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이만희 '돼지와 오토바이'

clint 2018. 3. 4. 14:24

 

 

 

인생을 사노라면 누구에게나 축약된 시간이 필요하기 마련이다. 그때는 어떤 식으로든 정리와 결단을 내려야 한다. 주인공 사내 황재규는 아내와 사별한지 십수 년이 지났다. 학원에서 영어강사를 하면서 혼자 살아오고 있던 터. 몇 년 전부터 박경숙이 결혼하자며 매달리나 그때는 자신이 결단을 내려야 할 게재가 아니었다. 여자쪽 집안의 반대가 워낙 심했기에 사내도 그저 연인 관계로 좋다고 생각해왔다. 어느 날, 경숙의 집요한 설득 끝에 그녀의 부모가 결혼을 승낙하게 되고, 내일이면 사내도 가부간 자신의 결심을 밝혀야 한다. 박경숙은 사내가 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할 당시의 제자다. 사제지간이며 나이 차이도 많다. 그녀는 수련의 과정에 있으며 미모와 품성을 겸비한 재원. 그에 비해 자신은 초라한 경력에 볼품 없는 처지에 전과 기록도 있다. 재혼을 할 것이냐, 말 것이냐? 이 문제를 놓고 사내는 깊은 생각에 빠져든다. 간단없는 상념 속에서, 결코 곱지 못한 자신의 과거 행적에 괴로움과 좌절도 맛보며 사별한 아내와 다정하게 의논도 하고 때론 심하게 다투기도 한다. 생각하기도 싫었던 과거지사가 적나라하게 펼쳐진다. 아내는 왜 자살했으며, 자신은 왜 옥살이를 했고, 지금 제자와의 결혼을 왜 주저하게 되는가 등. 이 작품은 바로 이런 사내의 내면의 흐름을 좇아 고심 어린 편린들을 모은 것이다. 사내의 두 시간 정도의 혼란스런 칩거 상태를 무대화한 것이다.

 

 

 

 

 

「돼지와 오토바이」는 기형아의 출생, 이를 감당 못하여 영아살해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 이로 인해 파탄을 겪는 어느 중년 남자의 비극적 삶을 서사 이야기 구조로 무대화하고 있다. 작품의 전체적인 틀은 ‘황재규’라는 사내와 ‘박경숙’이라는 여자의 결혼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사내는 극 중에서 이탈하거나 해설 역할을 겸하면서 자신의 과거와 주변적인 모든 이야기들을 놓는다. 그의 넋두리 같은 이야기들 속에 우리 삶을 은유화한 작가의 삽화들이 터져 나온다. 고아 출신이지만 비뚤어지지 않고 열심히 살아온 주인공 ‘황재규’는 사랑하는 여인과 가정이라는 행복의 울타리를 이루고 성실하게 살아간다. 그러던 그에게 느닷없이 불행의 그림자가 다가오는데 기형아를 낳게 됐던 것이고, 그 아이를 살해해 감옥살이를 하게 된다. 감옥살이 도중 아내가 자신의 친구와 불륜에 빠져 자살하는 일을 겪게 되고 수십 년이 지난 지금, 학원 강사 시절 제자였던 ‘박경숙’과의 재혼을 앞에 두고 고민에 빠져 있다. 「돼지와 오토바이」는 예측불가능하고 변화무쌍한 인간의 삶을 따스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작품으로 오토바이를 타기만 하면 즐거워하는 돼지의 우매함을 인간의 삶에 빗대 풍자하는 가운데 삶의 아름다움을 얘기하고 있다. 사노라면 한번쯤 안 떨어질 수 없는 우리네 인생, 그 속에서 중요한 것은 아무리 험난한 세상일지라도 살아 있다는 것이며 일그러지고 썩어 문드러진 삶이 어찌 아름답지 않느냐고 반문하고 있는 것이다.

 

 

 

 

 

제 자식 죽인 40대 사내의 인생유전 - 이만희 작<돼지와 오토바이>제목에서 연상되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대비이다. 돼지와 오토바이의 연계는 엉뚱하다. 그러나 오토바이에 실려 교미상대를 찾아가는 돼지는 오토바이를 탈 때마다 좋아서 꿀꿀거린다. 그렇다고 오토바이를 탈 때마다 본능(섹스)을 채운다는 즐거운 보장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 돼지는 어쩌면 도살장으로 팔려갈지도 모르니까….


이만희(李晩熙)의<돼지와 오토바이>는 일단 제명이 풍기는 그런 희화적인 가벼움으로 해서 수면에서 부상하는 떠오름 같은 것이 있다. 그런 떠오름은 기형아인 자식을 죽여 복역한 전력을 지닌 한 40대 사나이의 배신당한 인생경력이 그려내는 내면 풍경, 그 음산하고 무거운 가라앉음과 맞물리면서 다양한 극적 전개를 보여준다. 이만희의 작품에는 기본적으로 본능(섹스)이 있다. 그것은 경쾌함으로 이어지는 양념 같은 구실을 한다. 씨돼지의 제명(題名)에서도 그렇지만 주인공과 결혼하게 될 젊은 제자인 의대 수련의 과정의 경숙이 사이에도 건강한 성(性)이 있다. 그로써 배반하고 자살한 아내 때문에 십여 년을 홀아비로 살아온 현직 학원강사의 무력한 현실도 새로운 인생여정의 개시로 이어질 가능성을 내포한다. 섹스의 편린이 엿보인다 해도 이 작품의 연극적인 재미는 주인공이 풀어내는 내면 풍경과 연결된 현실의 무대화이다. 장면에 따라서 주인공은 재빠르게 정황에 맞추어 심리적 변신을 꾀한다. 그는 관객에게 이야기하고 죽은 아내에게 화내며 호소하며 싸우고 위로받으며 감정의 고랑을 넘어서 마침내 가라앉음의 무거움에서 부상하는 가벼움의 세계로 스스로를 반전시키는 것이다. 어쩌면 남편이 기형아 자식을 죽여 주기를 바랐으며 -살해를 공모했으면서- 혼자 죄에서 빠져나와 이미 심리적으로 파괴된 아내는 마침내 남편 친구와의 외도 때문에 자살했는데 남편은 그 까닭을 나중에야 알게 된다. 그렇게 주인공의 내면세계도 파멸되어 갔다. 그것이 원인이 되어 십수 년을 홀아비로, 세상을 허무하게 사는 그에게 제자인 젊은 경숙이의 사랑은 외곬이었고 그것이 그에게 다시 인생을 시작하는 청신호가 된다.       

 

 

 

(초연 공연 연습시 장면. 허규 연출과 이호재, 김명곤, 방은진·김성녀 등이 보인다)

 

 

주인공은 회의에 차 있고, 삶에 지쳤으며 따라서 그의 성품은 곰삭은 맛이다. 그는 회상 장면에 따라 절망하기도 하고 격노하기도 하지만 현실적으로 세속적인 중간계층이기도 하다. 여인 역할은 경숙이를 위시해 아내·여의사·검사·변호사·친구 아내 역할 등 무수히 변신하며 등·퇴장한다. 그런 변신의 무대적 가능성을 계산하는 이만희는 그래서 단순히 읽히는 희곡작가로서 보다 상연 가능한 무대를 아는 극작가로 평가된다. 물론 거기에는 북촌 창우극장을 주재하는 허규(許圭) 연출의 섬세한 감각이 동참한다. 그는 하나하나의 장면들을 나직하게 목소리를 죽이며 가라앉힌다. 억제된 힘으로 이야기 줄거리를 다스리면서 장면의 정확한 표출에 전념하는 연출은 무엇보다 튀는 것을 경계하는 그의 천성을 반영한다.
줄거리는 상당히 충격적인 소재들을 간직하고 있다. 우선 기형아의 몰골이 역겨울 지경이다. 그리고 영아 살해 장면도 가히 극적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허규 연출은 여기에서 가벼움과 가라앉음의 대비를 적절히 안배한다. 충격적인 장면은 가볍게, 그리고 가라앉는 장면은 깊이 가라앉게… 특히 주인공의 심리적 변화에 따른 음악이나 조명의 변주에 세심하게 신경 쓴 허규 연출은 무대를 지배하기보다 줄거리의 흐름에서 걸림돌을 배제하는 입장이다. 따라서 어쩌면<돼지와 오토바이>라는 북촌 창우극장의 개관 기념공연 작품은 연출을 숨기고 작가와 출연자들을 내세우면서 삶의 가벼움과 가라앉음을 식별시켜 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발 빠른 심리적 대응, 그리고 의상을 바꿔 입을 틈도 없이 바뀌는 변신을 무리 없이 성취해내는 A·B팀의 남녀 연기자들은 그만한 잠재력을 지녔고, 그들의 콤비네이션 또한 하나의 연극적 재미가 될 것이다.