 미치광이가 되었으나 빚까지 지는 경제적 어려움에도 아들과 남편을 꿋꿋하게 지킨 아내 수잔나 덕에 5년의 침묵을 깨고 <사랑의 희극>을 쓸 수 있었다.
이 어려운 시간 동안 입센은 삶에 대한 미학적 관점과 윤리적 관점 사이에서 갈등했다. 즉 예술적, 혹은 작가적 고민이 민족주의와 미학주의 사이에서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에 놓여있었다는 말이다. 베르겐 노르웨이 극장 재직 시에는 해마다 민족적이고 애국적인 작품들을 써내야 했지만 어떤 의미에서 자유로워진 입센의 고민이 더욱 커진 셈이다. 특히 입센의 경우 천성적으로 위의 두 가지에 대한 충동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으며 이 둘의 갈등과 그에 대한 질문은 그의 전 생애 동안 지속되었다. 헌데 입센은 질문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기보다는 질문하는 속성이 더 강한 시인이었다. 바로 그런 질문의 제시가 극작가로서 입센이 평생 지녔던 전략이라고 보는 관점도 있다.
<사랑의 희극>이 5년 만에 창작된 작품이지만 그 부화 기간은 짧지 않다. 그 첫 싹은, 비로소 삶을 알게 해주었다는 수잔나와의 결혼과 함께 시작된다. 초고는 1860년 <스바닐> 이라는 산문으로 쓰였으나 지속되지 못했다. 그로부터 2년 후 입센은 삶에서의 내적, 외적 어려움을 극복하진 못했으나 적어도 자기 자신과 주위의 상황을 받아들이기로 체념한 덕에 자신과 자신의 당대에 대해 무언가 말할 수 있게 되었으며 그 결실이 <사랑의 희극> 이었다. 애국적 민족주의를 벗어난 입센의 일상을 다룬 첫 드라마가 <사랑의 희극>이다. 일견 사랑의 본질과 결혼이라는 사회제도를 공격하는 듯 보이는 이 드라마는 그러나 주변의 현실주의자들과 대치하는 주인공인 시인 팔크의 삶에 대한 미적, 이상적 관점을 천착하는 것이 주제이다. 이 주제를 극대화하기 위해 입센은 극적 장소와 캐릭터들을 각별하게 설정했다. 극적 장소는 할름 부인의 '빌라'로 도시 근교의 전원에 자리한, 삶의 리듬이 느린 곳이다. 그러므로 삶의 리듬이 빠르고 새로운 것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도시에 비해 이곳에서는 보수성이 강하고 전체적으로 나른한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인물들의 캐릭터는 그 이름에서부터 곧장 드러난다. 주인공 팔크는 하늘로 비상하는 매를 나타내는 'falcon'에서, 스바닐은 볼숭가 사가에서 죄도 없이 말발굽에 짓밟혀 죽는 공주이며, 목사인 스트로만은 허수아비를 뜻하는 'strawman'에서, 할름(Halm) 부인의 이름은 '짚'을 의미하는 독일어에서 왔고, 사업가이며 가장 현실적인 인물 귈스타(Guldstad) 역시 독일어로 보면 'goldene Stadt'(황금의 도시)라는 의미이다. 할름 부인이 공무원의 미망인인 것, 스튜베르 역시 공무원으로 설정된 것에서 입센의 의도를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어쨌든, 입센은 캐릭터들의 이름과 직업이 그 인물들의 속성을 드러내는 바로크 시대의 연극 전통을 이으면서 동시에 자신의 당대를 공격하는 진지한 드라마를 캐리커처와 과장의 세계로 설정했다.
이미 언급했듯, 당대의 일상을 다루었지만 <사랑의 희극>은 운문으로 쓰였다. 일상적 소재에 비일상적 문체가 사용되었기에 일차적으로 부조화를 드러낸다. 이 부조화 때문에 극적 효과가 약화된다는 지적도 있었으나 소재와 형식에서 오는 괴리가 극적 긴장감을 더해준다는 견해도 있다. 또한 <사랑의 희극>에선 딱히 플롯을 찾기도 힘들다. 인물들과 코러스의 노래가 삽입되긴 하지만 철저히 언어극이라고 할 수 있다. 극적 긴장이 인물들의 행동에 의해서라기보다는 대화의 내용에서 생성되기 때문이며, 주인공인 팔크와 스바닐에 대비되는 여타 인물들의 '말' 또한 극을 풍요롭고 흥미롭게 하기 때문이다.
시인으로서 팔크가 추구하는 것은 진실이다. 이 현실 세상에선 진실을 찾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상주의의 전통에 따르자면 진실은 시 속에 미의 형식으로 표현되는 그 무엇이며 일상과는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것이다. 일상을 사는 사람들은 현실에선 불가능한 그것을 애초부터 찾고자 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팔크가 그것을 찾고자 하니, 그것도 자신의 뮤즈로 상정한 스바닐과 함께 하고자 하니 그야말로 이상주의자인 것이다. 입센과 모더니즘의 탄생을 천착한 모이(Toril Moi, Henrik Ibsen and the Birth of Modernism. Art, Theater, Philosophy, Oxford Univ. Press, 2006)는 입센이 이 희곡과 거의 동시에 발표된, 입센의 걸작으로 평가되어 노르웨이 학생들이 배우기까지 하는 장시 "테례 비겐"(Terje Vigen)에서 주인공 테례가 자신의 일생을 파멸시킨 영국 귀족의 가족을 용서함으로써 이상주의를 통해 미학적 이상주의를 완성하는 것을 보이며 이상주의가 달성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기에 <사랑의 희극>에서 이상주의가 배경이 아니라 분석하고 비판할 주제로 삼을 수 있었다고 본다. 팔크는 영과 육,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고뇌하는 풋내기 시인으로 결혼을 "노예선이죠. 족쇄에다 사슬"이라고 생각하며 자유가 없어진다고 생각하는 인물이다. 팔크가 추구하는 '자유'는 일상적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팔크가 추구하는 자유 역시 작가 입센이 추구하는 자유이다. 팔크는 스바닐에게 자유로워질 수 있는 용기를 가지라며 "자유란 바로 당신 내면 깊숙이 숨어 있는 요구에 완벽하게 답하는 데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사랑의 희극>은 키르케고르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드라마로도 알려져 있다. 입센이 삶과 예술 사이에서 겪는 딜레마는 이 덴마크 철학자가 말한, 삶에 있어서의 미학적 관점과 윤리적 관점의 갈등에 다름 아니다. 입센이 그의 영향을 부인하고 있지만 키르케고르가 제기한 저항의 철학은 <사랑의 희곡>이 부화되고 있던 1860년대 노르웨이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활발한 논란이 있었으므로 입센이 어떤 의미로든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특히 키르케고르의 「유혹자의 일기」(1843)와 '실험적 심리학의 시도'란 부제가 붙어있는 「반복」(1843)의 여러 모티프가 <사랑의 희극>에 비슷하게 들어있다고 지적되었다. 후자의 글에는 열렬히 사랑하면서도 그 사랑이 현실화 되면 모든 것을 잃고 만다고 느끼는 시인이 나오는데 이 시인의 생각이 바로 팔크의 생각과 같기에 그런 지적이 나왔던 것이다. 입센은 매력적이고 강렬한, 설명하기 어려운 여성 캐릭터들을 창조한 작가로도 유명하다. 그의 다양한 작품들이 패미니즘적 읽기가 요구되는 드라마들인 이유이다. <카틸리나>의 푸리아, <솔하우그에서의 잔치>에 등장하는 마르기트, <헬겔란의 영웅들>의 이외르디스에 이어 <사랑의 희극>에는 스바닐이 등장한다. 그러나 스바닐이 왕고모에게 설득당해 팔크와의 짧은 정신적 유대감과 자기들끼리의 약속이었던 약혼을 깨고 결혼생활의 편안함과 안전함을 약속할 귈스타와의 결혼을 선택하는 모습은 비극적 여성의 모습이 아니며 평범한 일상적 여성의 모습으로 앞의 여주인공들과는 그 결이 다르다. 스바닐이 이런 선택을 하도록 한 것은 입센이 질문하고 있는 이상주의의 가능성은 끝내 차단되고 일상의 영역으로 떨어지는 것이 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어쨌든 스바닐은 입센의 작품들에 등장하는 편의상 조건 좋은 남편을 선택하는 여성들에 속한다.
팔크/입센은 스웨덴에서 독립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젊은 노르웨이에 대한 희망을 지니고 있다. 팔크는 스트로만 목사에게 말한다. “젊은 노르웨이는 신새벽에 깨어납니다. 수천의 무사들이 아침 바람에 용감하게 물결치는 깃발 아래로 나서고 있다고요." 그러나 팔크의 이 희망은 노르웨이인들의 위선에 변하고 만다. 그는 자신의 이상주의를 확고히 하며 스바닐에게 "이 영혼의 도살장"인 노르웨이와 노르웨이인들을 비판한다: “구경하자고. 온 나라의 스펙터클을, 그 희비극을, 그 광대놀이를- 모두 어떻게- 위선을 떠는지! (...) 모두 미라들이야. 입으로는 진실을 말하지만, 마음속엔 거짓이 도사리고 있어 그런데도 그들 모두 아주 예절바른 사람들이야!"
노르웨이인들의 천박한 소시민적 위선과 정신적 나태함을 비판하며 깨부수려 했던 입센의 행보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1862년 그는 크리스티아니아 노르웨이 극장을 그만둘 즈음 모르겐블라뎃에 연극평론가로서 평문을 쓸 때도 이러한 기조로 일관했다. 본 번역자도 입센 평전인 졸저 『모던연극의 초석, 헨리크 입센에서 <사랑의 희극>을 '노르웨이 비판극'의 첫 작품으로 소개했다. 입센이 크리스티아니아 극장에서도 진지한 극을 원하지 않고 종전대로 춤과 노래가 들어가는 번안극을 원했던 관객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던 사실에서도 그의 면모를 알 수 있다. <사랑의 희극>은 입센이 사회의 통념과 관습에 내재해 있는 거짓과 위선을 꿰뚫어보며 진실을 찾아야 한다는 작가로서의 소명의식을 확고히 한 첫 작품이다.
그러나 <사랑의 희극>은 입센을 고국 노르웨이에서 '파문당하는' 작가가 되게 했다. 신성한 제도인 결혼을 조롱했고 목사직을 희화화한 외피만 읽혔기 때문이다. 입센이 <사랑의 희극>에서 사회적으로 이미 받아들여진 제도나 사상을 비판하려 했던 건 분명하다. 그 자신도 나중 1872년에 그의 작품의 영어 번역자 고쓰에게 이 작품이 "사랑과 결혼에 관련된 모든 일에서 사회에 팽배해있는, 현실과 이상주의 요구 사이의 갈등"을 묘사하려 했다고 밝혔다. 이 때문에 입센은 뵤른손과 달리 국가에서 주는 작가 은급도 받지 못했다. 입센이 자신의 고국이 자신을 새장 속에 가두고 자유로운 날갯짓을 막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은 틀린 생각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어려운 시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5년 만에 발표한 이 드라마는 입센에게 있어 "하나의 치유행위였으며 이상적 요구와 현실의 삶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하는 깊은 성찰을 담고 있다. <사랑의 희극>은 발표된 지 10년이 지난 1873년 크리스티아니아 극장에서 세계 초연되었으나 연극계와 관객의 호응을 받지 못했다. 이 작품에 긍정적 평가를 한 사람은 오직 그의 아내 수잔나 밖에 없었다고 할 정도였다. 남편을 꿋꿋이 지켜온 동반자로서 당연한 입장이었을 것이다. 세계 초연의 실패에 입센은 좌절했고 적대감과 오해에 부딪쳤다고 생각했으며 스스로 극작가로서의 자질을 의심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입센의 좌절은 잠깐, 19세기 말까지 <사랑의 희극>은 크리스티아니아 극장에서 25년 동안 레퍼토리에 들어있었으며 77번 공연되었다.
'외국희곡' 카테고리의 다른 글
폴커 브라운 '자유로운 이피게니에' (1) | 2022.08.01 |
---|---|
모니카 마론 '아다와 에발트' (1) | 2022.07.30 |
헨리크 입센 '헬겔란의 영웅들' (1) | 2022.07.28 |
헨리크 입센 '외스테로트의 잉게르 부인' (1) | 2022.07.26 |
헨리크 입센 '솔하우그 에서의 잔치' (1) | 2022.07.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