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정창호 'ㅅㄹㅎ 8'

clint 2018. 4. 14. 12:01

 

작가의 글
아무도 평을 안 하시면 어쩌나 조바심을 느꼈는데, 반갑게 그 기대를 채워주셨습니다. 제가 쓰면서 느끼지 못한 점을, 지문에 관해서는 첫 원고부터 여전히 쟁점이 된 점을 반성하게끔 써주신 자세한 지적은 저한테 숙제가 많다는 것을 깨우쳐주셨습니다. 여태 방황하다가 막 사막에서 찬정 하나 솟아나는 걸 발견하고 먼저 표시해 둔 게 일련의 작품이 되었습니다. 이거다 싶어서 호기롭게 찬정마다 울타리를 치고 여기저기 짠우물을 긷기 위해 애쓰는 중입니다. 메마른 땅에서 서로 다른 지층이 움직이면서 뿜어 올리는 찬정처럼 제 글도 몹시 짜디 짠 물이 되면 좋겠습니다.
2005년 경에 파기 시작한 [ㅅㄹㅎ]시리즈가 벌써 8번째 우물을 팠습니다. 이 우물은 아주 새로운 우물은 아닙니다. 부조리라는 이름으로 이미 현대희곡에선 대명사가 된 갈래이지요. 그럼에도 제가 파는 이 우물은 나름 뜻을 품은 데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전위극은 그 역사는 물론 실연에 이르기까지 미미한 상태이고, 제가 이 물건을 붙잡은 지점은 늦어도 빠른 것이라 판단합니다. 문제는 이 낯선 형식이 새로운 내용을 담아내느냐겠지요. 아직은 내용에 욕심을 부리지 않습니다. 이 작품에도 제가 녹이려고 애쓴 내용은 있습니다. 다만 사실계열의 작품이 아니라서 자신도 분명하게 말씀드리기가 어렵습니다. 그것은 말하자면, 독자의 소통을 작가가 방해할 위험이라고 변명해 두렵니다. 독자가 전혀 모르겠다고 하면 일일이 나서서 설명을 해야하겠지만, 그것도 도리가 아닌 듯하여 내용은 생략코자 합니다. 다만 내용을 제대로 담을 만한 준비나, 그만한 그릇이 아직 아니됨을 알기 때문에 여전히 숨기려는 마음이 강하다는 겁니다. 제가 아는 전위극 스타일은 사실주의의 대척 지점에 있다고 믿음에서 출발합니다. 물론 '사실'은 '환상'을 반대편 날개로 삼고 싶어하겠지요. 그렇게 보자면 '부조리'는 '조리'에 반할 것입니다. 이론적인 주장이나 이견들은 접어두고......
이번에 올린 [ㅅㄹㅎ 8]은 작품 자체로도 완성품은 아닙니다. 여러 군데 지겨운 곳, 말장난과도 같은 곳, 무슨 말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혼란스러운 곳들을 리듬에 어울리게 많이 고쳐야 합니다. 이 작품의 가장 큰 문제는 지적해주신 것처럼, 무대화할 때 생기는 일들일 것입니다. 부조리극은 여러 가지 사정으로 무대화하기도 쉽지 않은 데가, 더구나 단막 부조리극은 우리 연극 형편상 무대화하기가 더욱 쉽지 않습니다. 짧은 공연을 보러올, 비근한 예로, 적어도 차를 몰고 오는 '기름값' 이상을 관객에게 던져야 하고 , 혹은 지적인 수고를 허사로 여기지 않을 만한 '즐거운 충격'을 선물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여의치 않습니다. 그럼에도 꾸준히 단막을 쓰는 까닭은 아직 부조리장막극을 쓸 만한 역량이 모자라서겠지요. 언젠가는 짧은 글들을 더 달구고 담금질해서 큰 작품도 얻어볼 요량입니다.
한 가지 분명히 갖고 가는 것은 있습니다. 그것은 작품마다 다르게 쓸 것이지만 제가 가진 일관된 뼈다귀입니다. 첫 번째가 저만의 작품을 가지려는 욕심입니다. 쓴 이의 이름과 작품 제목을 가리고서도 아, 이 작품은 그이 꺼구나, 하는. 두 번째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고 싶습니다. 들리지 않는 말을 들리게 하고 싶은 소망입니다. 들리고 보이는 것은 신비롭지 않고, 신비가 없으면 환상이 깨지고, 환상이 없이는 감동이 없다고 여기는 제 체질 때문입니다. 그러니 어쩌지 못해서도 제 작품의 인물들이 서로 상투적이지 않은 모습을 만들고, 그들이 뱉는 닿소리가 홀소리가 될 때까지 만들어 볼 생각입니다. 지적하신 지문은 시적인 이미지를 줘서, 만드는 이가 좀더 '아우라'를 만들도록 도우는 장치로 씀을 밝힙니다. 세 번째는 평해주신 대로 내용에 관한 것인데, 실은 이것을 강렬하게 갖기를 소망합니다. 그것은 이미지나 메시지나 행위나 그외 여러가지가 보태져서 나오겠지만, 그것을 찾기 위해 짠 우물을 파는 중입니다. 빛의 노크소리, 떨어진 빛의 몸이 붙고, 무대가 얼음으로 가득 차는-이것은 기술 개발로 먼저 이루어질 수도 있겠습니다-앞선 작가/연출가들의 고민을 나름 풀어갈 생각입니다. 물론 제 생각에 불과합니다. 흔하고 쉬운 길을 알면서도 어깃장을 놓는 마음은 저도 다시 냉철하게 돌아봐야 합니다. 이것이 맞는가? 맞고 틀리고의 문제를 넘어설 만큼 가치로운 일인가, 가치롭다는 판단이라면 또 그것을 가능할 만하게 쓰느냐, 하는. 이 글은 ㄷ님의 평에 답하는 편지 형식의 제 생각입니다. 더 폭을 좁혀서, 혹은 구체적인 대사와 행위를 두고 지적하여 제가 새로운 길을 찾는데 나침반이 되어 주십시오. 오늘, '지문' 관계와 '내용이 없다'는 점을 유념하고, 마음 깊이 받아들입니다. 아직 첫 권에 머무른 느낌이라서 저 역시 마음에 차지 않습니다. 앞으로 쓸 작품은 '형식을 갖춘 상태에서 내용을 담겠다'는 일념으로 쓰겠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뜻한 내용이 뿜어 나오지 않을 경우에는 '심공'(심한 공격)해주시기 바랍니다. 닥나무 껍질로 쳐주신 덕분에 팽이 잘 돌아가겠습니다. 고맙고 고맙습니다.

 

 

 

 감상평에 대한 답글
부조리극은 해석하기 나름이겠지요. 물론 제가 작품을 통해 하고 싶은 이야기나 이미지는 틀림없이 있지요. 다른 부조리극도 마찬가지겠지만, 이 작품도 앞뒤 서사를 연결해서 이해하려는 독자는 혼란에 빠지기 쉬울 겁니다. 그렇다고 작가마저 자신의 작품에 관해 어물어물 넘어갈 수는 없습니다. 작의를 밝혀야겠지요. 이 작품은 두 가지 큰 글감을 가지고 썼습니다. 하나는 사랑이고, 하나는 소통입니다. w님의 맨 첫 소감 그대로입니다. 사랑과 소통은 모든 문학작품이 주로 다루는 핵심적인 주제지요. 여기서 여기서 사랑은 연애를 다루고 있으며, 이 사랑의 소통은 불통을 통한 새로운 합일을 바라는 마음을 기원에서 나왔지요(작의). 부조리극에서 소통은 그야말로 불통임에도 이 의도적인 불통을 통해서 소통하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중간에 극중극 형식으로 나오는 에피소드가 일종의 소통이며, 이 에피소드는 그래서 빨리 끝납니다. 두 인물은 소통을 끊고 다시 불통의 세계에서 서로 말과 행위를 주고받지요. 작품을 쓰면서 제가 이미지로 가져가고자 했던 부분과, 아래로 내려갈수록 제 의도와 사뭇 다른 w님의 해석을 만나서 더욱 반갑습니다. 안 그래도 이런 작품을 왜 쓰느냐고 물을 때, 사실주의 작품은 왜 읽느냐고 되묻곤 합니다. 어느 글이든지 그것은 작가의 마음과 독자의 그것이 공감하려고, 가 대부분의 답일 것입니다. 저도 난해한 작품을 통해서 사실은 독자의 공감을 바랍니다. 세상이 만들어놓은 사람 사이를 부정하여 다른 방식으로 공감 받으려는 것이지요. 이를테면, 거짓을 통해서 진실을 드러내고자 하는 예술의 치명적인 본능(?)과도 같은. 무엇보다 제가 회심의 인물로 등장시킨 홍콩이 막연하다고 하신 점에서 작가로서 좀 찔립니다. 더 또렷하고 강한 이미지를 원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이 정체불명의 이름은, 이름조차 거부하는 이 괴물을 저는 현대문명(혹은 이념; 경제적인 느낌이 강한)의 보이지 않는 힘으로 나타내려고 했습니다. 에둘러 말하자면 ‘사랑과 이념을 두고 두 사람이 세상을 사는 방식’이라고 해둘까요? 한 사람은 사진기(오늘)를 누리며, 한 사람은 망원경(내일)을 갈구하며 살아갑니다. 두 사람은 서로 공통분모인 빛을 통해 마음을 트며, 오히려 빛의 근원인 꿈을 통해 갈등합니다. 결국 한 사람은 얼음덩어리를 피해 구원(탈출)에 매달리고, 한 사람은 현실의 불씨를 보듬으며 아픔을 견딘다는 설정입니다. 저는 글이라는 게 서사는 뼈다귀(메시지)이고, 묘사는 살점(재미)이며, 이미지는 갈비(상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들이 다 어우러진 아우라(가치)라고 부르곤 합니다. 해서, 독자가 아우라를 느끼지 못할 경우에는 그 상품에 많은 의문을 갖게 되겠지요. 하여, 독자로 하여금 필요 없는 의문이 들지 않게끔 다른 작품을 구상하겠습니다. 흔히 부조리극은 희극의 과정을 지나 비극으로 끝나는데, 저는 아우라 자체로 소통하는 새로운 부조리극(반연극)을 쓰고 싶습니다. 멀고도 험한 길 위에서, w님의 감상평을 통해 제가 앞으로 채워야 할 새로운 여백을 더 잘 알 수 있었습니다. 머리 아픈 작품에 보내주신 관심, 고맙고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