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줄거리
회사 입사를 위해서 경쟁자인 남자에게 설사약을 먹인 '나'는 돌발적인 사고로 남자를 죽이게 된다. '나'는 자신의 살인을 자수하기 위해 경찰서를 찾지만 형사는 '나'의 자백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나'의 한바탕 소통이 있고서야 형사는 '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나'는 형사에게 자신을 살인범으로 체포할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하겠다고 제안한다. 솔깃한 형사는 '나'와 함께 과거의 사건 현장으로 되돌아간다. 과거로 돌아온 형사는 회사의 사장과 밀접한 관계라는 사실에 위기감을 느낀 '나'가 남자의 커피에 설사약을 타는 광경을 목격하고 조심스럽게 증거를 수집한다. 면접이 시작되려는 순간 남자는 갑작스런 설사로 화장실로 뛰어가고 승리감에 도취된 남자는 형사와 함께 면접실로 들어간다. 그러나 면접실에 들어간 '나'는 회사의 여사장을 보자 고개를 숙인 채 묵묵답답할 뿐이다. 답답한 형사는 '나'에게 면접을 잘볼 것을 독려하는데, 돌연 '나'는 더욱 깊은 자신의 내면세계로 사라져버린다.

'나'가 찾아간 곳은 자신의 대학 시절. 경제학 교수의 광신적인 강의에 뛰어든 운동권 대학생 '나'는 교수의 강의를 훼방하고 그곳에서 강의를 듣던 한 여자를 만나게 된다. 첫 눈에 서로에게 반하게 된 '나'와 여자는 집회장에서 다시 만남을 갖는다. '나'는 자신감에 찬 목소리로 이 사회는 우리들을 진열장에 놓인 상품으로 만들 것이라며 이 사회와 맞서 싸울 것을 주장한다. 여자는 '나'의 연설에 넋을 잃고 빨려 들어간다. 한편 '나'와 함께 과거의 사건 현장으로 돌아갔던 형사는 갑작스럽게 사라진 '나'를 찾아 '나'의 대학시절까지 오게 되고 집회장에서 '나'와 여자를 발견한다.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던 형사는 충동적으로 뛰쳐나와 그들을 간첩이라고 몰아세우며 '나'와 여자를 체포한다. 예상치 못한 형사
의 등장에 '나'는 격분하고 형사와 '나' 사이에는 한바탕 혈전이 펼쳐진다. 형사는 간첩을 잡아 팔자 고치는 것이 자신의 평생 소원이라며 '나'의 애원에도 불과하고 심문을 시작한다. 심문을 하던 형사는 '나'의 대학 시절 사랑했던 여자가 바로 '나'가 면접을 보러 간 회사의 사장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나'를 비웃는 형사와 '나'에게 끝까지 신념을 잃지 말 것을 당부하는 여자의 부탁 속에서 '나'는 괴로워하며 서서히 허물어지기 시작한다. '나'에게 인간적 연민을 느낀 형사는 결국 여자를 풀어주고 '나'를 달랜다. '나'는 이상을 꿈꾸라고 목청을 높였던 자신이 면접을 위해 경쟁자에게 설사약을 먹인 사실을 말하며 삶에 실패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한다. 형사는 '나'의 이야기를 통해 '나'의 부모가 빚을 갚기 위해 동반자살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나'와 자신 모두 사회의 약자이며 피해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나'는 다시 형사를 데리고 과거의 사건 현장으로 돌아온다. 대학시절 '나'가 사랑했던 여자는 회사의 사장이 되어 차갑게 '나'를 대하고, '나'는 그녀 앞에 굽실굽실 허리를 굽히며 입사 시험에 합격시켜 줄 것을 재차 부탁한다. 여자는 '나'가 주장했던 신념은 고작 위선과 허풍에 불과했다고 모욕하고 바로 그 순간 '나'는 마음 속 깊은 속에 잠겨 있던 말을 폭발하여 쏟아낸다. 그것은 내 통장의 파산이 내 자신의 파산은 아니며 자신에게는 아직도 신념이 있다는 '나'의 마지막 몸부림과도 같은 말이었다. 그러나 이내 '나'의 폭발은 다시 현실 앞에 압도되고 싸늘히 나가는 여자를 향해 '나'는 또다시 굽실거리기 시작한다. 그제서야 화장실에서 나온 남자는 면접이 끝났다는 것을 알고 격분하여 '나'에게 달려들고 '나'는 남자의 공격을 피하다 그만 그를 밀쳐 죽게 만든다. 이 허망한 죽음 앞에 형사는 '나'의 손목에 수갑을 채운다.
다시 현재로 돌아온 형사는 내일로 찾아온 진급 시험에 전전긍긍이다. 자신을 괴롭히는 젊은 상관에 대한 증오로 흥분하던 형사는 아예 그 상관을 죽이기로 결심하고 그가 마실 드링크에 약을 넣으려고 한다. 그러나 막상 약을 넣으려던 형사는 도로 약을 치우고 비장하게 드링크를 마신다. 목소리를 가다듬고 어눌한 발음으로 영어를 읽는 형사의 씁쓸한 모습을 뒤로하며 무대 막 내린다.

작가의 글
전에 텔레비전에서 어떤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었다. 먹을 것이라고는 좀체 찾을 수 없는 눈 덮인 산 속을 배회하는 여우가 주인공이었다. 먹을 것을 찾아 이리저리 기웃거리던 녀석은 별안간 전속력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카메라는 영문도 모른 채 여우를 뒤쫓았고, 잠시 후 여우가 쫓던 그 무엇인가를 따라잡았다. 그것은 토끼였다. 여우와 토끼는 마치 경주를 하듯 그 눈 덮인 산을 끝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여우는 잡아먹기 위해 달렸고, 토끼는 잡아 먹이지 않기 위해 달렸다. 결코 어느 한쪽을 응원할 수 없는 치열한 그리고 잔혹한 경주였다. 그렇게 죽는 그 순간까지 지속될 그들의 달리기는 나의 뇌리 속에 지워지지 않을 각인을 새겨 넣었다. 그리고 이제 나는 서로 살기 위해, 서로 죽지 않기 위해 달려야하는 이 모순의 논리를 내 곁에서 나에게서 본다. 스스로를 포장하고 바겐세일도 하며 자신을 팔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나 자신을 본다. 그리고 이것을 삶 또는 현실이라 부르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이 사회가 거대한 밀림이 되고, 끝을 알 수 없는 거대한 시장(市場)이 되어버린 비극의 시대
에 더 이상 인간의 명예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헛된 관념이며 되찾을 수 없는 꿈에 불과하다. 우리들도 저 여우와 토끼처럼 생존을 위해, 삶을 위해, 현실을 위해 달리고 또 달릴 뿐이다. 그 누구도 멈추어 서서 이 모순의 논리를 되짚어 보자고 말하지 않는다. 약육강식 적자생존은 이 시대의 성스러운 패러다임이며 이를 의심하는 자는 오직 금치산자일 뿐이다. 자본과 시장이라는 거역할 수 없는 절대적 만유인력은 현실의 논리를 이탈하고자 하는 자를 추락시키고, 우리들을 땅바닥의 모이만을 쪼아대는 거대한 닭으로 만들어 버렸다. 결국 '나'의 이야기는 과거 완료형이 아닌 현재 진행형의, 우리의 사회가 존속하는 한 영원히 반복될 시쉬포스의 신화인 것이다.

차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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