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박만호 '청진기'

clint 2018. 4. 13. 18:00

 

2005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 작

 

 

한 마을의 경조사 때 빠지지 않고 소리로 판을 잡던 술주정뱅이가 있었다. 좋게 이야기하면 마을의 예술가. 아들은 그 아버지가 싫어서 마을을 떠나 도회지로 간다. 십년 후 아비는 이미 죽어 적막하기만 한 그 마을의 밤을 한 술 취한 노랫소리가 골목골목을 누비며 깨우더란다. 그 아비가 살아 돌아왔나? 아니 가만히 들어보니 그 소리는 아비의 운율을 따르고 있되, 다소 다른 멜로디가 가미된 소리였다. 반가움에 청문을 열어보니... 옛날 마을 떠난 그 아들이 다시 돌아와 술이 취한 나머지 무심결에 제 아비처럼 노래를 하며 돌아다닌 것이었다. 시작을 알 수 없는 때부터 삶은 이렇게 연결되어 왔겠지, 그 소리와 함께. 우리 기억 속에 남아있는 그리운 소리를 반추해보는 즐거운 소리 여행이 되시기를 소망한다. 희곡을 읽었을 때 무척 새롭고 연극적이라는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무대 위에 올려진 작품에선 희곡에서 느꼈던 참신함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유는 아마도 '소리'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 작품은 모든 소리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남자를 통해 그의 삶을 보여준다. '소리'가 핵심이다. 우리 생활 속에 넘쳐나는 소리들처럼, 우리의 삶도 '소리'라는 단어로 풀어낼 수 있다. 엄마 뱃속을 떠나, 태어나서 처음으로 뱉는 울음소리에서부터 시작해 한 인간의 역사를 소리로 쓸 수도 있다는 생각이 재미있었고, 또 연극적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공연된 작품에선 소리의 의미를 설명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아마도 주인물인 '남자'가 체험하는 다양한 소리들을 관객들에게 들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소리 세계를 관객들에게도 경험하게 해주었다면 관객들 역시 자신의 소리에 대해서, 그 역사에 대해서 새삼 느끼게 되었을 것이다. 또한 극의 시작부터 그가 정신병동의 환자라는 사실이 너무도 뚜렷하게 드러났다. 처음 작품을 읽었을 땐, 그가 단지 소리에 예민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소리 감별사란 직업이 흥미로웠다. 그러나 공연된 작품에선 그가 정신병 환자라는 사실을 시작부터 알려주어 그의 소리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차단해 버렸다. 관객들에게 좀 더 다양한 소리들을 들려주었더라면, 관객들의 둔한 귀를 예민하게 깨워주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심사평
세상이 어수선한 탓인지 응모작들 중에서도 투신자살, 노숙자, 입시부정, 로또복권 등 세상살이의 고달픔을 담은 작품들이 유난히 많았다. 인터넷과 휴대전화의 문자메시지, 그리고 각종 드라마 매체에 많이 노출된 탓인지 대화체의 이야기 구사에는 능숙해졌으나 막상 연극이라는 무대예술의 특성을 이해하고 있는 작품은 드물었다. 최종적으로 심사자들의 손에 남은 희곡들은 박만호의 ‘청진기’, 김성제의 ‘바다로 가는 성북행’, 그리고 류세균의 ‘달 속의 그늘’이었다. 공사판의 살인사건을 그린 ‘달 속의 그늘’은 밑바닥 인생들의 성격설정이나 대사구사에 능숙했으나 극 구성이 너무 평이하고 결말 부분을 배영감의 감상적인 인생고백으로 가져간 점이 지적되었다. 지하철 승강장을 배경으로 해서 사회적으로, 성적으로 상처받고 억압된 두 모자의 아픈 일상을 포착해낸 ‘바다로 가는 성북행’은 살아있는 독특한 정서가 심사자들의 주목을 끌었다. 남편에게 맞고 사는 식당 파출부인 엄마와, 성전환 수술을 위해 일본으로 돈벌러 가는 여성적 아들의 아픔을 과장되지 않은 일상적 대사 속에 담아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극적 상황과 행동을 충분히 연극적으로 객관화시키지 못했고 극이 아직 작가의 주관적인 관점 안에 갇혀있다는 느낌이 있다.
현대생활을 지배하는 각종 소음과 어린 날에 듣던 정겨운 소리들을 대비시킨 ‘청진기’는 ‘소리’를 극적으로 전경화시킨다는 아이디어나, 신경증환자인 남편을 아내가 의료진과 공모해서 연극적으로 치유한다는 설정 등이 충분히 연극적이며 대사나 극 전개 기법도 상당히 감각적이었다. 그러나 ‘문명의 비인간성/어린 시절의 순수함’이라는 대비가 도식적이며, 극전개의 생략과 비약이 과도한 점에서 어느 기성작가를 연상시킨다는 점이 다소 걸렸다. 결국 각각 장단점을 갖춘 ‘청진기’와 ‘바다‘를 두고 고심을 거듭하다가 그 나름의 완성도와 무대적 상상력을 높이 사 ‘청진기’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희곡 당선소감
게으른 며느리에게 시켜야 할 일은 두부 만드는 일이랍니다. 느긋하게 일해야 맛있는 두부가 만들어진다죠. 군대 지휘관도 게으른 사람이 좋답니다. 게으른 천재여야지 괜히 아랫사람 생고생 시키지 않는다는 건데…. 요건 사실 게으른 아랫사람들의 소망이죠. 부지런한 천재 즉 이순신 같은 양반 만났다간 그저 죽었구나 하고 뛰는 수밖에 별다른 도리는 없지요. 안 뛰면 바로 곤장 맞지요. 난중일기 쬐금 보니까, 임진왜란 발발 전에 이 어른 매일 하는 일이 순찰 나가서 하급지휘관 곤장 치는 게 주업무이시더군요. 그렇게 만반의 준비를 다 하셨으니 백전백승의 신화를 창조하셨던 게죠. 선친께서 제 원래 이름자에 늦을 만(晩)자 하나를 넣어주신 덕택에 이렇게 느즈막히 입문하게 되었나 봅니다. 작은 상 하나를 펴놓으시고 늘 만년필로 원고지에 글을 쓰셨던 아버님께서는 교단 은퇴 후에 스스로 책 몇 권을 출간하셨죠. 그러곤 집안잔치가 있으면 친구 분들께 그 책을 선물하던 낙으로 사셨습니다. 평생 글을 쓰시던 열정은 정말 프로작가 못지않으셨지요. 이제부턴 저도 작심하고 자세 가다듬어 열심히 쓰겠습니다. 작은 상 앞이 아니라 PC 앞이 되겠네요. 축하해주는 벗님들, 사랑하는 영두와 영소, 그리고 가족들. 더불어 삶의 위안과 기쁨을 원하는 이들을 위해서. 아울러 미흡한 글을 뽑아주신 심사위원들께 감사의 말씀 올립니다.

약력
1959년 충북 제천 출생
중앙대 교육대학원 무용 석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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